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철저하게 사랑을 다룬 이야기다. 장르를 따지자면 멜로영화다. 전반부는 해준(박해일)의 사랑이, 후반부에는 서래(탕웨이)의 사랑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 두 부분은 남과 여, 산과 바다, 만남과 상실, 관음과 노출의 대조 속에서 완벽한 형식미를 갖춘다. 먼저 등장했던 게 나중엔 어떤 대구법으로 돌아오는지 의미를 찾는 관객들의 유희 속에서 영화의 샷, 앵글, 구도는 하나하나 메타포로 기능한다.

안개는 해준의 테마다. 그래서 해준은 안약을 넣는다. 뛰어난 형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 대한 진실은 보지 못한다. 서래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한 것도 보지 못하고, 서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한 것도 보지 못한다. 해준에게 서래는 안개 속의 여자다. 그리고 그 안개가 걷혔을 땐 이미 서래도 자신처럼 붕괴된, 아니 자신보다 더 철저하게 붕괴된 뒤였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은 스스로를 붕괴시키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처연하게 바닷가를 헤매는 해준을 보며 관객은 느낀다. 보기 좋고 예쁜 것만 아름다운 게 아니란 사실을. 그리고 새삼 깨닫는다. 결국 박찬욱의 영화였다는 것을. 2022년 한 해 봤던 영화 중에 가장 좋았던 작품.

문학보다 영화가 좋은 건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어서다. 소설 속 인물은 머릿속으로 그려질 뿐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은 배우를 매개로 살아 숨 쉬게 된다. 텍스트만으로는 절대 전할 수 없는 영역을 표현하는 거다.

한결같음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다. 동화처럼 단면의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중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부모를 마주하는 나와 아이를 마주하는 나는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는 소설보다 입체적인 인물 묘사에 유리하다. 하나의 문장으로 이중적 표현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배우의 연기는 그것을 가능케 만든다. 이 작품처럼 남성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성성을 보여줄 수도 있고 강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약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점차 양쪽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진정한 남성성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강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심지어 어떤 게 선이고 어떤 게 악인지.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보여줄 뿐이다. 배우의 연기로, 그리고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으로, 마치 “영화란 이런 걸 표현하는 거란다”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도덕적 딜레마를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강요된 집단자살을 숭고한 희생으로 미화한 건 불편하다못해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에게는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걸로 생각하던 권위주의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재림은 그의 초기작들('연애의 목적'이나 '우아한 세계')처럼 실제 옆집에 살고 있을 법한 평범한 인간군상을 다루는 것에 더 소질이 있는 것 같다. 한재림의 오래된 팬으로서 다음 작품에서는 왕이나 국토부장관이 아니라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정민이 박해수를 만난 순간부터 영화가 갈 길은 정해진다. 그 이후부터는 변명만 남는다. 왜 그 길로 가야만 하는지. 수리남이라는 배경과 기시감 어린 캐릭터들은 단지 그 길을 위해 소모될 뿐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되는 건지 설명해주는 느낌.

윤종빈이 공작에서 선보인 서스펜스는 수리남에서도 자기복제된다. 공작에서의 언더커버가 황정민이었다면 수리남에서는 하정우가 그 역할을 맡는다. 절대권력자를 동요시켜야 하는 언더커버의 페이소스가 반복될 뿐.

물론 변명과 자기복제를 좇는 것만으로도 6시간은 금세 지나가버린다. 그만큼 재밌고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다(영화든 시리즈든 일단 재밌고 봐야 한다). 하지만 물 만난 고기, 아니 넷플릭스를 만난 윤종빈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 윤종빈처럼 젊은 천재형 감독이 벌써 자기복제를 하거나 쉬어가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직무유기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인권을 가진다는 명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구든’이란 전제이다. 만약 ‘누구든’이 아니라 일부만 인권을 가진다고 한다면 사실상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권 같은 기본권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정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기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일부만 그것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건 차별주의자의 논리이다. 예를 들어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할 수 있었던 건 흑인들에겐 아무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권이 일부에게만 인정된다는 인식을 가지는 순간 인권은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권이라는 개념도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정될 때 의미를 갖는다. 동물권을 선별적으로 인정하는 건 모순이다. 특정 동물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다른 동물의 생명을 외면하는 건 일종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동물권을 이야기할 땐 반드시 그것이 모든 동물의 권리임을 전제해야 한다.

인권이 모든 인간들의 권리인 것처럼 동물권도 모든 동물의 권리여야 하는 것이다. (소나 돼지처럼 식용 가축들은 생태계 먹이사슬로 치부하더라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낚시하는 손맛을 위해 물고기를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 개체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멧돼지를 사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물권을 이야기하는 이들 중에 낚시나 멧돼지 포획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동물보호론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기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백인우월주의자들처럼 인권을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일부 인종의 전유물로 보는 이들을 인권주의자로 볼 수 없듯이 동물권을 특정 동물에게만 적용시키는 이들도 진정한 의미에서 동물보호론자들이라 하기 어렵다.

동물보호란 개념에서 논리를 들어내면 남는 건 취향과 기호의 문제가 된다. 가치나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귀여움'이나 '가여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물은 존재만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설득할 게 아니라 차라리 학대 당하는 동물이 가엾지 않냐고 호소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논리적 허영심이 아니라 감정적인 호소만으로도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엔 충분할 것이다.

동물보호론자들의 활동은 ‘동물보호’가 아니라 ‘반려동물보호’에 가깝다. 인권주의자이기보다는 차별주의자에 가깝다. 따라서 근거 없는 도덕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차라리 솔직해지는 게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보다 진솔한 사람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