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다닐 때, 지각을 하면 교문을 곧장 통과할 수 없었다. 학생주임 선생님께서 항상 지각하는 학생들을 불러모아 운동장에서 따로 벌을 주고 교실로 돌려보내는게 으레 있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산 중턱에 위치한 학교를 올라가는데도 힘이 드는데 교문에서 잡혀서 또 벌을 받는 일은 정말 싫은 고통이었다. 그러던 한 날도 지각을 해서 어김없이 교문에 잡혀있게 되었다. 선생님은 지각생들을 불러모으더니 운동장 반대편에 있는 골대를 있는 힘껏 뛰어서 달려갔다오라고 하셨다. 더운 여름날 뙤약볕에서 그 큰 운동장을 내달리는 일이란 고욕이었지만, 다들 우르르 뛰기 시작했다. 투덜투덜 거리면서 곧장 앞으로 질주하는 녀석도 있었고, 나처럼 친구들이랑 히히덕거리면서 설렁설렁 뛰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선생님이 한 바퀴를 다 돌아온 지각생들을 들어오는 순서대로 반을 나누는 것이 아닌가. 설렁설렁 뛰었던 나와 내 친구들은 당연히 뒷 그룹에 속할 수 밖에 없었고, 앉아서 쉴 수 있게 된 앞 그룹의 애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이어 뒷 그룹의 지각생들만을 모아서 선생님은 다시 한번 명령을 내렸다. 학교 계단 꼭대기를 찍고 돌아올 것! 역시 방식은 똑같다. 뒤에 남는 사람이 또다른 벌을 받게 될거야. 이번에는 모두들 있는 힘껏 죽을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친구이고 뭐고 누가 앞을 막으면 밀쳐가면서 서로 먼저 들어오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나도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다행이 앞 그룹에 속해서 더이상의 벌을 받지 않게 되었다. 휴하는 안도감과 살아남았다는 작은 기쁨, 뒤처진 아이들에 대한 동정심 등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 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라는걸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요즘 어디를 가나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떤 것이든지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갖다붙이면 이내 그것은 효율성이나 합리성이라는 명분 아래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거리게끔 만든다. 물론 흔히 무한경쟁시대라고 불리는 오늘날, 그것도 좁은 땅덩어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란 어쩌면 빼놓을 수 없는 우리네 삶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과연 바람직하다고만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뒷그룹에 속하는 바람에 다음 벌을 계속 받는 대신 나를 앞선 다른 한명은 앞선 그룹에 속해서 더이상 벌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또 내가 앞선 그룹에 속해서 더이상 벌을 받지 않은 만큼 다른 한명은 뒤처진 그룹에 속해 계속해서 벌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즉,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한 사람을, 혹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그러나 차츰차츰 커 가면서 과연 이 말이 얼마나 유효한 말인지 의문이 커져만 간다. 오늘날의 세상은 최선을 다했든지 아니었든지 오로지 경쟁에서 이긴 자만을, 살아남은 자만을 주목해준다. 살아남음의 미학이다. 하지만 이제는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한다는 말처럼 살아남지 못한 자들, 최선을 다했지만 경쟁에서 밀려나 실패한 사람들을 한번쯤 돌아봐주는 좀더 인간적인 시선도 경쟁 못지 않게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