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에서는 도시(토론토)의 원거리 뷰가 자주 나온다. 계획도시답게 규칙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건물들, 네모반듯하게 촘촘히 박힌 아파트의 유리창들. 질서정연한 모습의 도시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과 같다. 그렇게 거미는 도시를 통제한다. 거미는 이성의 질서를 의미하는 거다.

그런데 욕망이란 건 일정한 통제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어떤 대상이 언제나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굳이 욕망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대상이 (질서와 이성에 의해) 금기시 되는 무엇이라면,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비로소 욕망이란 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작품에서의 두 주인공도 (다른 이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 건 불륜이라는 금기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여자에 대해 탐욕을 느낀다. 그리고 첫 장면에 나오는 고급(?) 스트립바도 마찬가지인데, 매우 절제된 상황 속에서 행해지는 스트립쇼는 지켜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남성들의 성적 쾌감을 최고조로 만든다(‘아가씨’의 낭독회처럼).

따라서 욕망과 질서의 관계는 엘리베이터의 거울과 같다. 양측 벽면에 거울이 달린 엘리베이터를 타서 한쪽 거울을 보면 다른 쪽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이고 다시 그 거울에 비친 내 쪽의 거울이 보이는 식으로 두 면의 상이 무한히 반복되어 쪼개진다. 욕망과 질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작품에서도 아담(질서)이 앤소니(욕망)를 몰아내고 이성적 자아를 회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그 자아 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리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등장한 거미는 아담을 보며 겁을 먹은 듯 잔뜩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거울처럼 욕망과 질서의 정반합이 무한히 반복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