보수와 진보.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을 두고는 많은 논쟁이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장이냐 분배냐. 둘 중 어디에 더 큰 가치를 둘 것인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파이를 키우는데 집중하면 보수라 하고 파이를 나누는데 집중하면 진보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파이를 키우는 동시에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트루먼이 외팔이 경제학자를 찾았던 것처럼 두 가치를 함께 잡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가를 잡으면 실업률이 상승하고 실업률을 잡으면 물가가 상승하는 게 필연적인 법칙이다. 어느 한 쪽이 올라가면 반드시 어느 한 쪽은 내려갈 수밖에 없다. 마치 시소와 같다(물론 시소처럼 이도저도 아닌 가운데 지점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런 점에서 '따뜻한 보수'라는 건 모순적인 구호다. 물가와 실업률을 모두 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보수적 가치는 실업률을 잡는 대신 물가를 포기하는 선택을 말한다. 성장을 위해 양극화를 감수하는 거다. 결국 시소의 양쪽이 모두 내려가 있거나 모두 올라가 있을 수는 없는 것처럼 '따뜻한 보수'라는 캐치 프라이즈는 성립조차 될 수 없는 말이다. 유치환의 '소리없는 아우성'이면 또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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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23:19

정유라가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건 기회의 불평등때문이다. 입시 시스템을 뛰어넘는 사유화된 권력의 힘으로 명문대에 부정입학을 했다는 점이 공분을 사고 있지만 사실 그 입시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승마 하나만으로도 대학(명문대를 포함한) 입시가 가능한 현재의 시스템말이다. 승마는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스포츠다. 비용부담마저도 크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구경조차 힘든 스포츠다. 대중화된 종목도 아닌 건 당연할 뿐더러 그렇다고 어떤 전통체육으로서 맥을 이어야 하는 종목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이곳에서는 굳이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육성해야 할 가치가 있는 스포츠 종목이 아니다. 그럼에도 국가나 기업, 유류의 대학들까지 승마를 붙들고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내기 위한 엘리트체육인을 육성하기 위해서다. 때문에 장시호든 정유라든 승마 하나만으로 유명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바로 지금의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었던 거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번째는 극소수만을 위한 엘리트스포츠 종목이 사회적 비용으로 유지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이런 종목들이 유지되면서 수혜를 입는 사람은 이 종목의 학생과 교수뿐이다. 사실 그마저도 학생이 교수가 되고 다시 새로운 학생들이 들어오는 단촐한 과정이 반복될 뿐이다. 이런 극소수를 위해 사회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하는가는 한번 고민해 볼 문제다. 두번째는 승마 같은 고비용 엘리트스포츠는 높은 진입장벽때문에 자체만으로도 기회의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억 단위가 넘어가는 말을 산다는 건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현실이다. 그만큼 승마 같은 고비용 스포츠는 과거의 기부입학처럼 돈으로 대학을 갈 수 있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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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9 21:56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소설이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성과 메시지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필요하다. 문학적인 가치만으로도 손색이 없고 동시에 세상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나 문제제기 또한 명확히 드러나야 하는 거다. 따라서 좋은 작품이란 두 극 사이에서의 적절한 지점, 그러니까 너무 직접적이지도 않고 너무 비유적이지도 않은 그런 위치에 놓여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균형을 잃은 작품이다. 문학보다는 르포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설로서의 비유나 풍자는 없고 세태 고발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지독히 현실적인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으면서도 작품 자체는 사실적이지 못하다. 문학적인 디테일에는 아쉬운 면이 많기 때문이다. 일례로 작품 속 어린 학생들은 어휘 몇 가지만 최근의 은어들로 대치되었을 뿐(작가와 인물의 세대차는 고스란히 은어에 대한 작가의 집착으로 전가됐다) 여전히 '태백산맥' 때의 인물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말투를 쓰고 있다. 남발된 은어와 예스런 말투의 조합은 좀 끔찍했다.

전반적으로 소설 치고는 완성도가 아쉽다. 문제의식이 옳다고 해서 작품마저 고평가되는 건 어느 장르건 내 취향이 아니다.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형식을 빌렸다면 기본적인 작품성을 갖출 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고 너무 직접적이기만 한 건 유치하게 느껴진다. 깊이 있는 자료 분석이나 현장 취재를 생각해보면 차라리 소설보다는 에세이 형식으로 문제를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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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0 23:01

박근혜의 실정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평가마저 재조명되고 있다. 의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유신을 중단시켰다는 게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내가 박정희를 좋아하지 않는 건 그가 이 사회에 결과만능주의를 심어놨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의는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최후마저 그 결과만능주의의 뒤편으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다뤄야 했던 많은 의미들이 죽음이라는 결과에 함몰되었다. 격발의 순간 심판의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다. 김재규가 쏜 총알은 박정희에게 면죄부가 되어 박힌 셈이다.

어쩌면 지금의 박근혜를 만든 건 김재규의 총알이었을지도 모른다. 박근혜에게 상식적인 사고가 결여된 것도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의 시간을 갖지 못했던 탓에 (심지어 부채감을 갖고 있었던 탓에) 사람들은 박근혜로 하여금 그의 뒤를 잇게 하였고 박근혜는 당시의 사고방식, 권위의식, 관행 등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것으로 부응했다. 결국 과거로만 생각했던 일이 세대를 건너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겪어야 했던 과정, 그러니까 포승줄에 묶여 플래시 세례를 받았던 그 시간은 먼저 박정희에게 주어졌어야 했다. 지금 보면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알 수 있다. 반성과 평가를 빠트린 대가는 혹독한 현실이 되어 되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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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9 16:39

상대편이 실수를 하지 않는 것보다 우리편이 실수하는 게 더 싫다. 축구로 따지면 상대편이 자책골을 넣어줬을 때 느끼는 기쁨보다는 우리편이 자책골을 넣었을 때 느끼는 실망감이 더 크다. 상대편이 자책골을 넣었을 땐 최소한 질 걱정은 안해도 되지만 우리편이 자책골을 넣었을 땐 당장 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편 구멍보다는 우리편 구멍의 존재감이 훨씬 크다.

이번 사태에서 완벽하게 묻히고 있는 건 야권의 무능함이다. 그들이 제도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 집권세력을 견제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개 언론사가 쥐고 있던 정보마저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견제라는 건 일종의 반응이다.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반응인 거다. 반응마저 제대로 못하면서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지금은 타인이 가져다 준 승리에 도취해 있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는 왜 그것을 쟁취할 수 없었는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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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6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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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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