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친구들이나 선배들의 결혼식이 늘어나고 있다. 결혼식을 다녀올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을 위해 또 누구를 위해 결혼식을 하는 걸까. 오로지 결혼식 '안'에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객들, 친지들, 웨딩홀 직원들, 심지어 신랑과 신부까지. 웨딩홀은 결혼이란 걸 찍어내는 공장처럼 한 시간 단위로 신랑 신부와 하객들을 우르르 쏟아낸다. 피로연장에서는 다른 결혼식에 온 사람들이 섞여 앉아 말 그대로 식사만 한다. 같이 밥을 나눠먹는 잔치 같은 건 없다. 신속하게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야 다음 타임 하객들의 자리가 생긴다.

아무도 즐길 수 없는 결혼식을 채우는 건 온갖 허례허식들이다. 치렁치렁한 웨딩홀, 일회용 꽃장식과 화환, 나눠먹지도 않을 케익 컷팅, 듣는 사람 없는 축가. 보여주기 위해 아니면 남들을 따라 하기 위해 하는 이런 의식과 절차들은 그 유래가 어디서 어떻게 전해온 건지도 불분명한 게 대부분이다. 빅맨 콤플렉스나 허세적인 소비 심리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웨딩사업자만이 웃음을 지을 뿐. 결혼식이 왜 사회병리가 되었는지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만, 오늘은 그저 푸념하는 것이니 각설하고.

가족, 친척, 친구, 동료, 선후배 등. 내 지인들이 오로지 나를 위해 모이는 경우는 내 삶에 딱 두 번 있을 수 있다. 결혼식과 장례식. 그나마 살아있는 동안 지인들을 만나는 건 결혼식이 유일하다. 그 반가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고 서로를 소개시켜 주고 다 같이 만찬을 나눌 수 있는 인생에서 유일한 몇 시간. 그 결혼식이란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다. 나와 아내, 사람들 모두 결혼식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물론 남들이라고 이런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아서 못하는 건 아닐게다. 현실에 순응하고 예의라는 걸 차리다보니 그렇게 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철없는 생각은 계속된다.

사실 우리나라 컬링 대표팀이 왜 올림픽에 출전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 국민 중 대다수는 컬링이란 종목 자체를 아예 모른다. 기준에 맞는 국내 컬링장도 경북에 있는 한 곳뿐이다. 그나마도 실업 선수들이 사용하는 터라 일반인들의 접근은 극히 어렵다. 그런데 컬링 대표팀이란 걸 꾸려서 올림픽에 나선다고 한들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특정 스포츠에 대한 무관심은 어떤 죄악 같은 게 아니다. 컬링 선수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어렵게 훈련을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국내에는 컬링을 아는 이도 즐기는 이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수요가 없다면 그 스포츠는 여가적 수준에서 향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고 올림픽 같은 데에 참가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참가할 수 있다. 하지만 협회 같은 민간 차원에서 주관해야 할 일이지 국가가 나서서 지원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종 비인기 스포츠 종목에 지원되는 비용들, 결국 우리가 다 부담한다. 국민이 부담하는 각종 세금, 체육시설 이용료가 국민들의 생활체육을 위해 쓰여지는 게 아니라 소수 엘리트 체육인을 양성하기 위해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체육진흥기금만이 아니다. 지자체나 기업(기업의 실업팀도 면세나 보조금 같은 혜택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결국엔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나 진배없다)의 실업팀 운영 비용을 함께 고려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다.

그 막대한 비용을 태릉선수촌 같은 곳에 꼴아박고 있으니,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늘상 만성적인 체육시설 부족에 허덕이고 있으며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시설도 비싼 이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시설은 부족한데 수요는 넘치다보니 민간 시설이 많이 들어선 것도 문제다. 두어 시간 운동장을 빌리는 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다보니 공만 있으면 되는 축구도 이제는 돈 없으면 못하는 스포츠가 된지 오래다.

올림픽 순위가 국력이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체육 수준이 곧 국력이 아닐까. 위로부터의 스포츠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스포츠, 보여지는 스포츠보다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자리 잡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컬링 스톤 살 돈 3600만원이 있으면 공원 구석에다가 작은 농구장이라도 하나 짓는 게 훨씬 의미있지는 않을까.

가수 김장훈이나 서경덕 교수가 앞장서고 있는 동해 표기 광고가 썩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동해/일본해 표기 문제는 독도 문제와는 좀 다르다고 보는 편이다. 독도는 주권에 관한 문제다. 일본이 독도를 분쟁지역화시키는 것은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따라서 경각심을 갖고 규탄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동해/일본해 표기는 주권이라기보다는 고유 지명에 관한 문제다. 표기에 따라 어떤 권리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편의상 합의된 지명을 정하는 것일 뿐이다. 일본해라 불린다고 해서 그 해역이 일본의 영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독도가 다케시마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쿠바의 섬들이 멕시코만에 있다고 해서 이 섬들이 모두 멕시코 영토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 일본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는 국내 정서상 일본해 표기가 달갑지 않은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국내의 감정을 해외의 여러 나라들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본해는 이미 국제적인 표기로 자리잡은 상태이고, 대부분의 국가가 이 표기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다. 우리가 겪은 역사적인 맥락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해란 명칭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같은 걸로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해외 국가들에게 있어 일본해를 동해로 바꿔(혹은 동해와 일본해를 동시에) 표기해야 할 당위는 딱히 찾아볼 수 없다. 이들에게 '일본해는 잘못된 표기다, 동해로 표기해야 한다'는 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건 이런 민족주의적 담론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할 진보 진영의 태도다. 이들은 일본해 표기 문제에 대해 정부가 더 강경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심상정 대표의 발언처럼). 집권여당이 친일 행적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대비되는 스탠스를 취하고 싶은 걸까. 애국주의, 민족주의적인 감정에 제동을 걸어야 할 이들이 제 목소리를 못내고 있다는 건 결코 긍정적인 현상이 아니다. 직접상대방인 일본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일본의 진보주의가 자국 내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던 탓에 지금의 일본은 맹목적인 쇼비니즘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는 우리나라의 진보진영(혹은 그 일부)이 갖고 있는 스스로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겪었던 특수한 맥락 때문이긴 하지만, 그동안 진보진영은 유독 민족주의적 담론에 얽매여왔다. 그 연유에 대해선 더 공부해봐야겠지만, 강점을 당하면서 민족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얻기도 했고 위정자들이 탄압의 구실로 반공을 이용한 탓도 크다. 거기다 반일 정서에 기름을 붓는 일본의 몰염치도 한몫했다. 물론 진보/보수의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 사회 진보진영은 민족주의와 그 자신을 동일시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국민 정서에 의한 눈치보기인지 아니면 태생적으로 무감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경향이 한 사회에 얼마나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이야기한다는 건 참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이지만, 어쨌든 욕하면서 닮아가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홍명보가 쓴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파벌이나 연줄 때문이 아니라, 선수 선발에 관해 본인이 공언한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미리 밝혀둔 기준을 스스로 철회하는 건 신뢰를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또 박주영 기용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선수 선발은 감독의 권한이고, 어차피 감독은 결과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홍명보가 같은 고려대 출신이라 박주영을 뽑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학벌 콤플렉스라도 갖고 있는 건가. 올림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냥 고집으로 불평하면 될 걸 뜬금없이 학연이나 파벌 이야기에 왜 열을 내고 있는 건지.

어쩌면 진보의 과정이란 건 계량화, 수치화된 영역이 확대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세밀하게 수치화되지 않은 걸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심지어 내가 얼마나 매력있는 이성인지도 결혼정보회사의 데이터베이스를 통하면 금방 점수화되는 세상이니까. 하긴 디지털의 세계가 0과 1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매트릭스' 속 사람들이 초록색 숫자들의 세계에 사는 것처럼 말이다. 수치화라는 건 대상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용이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분석이나 비교가 용이해진다는 건, 결국 예측의 정확성을 높여준다는 말일 것이다. 예측 가능한 영역이 넓어지고 예상이 가능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시간을 쪼개어 계량화한 시계의 발명을 근대성의 발로로 보는 식자들처럼, 예측 가능성이란 건 현 사회의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어쨌든 계량화 덕분에 지금의 세상은 뭐든 쉽게 예측이 가능한 사회가 됐다.

그런데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처럼 예측이 가능한 건 재미를 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앞으로의 상황이 명확하지 않고 불확실할 때 궁금증이 유발되고 기대나 두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도 그렇다. 뇌의 감정시스템은 불확실한 상태에서 쾌감물질을 방출시킨다고 한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진화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포츠를 본다. 일상에서는 느끼기 힘든 불확실성의 쾌감과 재미를 위해. 현대의 일상에서는 거의 모든 것들이 예상 범위 내에 있지만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스포츠는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스포츠의 영역에 계량화된 분석이 도입되지 않은 건 아니다. 야투성공율, 평균득점, 서브리시브율, 수비율, 출루율.. 우리가 즐겨보는 상당수의 종목은 이미 숫자들에 잠식당한지 오래다. 메이저리그에서 폴 디포데스타의 머니볼 이론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건 야구에서 최소한의 직감, 주관적 판단, 심지어는 스타플레이어까지도 통계학적인 숫자 앞에서는 온전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물론 야구는 축구와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다만 많은 종목에서는 이런 숫자의 잠식이 상당 수준 진행된 데 반해, 축구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축구라고 통계학적 분석에서 자유로웠던 건 아니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이들이 축구에 물리적 데이터를 도입하려 했고 그 통계로 유효한 분석을 시도했다. 벵거, 코몰리, 앨러다이스 등. 특히 앨러다이스가 상대 수비수마다 어느 방향으로 볼을 걷어내는지 통계를 내고 그 위치에 선수를 배치시켜 세컨 볼에 대한 점유를 높였다는 사실은 놀랄만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시도가 기존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킬 정도로 획기적인 성과를 낸 건 아니다. 앨러다이스의 실험은 여전히 세트피스에 국한되어 있고, 그토록 센세이셔널했던 벵거는 어느새 10년 무관을 눈앞에 두고 있는 처지다. 코몰리 또한 앤디 캐롤이라는 희대의 오버딜을 남긴 채 물러난 걸 보면 그 통계라는 게 신통치만은 않아보인다.

그래서 축구는 재밌는 것 같다. 훗날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통계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스포츠, 다시 말해 불확실성이 가장 높은 스포츠라고 할 수 있을테니까. 무려 22명이, 팔만 쓰지 않으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규칙으로(바꾸어 말하면 어깨 이하를 제외한 신체의 전 부위를 쓸 수 있는 자유분방함으로), 거의 두 시간 내내 넓은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다보니 고려해야 할 변수가 셀 수 없이 많다. 따라서 개별화하고 수치화하여 분석한들,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내기가 여간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위치선정 같은 건 통계학적인 논리로는 설명해내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다. 위치선정은 매순간 선수의 직관적인 감각으로 공의 예상 위치를 미리 판단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연에 의한 건 아닐까 싶다가도, 특정 선수들(예를 들어 인자기나 라울, 말디니 같은)을 보면 위치선정도 실력 중 하나라는 걸 부인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미 축구게임 같은 데서는 이런 위치선정이 선수 수준을 나타내는 하나의 스탯으로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상에서나 가능한 일일뿐, 실제 선수의 위치선정 능력을 수치화하여 비교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축구가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에 의한 흥미진진함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렇게 축구를 수치화하고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이들의 시도를 지켜보는 것 또한 쏠쏠한 재미가 될 것 같다. 그 과정이 녹록치 않더라도 어쨌든 팬들의 입장과는 달리 현장에서 팀을 운영하고 자금을 투자하는 이들에겐 불확실성을 제어하는 게 급선무일테니까. 더구나 축구는 여타 사회과학에 비하면 단순하다. 정해진 룰이 있고 정해진 목표가 있다. 아마 축구의 위치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사이 정도에 있지 않을까. 어쨌든 축구를 유의미한 통계적인 분석 아래에 두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고, 불확실성과 분석가들의 싸움도 더욱 흥미진진해질 것은 분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