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이란 공간이 통합에 기여할 것이라는 낙관론은 한물간 것 같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할 땐 모두가 확장, 확대 같은 개념에 주목했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한 정보가 쏟아졌던 그 시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방대해지고 있는 정보를 어떻게 흡수·처리하면서 자신의 저변을 확대해 나갈 것인지가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정보라는 건 이미 사람들을 질식시킬 듯 가득 차 있다. 더 이상 중요한 건 확장이나 확대 같은 개념이 아니다. 중요한 건 선택과 집중, 집적화 같은 것들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또는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선별해서 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온라인이란 공간이 결국은 유유상종의 장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흡수하는 것보다는 한 점을 찾고 그 점에 집중하려 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아침마다 배달 오는 신문 하나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스마트폰 하나로도 과거의 신문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볼 수 있게 됐다. 오히려 특정한 취향이나 기준이 없으면 어느 정보를 먼저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됐다. 마치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볼 때도 대게 각자가 선호하는 포털이나 언론 사이트를 통해서 각자가 주목하는 분야 위주의 뉴스를 보기 마련인 것처럼.

온라인이란 공간이 처음 등장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이를 그리스 아고라에 비유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유롭고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마치 광장 민주주의가 재현된 것처럼. 그리고 이런 가능성들이 어느 정도는 현실화되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처럼 개인이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현하고 생각을 교환한 시대는 없었다.

(전에 포스팅 했던 것처럼)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보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려 한다. 대립되는 의견을 수용하고 토론을 하기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내 생각을 공고화하는 것이다.

아고라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 결론을 이끌어내야 하는 곳이었다. 각기 다른 입장이 생각이 어우러지는 과정을 통해 어느 한쪽만 채택이 되든지 아니면 절충점을 찾든지, 어찌 됐든 마지막으로는 하나의 결론이 도출돼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이란 공간은 다르다. 아고라처럼 합의점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고 결론을 낼 필요도 없다.

애써 타인의 생각을 수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학급 토론시간에서라도) 토론이란 걸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안다. 내 생각의 논리가 상대의 논리보다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또 한 번 정립한 생각을 바꾼다는 게 얼마나 간단치 않은 일인지.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생각을 드러내는 건 어떤 결론을 탐색하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다시 또 유유상종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반박보다는 공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 모이게 되고 그들끼리만 소통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폐쇄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극단주의를 낳게 된다. 폐쇄적인 집단은 자정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일베, 워마드, 그리고 최근에는 태극기부대까지. 모두 이렇게 탄생한 극단주의의 전형이다.

직장에서 점심을 먹을 때마다 일종의 눈치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소위 ‘통일’을 좋아하는 윗분들 때문에 벌어지는 치열한 눈치싸움 말이다. 본인이 먹고 싶은 메뉴가 있지만 섣불리 입 밖에 내면 안 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대세’를 파악하는 일이다. 눈치를 최대한 가동하여 현재 대세를 타고 있는 메뉴가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해도 되는지 판단할 수 있다. 먹고 싶은 메뉴가 대세인 메뉴와 다르다고 바로 포기할 필요는 없다. 나와 같은 메뉴를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이 유의미한 숫자에 이르면 함께 제2의 메뉴 그룹을 구성하면 된다. 예를 들어 짜장면을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숫자가 짬뽕을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숫자보다 적다고 해서 짜장면을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짜장면을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숫자 또한 꽤 많아져서 한 무리를 이루게 된다면 눈치 볼 것 없이 그 무리에 편승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나의 선택이 다수의 선택과 부합되느냐는 문제다. 제1의 메뉴든 제2의 메뉴든 다수의 선택과 부합된 선택을 해야만 음식을 주문할 때 눈총받는 일이 없다. 예를 들어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짜장면이나 짬뽕을 주문했는데 나만 홀로 우동을 주문한다면 나는 주변으로부터 무언의 압박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눈치가 없네.’, ‘개념이 없어.’, ‘특이한 사람이군.’, ‘저 사람 때문에 음식이 늦게 나오면 어쩌지?’ 하는 따가운 시선들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남들과 같은 돈을 내고 먹는 점심인데, 음식 메뉴 고르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니. 그래서 요즘 직장인들은 점심 메뉴를 통일시키는 상사를 혐오한다. 눈치 보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다. 그래야만 점심시간이라는 귀중한 권리를 오롯이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상황도 비슷한 것 같다. 각자가 어떤 가치관과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선거 때마다 주어지는 선택지는 제1당의 후보 아니면 제2당의 후보 두 가지뿐이다. 물론 그 외의 선택지도 있긴 있다. 제3당의 후보 혹은 제4당의 후보, 아니면 아무 당도 없는 후보까지. 하지만 이들의 표를 찍는 일은 거의 없다. 점심 메뉴를 통일하려는 눈치싸움 속에서 제3의 메뉴, 제4의 메뉴는 사장되는 것처럼 제3당의 후보, 제4당의 후보를 찍는 표는 사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제3의 선택, 제4의 선택을 막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주변의 압박과 상관없이 끝까지 나만의 메뉴를 고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선거에서도 대세의 흐름이 어떻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만의 가치관과 소신으로 후보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기검열이라는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점심 메뉴를 내 마음대로만 하지 않는 것은 주변의 눈총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검열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선거 때 낙선할 가능성이 큰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는 것도 내 표를 사표로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일종의 자기검열 때문이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게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내가 지지하는 정당 또는 후보자가 그만큼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 또한 당연한 권리다. 예를 들어 정의당의 지지율은 꾸준하게 10%를 상회하고 있지만, 실제 정의당이 국회에서 갖는 의석수는 5석밖에 안 된다. 정의당 지지자라고 하더라도 정작 선거에서 강요받는 선택지는 제1당 아니면 제2당 두 가지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가 확대되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다양한 가치 판단, 신념 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대리해줄 정치세력을 찾거나 만들지 못하고 있다. 선거 때마다 거대 정당의 독식 구조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깨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마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제도권 내로 진입해야 한다. 그래야만 억지로 통일된 점심 메뉴를 먹는 일 없이 오롯이 자신이 먹고 싶었던 점심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판거래 의혹을 보면서 제일 궁금했던 건 대법원의 거래 동기였다. 콧대 높은 대법관들이 왜 청와대의 재판 개입을 감수했는지, 무엇을 얻기 위해 자존심과도 같은 독립성마저 접어뒀는지, 그게 궁금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답은 상고법원 때문이었다. 대법원에서 처리해야 상고 건수가 많아 업무량이 과중하기 때문에 이를 나눠서 처리할 수 있는 상고법원을 설치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고법원이라는 건 해외 사례도 전무하고 재판 절차를 4심까지 늘리게 된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무리가 있는 계획이었다. 과도한 업무량에 대해서는 대법관 증원이라는 해결책이 이미 오래전부터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양승태와 그 무리들은 왜 상고법원을 고집했을까.

소수정예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대법관의 수를 늘리면 소수로 독점해오던 카르텔이 깨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르텔이 무서운 건 두 가지 차원에서다. 첫 번째로는 전체 차원에서 권력의 집중이 용이하다는 거다. 권력은 소수가 갖고 있을 때 통제하기 쉽다. 반면 다수가 권력을 갖는다면 그것을 일률적으로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힘의 집중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개별 차원에서 개인이 갖고 있는 권력의 힘이 크다는 것이다. 권력은 그것을 몇 명에서 나눠갖느냐에 따라 각 개인이 갖는 권력의 힘이 달라진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구성원 수가 적을수록 개인의 갖는 힘은 크고 반대로 구성원 수가 많을수록 개인이 갖는 힘도 그만큼 작아지기 마련이다.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에 미온한 반응을 보이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전부터 대법관 증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시되고 있었지만 대법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카르텔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데 입법부에서는 정반대의 분위기가 흐른다. 국회의원 정원 증가는 일종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소수정예를 유지하려는 대법원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국회의원은 스스로 의회의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여론의 몰매를 맞는다. 어떤 의원은 의회 정원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 주장에 박수를 보낸다. 국회를 더욱 소수로 구성해서 입법권이 갖고 있는 권력의 파이를 독점하고 싶다는 자백에 환호를 보내는 것이다.

얼마 전에 공항에서 여당 의원이 말도 안 되는 권위의식을 보여줘 문제가 됐던 것처럼 현 국회의 문제는 의원 개인이 갖고 있는 권력이 너무 크다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 양당이 국회의원 증원에 가장 소극적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권력을 쪼개야 함이 맞다. 독점할 수 없도록 권력을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 한 1,000명 정도 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만큼 전체적인 차원에서는 유력 정치인 몇 명이 이슈를 좌지우지하는 파벌 정치가 쉽지 않아질 것이고, 개별적인 차원에서도 국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의원 개인이 갖는 권한은 줄어들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국회의원을 믿지 못하겠다면 그들의 자리를 줄여서 그들만의 카르텔을 공고하게 만들어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자리를 늘려서 힘을 분산시키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호텔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그런 유명한 호텔들 말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명맥을 잇고 있는 중저가 호텔들 말이다. 화려하거나 럭셔리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갖고 있는 호텔들. 단지 적당한 가격에 편안하게 묵을 수 있어서 좋다는 건 아니다. 가성비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런 호텔을 보면 마치 우리의 인생을,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반갑고 친숙한 감동이 든다.

성공한 인생만 인생인 건 아니다. 일류의 인생만 인생인 것도 아니다. 이류, 삼류도 저마다의 인생이 있다. 명문대에 못 간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대기업에 못 들어간다고 해도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대학을 가지 못해도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해도 인생은 계속 된다.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들이 더 많다.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렇다고 실패한 사람들 또는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들도 인생을 산다. 저마다의 의미와 태도를 갖고.

일류 호텔만 호텔이 아니다. 유명하지 않아도, 럭셔리하지 않아도, 호텔은 호텔이다. 일류 못지않은 서비스를 보여주는 투철한 호텔리어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주는 편안함과 쾌적함, 그리고 정성껏 만들어지는 맛있는 음식들을 보면 마치 일류 인생만 인생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일류가 아니더라도 저마다 갖고 있는 나름의 의미와 태도에만 충실하다면 일류 부럽지 않은 인생을 가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스스로는 만족할 줄 모르고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인정욕구라는 건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과도한 인정욕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성취를 이루어놓고도 그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 남들이 그것을 알아줄 때에만 비로소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TV에 나온 유명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면서 그 장면을 사진으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흔한 사례다. TV를 보며 기대하던 음식을 직접 먹게 돼서 신기하고 즐거운 만족보다는 남들에게 그 유명한 음식을 직접 먹어봤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피드백에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매슬로우의 5단계 이론에 따르면 이들은 4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최종단계인 진정한 자아실현 혹은 자기만족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로지 타인의 인정을 매개로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단계에 정체되어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개적으로 기부를 할 때보다 남들 모르게 기부했던 사실이 우연찮게 알려졌을 때 우리는 더 큰 박수를 치게 된다. 남들 모르게 기부를 한다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남들 모르게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어떤 의무감에 기부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남들이 그 사실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단지 본인이 일정한 사회적 기여를 했다는 의미만으로도 자부심과 만족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매슬로의 전 단계를 다 섭렵(?)해낼 수 있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이런 사람 주변에 있으면 상당한 피로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들은 관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자기과시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축구를 할 때 이런 사람이 같은 팀에 있으면 있는 대로, 다른 팀에 있으면 있는 대로 피곤해진다. 같은 팀에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 이런 사람은 대게 자신의 실력을 과시할 기회만을 찾기 때문에 혼자 축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 돋보이는 순간만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 팀에 이런 사람이 있어도 골치 아픈 건 매한가지다. 이런 사람은 타인을 매개로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승부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재밌게 공을 차자는 취지로 모인 모임에서 혼자 축구를 하든 과도한 승부욕을 보이든 양쪽 모두 피곤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따로 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건 항상 자신을 지켜보는 타인들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바꿔 말하면 타인들의 시선이 없으면 스스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얘기다. 즉,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는 가치 기준이 오로지 타인들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을 지켜보는 타인이 없다면? 스스로만 남겨진다면? 가치 판단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양심이란 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는 도덕적인 의식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양심이 부재한 것이다. 양심만으로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보여지는 곳에서의 행동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행동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해서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