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서는 영호남의 지역 갈등의 시작을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로 꼽고 있다. 실제로 훈요십조의 내용 중에는 차령과 금강 이남의 백성에게는 벼슬을 내리지 말라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왕건 주변에는 호남 출신이 많았다. 그의 첫 왕비만 하더라도 나주 출신이었으며, 맏아들인 혜종의 외척도 호남 출신이었다. 아울러 고려시대에 높은 벼슬을 한 이들 중에는 호남 지역 출신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훈요십조가 훗날 위조되었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충주호족 출신인 정종, 광종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 집권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혜종을 폄하해야 했고, 훗날 훈요십조에 해당 대목을 새로이 삽입하여 쿠데타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어쨌건 왕건의 '훈요십조'는 어디까지나 후백제 잔여세력에 대한 견제였을 뿐, 호남지역 백성들에 대한 지역 차별이나 폄하는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도 주목할 만한 동서 간의 갈등 국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시대 차별을 받았던 지역은 관서 지방이었을 것이다. 조선 초부터 관서 출신들은 고려의 유민으로 구분되어 중앙 관직에 등용되지 못했고 사회적으로도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홍경래의 난' 같이 지역 차별에 반발하여 봉기한 민란이 자주 발생했던 지역이 바로 관서 지방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주류세력은 호서지방(지금의 충청권)의 노론이었으며, 호남 지방은 미곡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는 곡창지대로서 나름의 지역적 중요성을 인정받던 지역이었다. 다시 말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동서간의 지역감정은 딱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갈등이 언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까?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제3공화국 시대(1960년대 박정희 정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3공화국 시기 추진되었던 제1,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호남지역은 공업화를 위한 산업기지의 선정에서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일청국권 자금배정, 항만 건설, 도로 건설, 철도체신사업, 국고금 보조제정 등에서 현저하게 불리한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정책 시행은 주민소득과 사회경제적 기반에 있어 지역 간의 격차를 초래했다.
 
표. 전라도 경상도 주민 개인소득 전국비(단위: 원)[각주:1]


경제개발 초반 사회기반시설의 건설이 경부라인에 집중되면서 대규모의 공장 시설과 기업들의 영남지역에 들어섰다. 일자리 수요가 증가하면서 농업 종사자 외에도 2차 산업 종사자들이 급증하였다.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었고 1960년대 이후 매해 빠지지 않고 지역 소득이 전국의 평균소득을 웃돌았다. 지금까지도 영남지역의 공업 도시들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재정자립도를 자랑한다.


반면, 경제개발의 수효로부터 멀어진 호남지역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농업 중심의 경제 기반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2세들과 남은 인력들은 일자리를 찾아 대거 서울과 수도권으로 상경했다.[각주:2] 자연스럽게 호남지역에서는 인구공동화 현상이 발생했다. 영남지역과는 달리 농업 중심의 호남지역은 도시로의 인구 유출을 막을 만한 경제적 기반이 전무했다. 이촌향도 현상이 급격화된 것이다. 지역에는 중장년 인구만 남게 되었고 그만큼 지역 경제는 활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에 대한 특수한 이미지나 인식은 이 시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호남지역 출신들이 대거 도시로 유입되었지만 농가 출신의 이들이 학력이나 기술을 갖추고 있을리는 만무했다. 결국 대부분은 산업 구조상 낮은 위치에 종사하는 하층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이 경제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억척스러움'을 보여야만 했고 '향우회'와 같이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이들끼리 뭉쳐 스스로를 도와야만 했다. 과거 영화나 드라마에서 전라도 출신을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던 '독종', '강한 생활력', '건달패'와 같은 이미지들은 바로 이 시기 생겨났다.


박정희는 이 지역 간 격차를 정권 재창출에 이용했다. 재집권에 있어서 김대중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은 그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결국 그는 정치적 쟁점을 정권의 정당성, 민주화가 아닌 원초적인 동서 지역 간의 대결 구도로 몰아갔다. 박정희는 '신라 대통령론'을 내세우며, "호남에서 영남 물품 불매운동을 한다", "호남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경상도의 공장이 전라도로 이전된다"는 지역 감정을 조장했다. 실제로 배타적인 지역 감정이 영남지역에서 더 강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1971년 대선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선거 결과를 살펴보면 영남에서 박정희는 260여 만 표, 김대중은 100여 만 표, 호남에서 박정희는 80여 만 표, 김대중은 140여 만 표를 얻었다. 즉, 영남에서는 박정희가 2.6 대 1의 비율로 우세했던 반면, 호남에서는 1.7 대 1의 비율로 김대중이 우세했다. 더구나 두 후보자 간의 득표차가 94만 표였는데, 박정희가 경북지역에서만 92만 표를 더 얻었다는 것은 지역 감정이 영남지역에서 더 강하게 나타났던 결과라 할 수 있다.

사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공수부대원과 시위대[각주:3]


신군부를 앞세워 권력을 잡은 전두환 또한 마찬가지였다. 집권 당시는 '서울의 봄'으로 일컬어졌던 전국적인 민주화 열망이 뜨거운 시기였다. 정당성이 약한 집권세력이 외부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내적인 결속과 지지를 다지는 것은 기정화된 사실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이에 한 발 더 나아가 '내부의 적'을 만들어냈다. 그는 강력한 야권 세력인 김대중과 그의 지지 기반인 광주를 목표로 했다. 민주화 시위게 활발했던 전남대, 조선대 등에 계엄군을 배치시켜 강경진압함으로써 민주화 항쟁을 촉발시켰고 시민들을 폭도로 둔갑시켜 발포하는 등 유혈진압을 서슴치 않았다. 권력 초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전시 효과로서 광주를 활용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영호남 간의 지역 감정은 근대화 시기 정치적 권력 및 경제적 자원을 획득하려는 정치가들의 정략적 책략과 그 결과에 대한 지역민들의 심리적 전이 등이 복잡하게 작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기존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영남 출신들과 그것의 개선을 요구하는 호남 출신들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그러한 대립과 갈등이 빈번히 개선을 요구하는 쪽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이 났으며, 그것도 유신 이후에는 개선을 위한 도전의 기회마저 없어져 버리자 호남 출신들의 피해의식 및 그로 인한 보상심리와 영남 출신들의 우월의식 및 그에 따른 배타적 성향으로 나타나는 지역감정이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김대중을 지역 감정의 원인 제공자, 수혜자로 꼽는 이들도 있다.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김대중을 향하여 지역 감정을 만든 사람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김대중이나 야권 지도자들 또한 호남에서 지역 감정을 통해 큰 이득을 얻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의 지역 감정이란 약자의 저항적 지역 감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을 지역 감정을 '만든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 아닐까. 이미 지역 감정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는 뻔히 밝혀져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자들, 국민을 지역으로 나눠 자신의 지역에서나마 지지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 말이다.

  1. 문석남, 「지역격차와 갈등에 관한 연구」,1984. [본문으로]
  2. 일례로 1960,70년대 서울로 편입된 관악, 은평, 강북, 노원 지역은 당시 서울로 상경한 호남 출신들이 대거 이주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서울 시민 중 절반이 넘는 인구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통계도 있었다. [본문으로]
  3. 사진출처: http://n.breaknews.com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