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의 패러디판인 『방드르디』란 프랑스 소설을 소개하면서, 스타벅스 이야기하다 난데 없이 시작된 아프리카 포스팅('아프리카는 가난하지 않았다', '피의 다이아몬드를 아십니까')을 마칠까 합니다. 한동안 너무 열을 냈더니 피곤하네요.

대니얼 디포의『로빈슨 크루소』, 모두가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 소설을 읽어봤던 사람이라면 기억하겠지만 이 이야기에는 로빈슨 크루소말고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프라이데이(Friday)'라는 이름의 인디언 소년이다. '프라이데이'는 로빈슨 크루소가 좌초되어 섬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보다 몇 년 일찍 홀로 섬에 표류하고 있었다. 후에 로빈슨 크루소는 섬에서 이 인디언 소년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고 같이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에서 이 '프라이데이'란 소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작품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던 인물이었고, 소설의 시각과 다름없는 로빈슨 크루소의 눈에 '프라이데이'는 야만적인 자연상태의 섬과 구분되지 않는 한 미개인에 불과했다.

그런데 원작이 쓰여진지 200여 년의 지난 후, 프랑스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이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작품을 발표했다. 제목은 『방드르디』, '방드르디(Vendredi)'란 '프라이데이(Friday)'의 불어 표현이다. 이 작품에서의 주인공은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인디언 소년인 '방드르디'에 가깝다. 원작의 이야기가 방드르디의 시각에서 새롭게 전개되었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푸른 눈의 이방인이 섬으로 떠밀려오더니 밭을 만들고 불을 피운다. 선사시대부터 자신이 살았던 대영제국까지 인류 문명의 단계를 고스란히 재현한다. 방드르디의 눈에는 낯설고 이상한 광경들이다. 하지만 '방드르디' 속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를 만나고 함께 생활하면서 점차 자연 본유의 원시적이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에 매료된다. 그리고 결국 구조선이 섬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빈슨 크루소는 섬에 남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는 대영제국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인간 문명을 상징하는 백인이다. 반면 방드르디는 로빈슨과 정반대의 순수 그 자체의 존재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그날 그날 파인애플을 따먹으며 살아가는 원시 소년이다. 인간 문화와는 반대되는 자연 본래의 모습이다. 대니얼 디포의 원작에서는 로빈슨이 섬에 자신이 경험한 인간 문명을 재현시켰다면, 투르니에의 작품에서는 반대로 로빈슨이 섬과 방드르디의 삶에 스며든다. 문명에 의해 자연이 정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원시성이 문명을 극복하는 것이다. "원작 <로빈슨 크루소>가 근대 이후 산업사회의 탄생을 상징했다면 <방드르디>는 그 사회의 추진력이 되는 사상의 폭발과 붕괴, 그에 따라 인간의 신화적 이미지가 원초적 기초로 회귀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아프리카에도 로빈슨 크루소가 나타났다. 누런 사파리 복장에 소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던 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이방인이었다. 이 낯선 자들은 계속해서 아프리카 전체를 정복해나갔다. 오랜 시간 아프리카는 이들에 의해 마음대로 벗겨지고 파헤쳐졌다. 대자연은 이 이방인들의 문명 아래 짓밟혀졌다.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를 철저히 파괴했다. 순수했던 아프리카가 이방인들의 문화로 더렵혀진 결과는 처참했다. 아프리카인들에게 끈적끈적한 검은 액체에 불과했던 석유는 전혀 쓸모없는 대상이었다. 다이아몬드도 마찬가지였다. 산 속을 돌아다니다 발에 채이는 빛나는 광석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석유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값비싼지 알려준 것은 바로 푸른 눈의 로빈슨 크루소들이었다. 그러자 방드르디들은 평소엔 쓸모가 없었던 석유와 다이아몬드를 두고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아프리카의 방드르디에게는 국가라는 것도, 군인이라는 것도 필요없었다. 대자연 속에서 끼리끼리 부족을 이루며 살고 배가 고플 때마다 물고기를 잡아먹고 파인애플을 따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로빈슨 크루소는 돈이라는 것을 쥐어주고, 농작지라는 것을 만들어주었다. 국가가 뭔지 군대가 뭔지 세금이 뭔지, 또 총이라는 것을 어떻게 쏘는지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방드르디는 절대 원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살던 제국주의의 모습을 아프리카에 재현했다. 그리고 이를 개척과 개발로 명명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반면 방드르디는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방드르디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방드르디>의 해피엔딩은 소설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 아쉽게도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못했다. 역사는 로빈슨 크루소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로빈슨보다는 방드르디의 눈을 가지고 이야기를 보고자 했던 작가 투르니에의 시도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의미를 남겨준다. 우리의 눈은 방드르디보다는 로빈슨의 시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문명화된 인간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로빈슨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인류 문명과 역사에 대한 허영에 사로잡혀 있을 지도 모른다. 인간 문명이 미처 더럽히지 못한 나머지 반쪽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