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스님의 형이니, 부러움과 거리낌이 없도다.

세종대왕, 태종, 이순신, 허준, 임꺽정, 임상옥 등등. 이미 조선시대 인물을 배경으로 한 사극이 많이 나왔지만, 내가 만약 조선시대 사극을 만든다면 양녕대군을 소재로 삼을 것이다. 대부분 양녕대군이라 하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왕자 정도로 알고 있지만, 실제 역사 속 양녕대군이라는 인물은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또 어떨 때는 비범하기까지 한,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숭례문에 불에 타는 순간, 소방대원들에 의해 극적으로 화를 면했던 숭례문 현판은 양녕대군의 친필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소실되었다가 지금의 청파동 부근에서 발견되면서 다시금 숭례문에 걸리게 되었다는데, 그야말로 온갖 고초 속에서도 목숨을 건져냈던 숭례문 현판이다. 이 외에도 경회루 현판도 양녕대군의 친필이고 그의 유명한 글솜씨는 먼 당나라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아울러 글만 잘 쓰는 것이 아니었다. 시에도 능했다. 그가 개성 기생 정향의 치마폭에 적었다던 사랑의 시는 굉장히 유명하다. 또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늘 자랑스럽게 자신이 양녕대군의 직계 후손임을 강조하고 다녔던 사실도 재미있다.


양녕대군은 젊어서부터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간혹 어떤 이들은 세종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의도적이었던 행동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의 방탕함과 괴팍함은 한 마디로 천성이었다. 그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원군의 경우처럼 일부러 미친 척 행동했다고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너무도 많다. 특히 그의 여색은 더욱 심했다. 아니, 심한 정도가 아니라 그를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호색한이라 칭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궁 내에서 여색을 밝히고 광기스러운 행동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14년이나 세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였던 태종 덕분이었다. 갓난아이 때 죽어버린 두 형의 뒤를 이어 태어난 양녕은 그만큼 태종의 총애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양녕의 비행과 여색에는 태종의 각별한 내리 사랑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얼마나 여색을 밝혔냐하면, 거리를 가다가 미모가 수려한 여인을 만나면 남의 첩이라 할 지라도 일단 빼앗고 봐야 했으며, 이런 그의 원칙(?)은 자신의 친아들에게도 적용되어 친아들의 첩을 빼앗아 자신의 첩으로 삼는 기괴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덕분에 그에게 첩을 빼앗긴 아들 이혜는 홧김에 사람을 죽이고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일로 인해 한동안 양녕은 며느리를 범했다는 추문을 듣기도 했지만 역시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가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가 그의 여색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양녕은 또 다른 신하의 첩이었던 '어리'에게 반해 그녀를 빼앗아오는데, '조선 최고의 스캔들'이라 불리는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태종은 대신들의 항소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양녕을 폐위시키기에 이른다. 그래도 양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어리'를 자신의 첩으로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태종과 대신들에 대한 반발감으로 궁을 나가버리는 '가출'까지 감행한다. 양녕이 집을 나가있는 사이 홀로 남은 '어리'는 스스로 목을 매 자살을 하는데 자신 때문에 양녕이 폐세자가 되었다는 주위의 질타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양녕은 세자로 있을 때건 세종이 왕이 된 이후이건 꾸준한 비행을 일삼는다. 매번 그의 방탕함은 조정의 논란이 되지만 그의 동생 세종은 늘 대신들로부터 양녕을 감싸준다. 아버지 대에 외가가 몰살 당하고 왕자들끼리 칼을 겨눴던 역사를 겪어야 했기에 가능하고 더 절실했던 형제 관계에 대한 양녕과 충녕, 그리고 효령의 일종의 노하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왕이 아니면서 왕가의 적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고달픈 일이다. 끊임없는 조정의 견제과 권력 분쟁에 휘둘리기 쉽상이다. 과연 의도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결과적으로는 양녕이 비행을 일삼았던 것은 효령이 출가를 한 것과 더불어 왕권 안정에 있어서는 굉장히 바람직했다.


어찌됐건 세 형제의 우애가 깊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후에  세종과의 의리를 몸소 깬 것도 양녕 자신이었다. 알다시피 수양대군은 세종이 아겼던 문종과 그의 어린 아들 단종을 처단하며 왕좌에 올랐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왕가의 원로로 큰 역할을 했던 자가 바로 양녕이었다. 수양대군을 지지하며 세종의 충신이었던 김종서, 황인보와 대립각을 세웠고, 무엇보다 수양에게 단종의 처단을 적극 권했다. 죽은 세종에게는 원통스러운 일이었겠으나 덕분에 수양은 세조로 즉위하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어려서는 태종의 맏아들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으며, 세자에서 폐위된 후에도 세종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아 부족함이 없는 세상을 살았고, 후에는 세조의 존경과 예우를 받으며 천수를 누렸던 양녕대군. 비록 그를 알면 알수록 자신보다 총명한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던 훈훈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마는 양녕이지만, 글과 무예에 뛰어났던 그의 호기와 여색으로 인해 숱한 이야기를 남겼던 인간으로서의 양녕대군 '이제'는 그 누구보다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사실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