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 사회는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인종차별에도 둔감하다. 조지 플로이드 같은 사건을 보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동남아인이나 중국인에게는 원색적인 차별을 서슴지 않는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문호 개방에 소극적이었던 시간이 길었던 반면 권위주의적 지배 체제는 오랜 시간 유지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분단의 경험도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튀는 언행을 보이면 빨갱이나 반동분자로 몰렸다. 같음과 다름은 이곳에서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물론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세상은 분명 변했다. 이제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 시대다. 하지만 같음에 대한 집착만은 여전하다. 권위주의나 집단주의는 옅어졌지만 한병철의 지적대로 SNS 등에 의한 과잉소통, 과잉정보가 자발적으로 같음을 추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그리는 행복이나 성공의 이미지는 전부 비슷하다. 오마카세 음식 사진이나 호텔방 셀카가 행복을 표상하는 이미지가 되었고,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업해서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의 기준처럼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와 최대한 비슷해지기 위해 소비를 하고 공부하고 취업에 매진한다. 이렇게 비슷비슷한 소비 취향 또는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비주류로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 하나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겉으로 봤을 땐 개인주의가 강화된 것 같지만 되레 삶의 기준은 획일화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만 쪼개졌을 뿐 각각의 알멩이들은 사실 따분할 정도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다르게 개인주의가 다양성이나 개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과거 사회와 비교해 봤을 때 기존의 억압이나 규율에서 벗어난 건 맞지만 그럼으로써 우리가 진정 자유로워졌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름을 그 자체로 수용하지 못하고 우열이나 선악의 잣대로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획일성의 지옥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경직된 세상에서 다름은 곧 고통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처럼.

'헬조선'이란 말이 이 사회를 자각하는 일반적인 비유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조소와 냉소가 가득하다. 부조리를 맞딱드리기보다 피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대하는 대신 비웃고 마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니라 관전자처럼.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 상황이 달라진다. 비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동안은 비웃음으로써 피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내 아이는 그럴 수 없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내 아이도 홀로 부조리의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비웃음보다는 식은땀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내 아이마저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마당에 언제까지 관전자로서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야구장에서는 이종범이 이정후가 야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은 야구장이 아니다. 이곳은 현실이다. 지옥으로 비유되는 부조리의 세상인 것이다.

더 이상 비웃을 수 없다면 맞딱드려야 한다. 부조리를 없애야 한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내 아이를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할 수 있는 건 길어야 십수 년뿐이다. 그 사이 세상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부조리를 없애는 건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부모는 세월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나무를 심는 일 따위는 이들에게 전혀 의미 없는 일이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를 위해 부조리를 없애기보다 부조리에 편승하는 쪽을 주로 택한다. 플레이어가 될 아이에게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기보다 반칙을 가르쳐주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너도 나도 다른 부모들 역시 반칙을 전수하고 있는 와중에 내 아이만 정직하게 세상에 밀어넣을 수는 없다.

헬조선은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부조리를 비웃는 관전자, 부조리를 답습하는 부모, 부조리를 배워가는 아이. 그렇게 관전자는 부모가 되고 부모는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다시 관전자가 되는 것이다. 탈조선을 입에 달고 살지만 사실 이 사회를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헬조선을 탈출하는 길은 이 부조리의 굴레를 멈추는 방법밖엔 없는 것이다.

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은 전혀 다른 문제다. 법에서는 위반인지 아닌지를 따진다. 법적 판단의 기준은 bad or not이다. 반면 정치에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를 따진다. 정치적 판단의 기준은 good or not이다.

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일이다. 정치인은 여러 선택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인지 판단해야 한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 bad or not은 의미 없는 기준이다.

bad or not에서는 현상유지가 최선이다. 진보의 여지가 없다. 기존의 룰을 잘 지켰는지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not bad가 아니라 good을 제시하고 화두를 던지는 사람이다. 정치인에게 현상유지는 목표가 될 수 없다.

정치인의 책임은 bad or not이 아니라 good or not의 영역에 있다. 정치인은 법을 위반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가치 판단을 했는지에 따라 평가받아야 한다. 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이 다른 것처럼 법적책임과 정치적 책임도 다르다.

그럼에도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법조인들이 요직에 있어서 그런지 정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이 과잉된 상태다. 하지만 정치인이 정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건 책임 회피에 가깝다. 정치인의 입에서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말이 나온다는 건 스스로 정치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아이가 부쩍 재롱을 떤다. 손뼉을 치거나 주먹을 오므렸다 펴면서 어른들의 눈치를 살핀다. 아무 분간도 못하던 아기가 이제는 타인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 같다. 어른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칭찬을 해주면 아기는 더 신이 나서 계속 칭찬 받을 짓을 멈추지 않는다.

어른이 되는 건 이런 타인의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인 것 같다. 아이를 움직이게 하는 건 보호자의 반응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아이 때처럼 나를 계속 지켜보며 칭찬하거나 혼내주는 사람이 없다. 혼자 판단하고 혼자 만족해야 한다. 매슬로우의 최종단계, 자아실현처럼.

진짜 어른은 누가 보든 말든 한결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보는 이가 없어도 자신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 의무를 다한다. 보행자도 차도 아무도 없는 교차로에서 홀로 신호를 지키는 사람처럼.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이 멋있었던 건 혼자 있을 때조차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에선 도청 같은 극단적인 장치를 설정한다. 노출되고 있는지도 모르게 노출될 때가 제일 멋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오로지 기념하기 위해 SNS에 사진을 올리는 사람은 없다. 기념하는 게 목적이라면 사진으로 남기면 될 뿐이다. 굳이 SNS에 올릴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오마카세 식당에서 찍은 음식 사진을 SNS에 올리는 건 그순간을 기념하는 것보다 ‘나’는 원래 이런 곳을 찾는 사람임을 드러내고 싶은 심리가 기저에 깔려있다. 미식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니라 타인의 부러움이나 보여지는 자기의 이미지에 만족을 얻는 것이다.

결국 고급식당에 가거나 명품을 사서 SNS에 올리는 것과 아이가 보호자의 반응을 살피며 재롱을 부리는 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다만, 아이가 재롱을 부릴 땐 반응을 학습하며 인지능력을 키우게 되는 반면 SNS를 하며 남는 건 박탈감과 ‘좋아요’의 숫자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아이는 보호자와의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반면 SNS에서는 방문자라는 실체없는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는 데 차이가 있다.

SNS를 하게 만드는 인간의 본능들, 이를테면 관계의지, 연결감 같은 것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건 타인이나 외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구속되기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SNS는 어른이 되는 걸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꽤 드나들었던 이 블로그도 지금은 조용하다. 포털에도 노출되고 댓글마다 논쟁이 붙었던 예전도 물론 재밌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처럼 보는 이 없는 블로그에 자조적으로 남기는 글들이야말로 진정한 나와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고요한 블로그를 채워나가는 것도 어른이 되는 하나의 연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주류는 호명되지 않는다. 주류니까 호명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를 부를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름 지어지고 불려지는 건 항상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이다. 비장애인이란 말이 장애인이란 말보다 어색하고 이성애자란 말이 동성애자란 말보다 어색한 것도 그 때문이다.

MZ세대란 말도 마찬가지다. MZ세대는 스스로 MZ라고 부른 적이 없다. 기성세대에 의해 MZ로 호명될 뿐이다. 흔히 말하는 MZ의 특성도 귀납적으로 도출된 게 아니다. 단지 기성세대가 느끼는 이질적인 특성들을 갖다붙여놓은 것에 가깝다. 본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MZ세대란 범주로 묶어서 타자화시키는 것이다.

MZ의 특성이라 여겨지는 건 수없이 많다. 하지만 어떤 특성이든 핵심은 하나를 관통한다. MZ는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 쉽게 말해 회식자리에서 고기도 뒤집을 줄 모르는 개념없는 세대라는 거다.

세대론은 시대별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MZ만큼 넓은 연령층을 규정하는 세대론은 없었다. MZ의 가장 맞이인 81년생은 지금 나이 43살이다. 일반적인 직장으로 치면 과장이나 부장 같은 중간관리자에 가깝다. 그렇다고 모든 직장의 과장급을 MZ로 규정하는 게 가능한 걸까. 결국 MZ는 세대론이라기보다 개념없는 구성원을 솎아내기 위한 낙인에 불과하다. 같이 안고 갈 수 없으니 세대 차이를 핑계로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MZ는 꼰대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집단주의의 극단에 꼰대가 있다면 개인주의의 극단에는 MZ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꼰대는 세대보다는 특성을 정의하는 용어인 반면 MZ는 특성이 아니라 세대를 정의하는 용어에 가깝다.

따라서 개인주의의 극단을 호명하고 싶다면 MZ가 아니라 다른 용어를 찾는 편이 낫다. 모든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MZ에 대한 논란 중 대부분은 적확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MZ를 제대로 논하기 위해서는 MZ란 용어에 대한 고민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