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는 이익을 누리는 게 아니라 침익을 막는 개념에 가깝다. 무언가를 권리로 내세우려면 그 무언가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권리란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갖고 있던 것을 되찾을 때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우리의 권리에 속한다. 다만 평소에는 침해받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권리라고 어필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우리가 권리를 내세우는 경우는 대부분 마땅히 누려야 할 무언가를 누리지 못했을 때다. 예를 들어 합당한 이유 없이 상품 환불을 거부당하는 경우 소비자의 권리를 근거로 부당한 처우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처럼.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내가 평소 당연하게 갖고 있었던 권리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곰곰히 따져봐야 한다. 당연한 권리가 아님에도 내가 누리고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누군가의 호의 덕분일 가능성이 크다. 이를 모르고 그것을 나의 당연한 권리로 주장한다면 스스로 진상이 되는 것이다.

퀴어축제가 도심 한복판에서 개최된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건 없다. 퀴어축제가 많은 이들의 혐오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그것이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건 권리가 아니다. 타인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건 권리가 아니라 꼰대질에 가깝다.

보편적인 이론을 따라 인류사를 세 단계로 나눠본다면, 그러니까 농업·산업·정보혁명으로 구분한다면, 사회 변화의 크기도 시간순을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빼면 산업화 시대를 살던 인간과 정보화 시대를 사는 인간의 생활상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지만, 농업혁명 이전에 수렵채집을 하던 인간과 작물을 재배하던 인간의 차이는 그야말로 동물과 인간의 그것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이다.

각 단계를 거치며 인간은 생산성을 얻었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많았다.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말한다. 식량생산의 총량은 늘어났을지 몰라도 농부 개인의 삶은 그 이전의 시대보다 열악해졌기 때문이다. 조직적으로 작물을 경작하면서 인류는 수렵채집인이 누렸던 자유롭고 초연한 삶을 잃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인류는 산업혁명으로 잃게 된 것을 인간성이라고 정의했다. 그만큼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상실했다는 이야기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도하는 것도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작업이 주가 되었다. 그만큼 인류에게 산업화란 변화는 감당하기 힘든 혼란과 고통이었다. 뒤르켐이 말한 '아노미'의 개념처럼 무규범의 상태, 그러니까 기존의 모든 질서와 개념이 ‘무’의 상태로 초기화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의 리셋 버튼을 누른 것처럼.

결국 ‘세상이 미쳐돌아간다’는 말은 신조어가 아니란 말이다. 인공지능혁명, 나노혁명, 바이오혁명 등 현 시대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우리가 변화나 전환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다만 중요한 건 우리가 변화를 겪는 첫 세대는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게 세상은 늘 미쳐 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영철, 조두순, 고유정, 온갖 묻지마 범죄들, 최근에는 정인이 사건까지. 일련의 패륜 (혹은 불가해한) 범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이 미쳐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최근에 국한되어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연쇄살인, 패륜 같은 범죄들은 오랜 역사의 기록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사 전체로 볼 때는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현재 벌어지는 사건들과 차이가 있다면 단지 이슈화 되지 않았다는 점뿐이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생긴 건 비교적 최근이었으니까.

세상이 미쳐가고 있다거나 세상이 말세라는 사고방식은 종말론적 세계관에 불과하다. 세계가 점점 카오스적으로 타락해서 어느 순간 종국을 맞이한다는 건 사이비 종교의 단골 레퍼토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건 사실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이야기다. 이미 수백수천 년 전부터 사이비 교주가 중생을 향해 속삭이던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세대적인 선민의식을 낳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말처럼, 과거의 세대는 옳았지만 현 세대의 과오 때문에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세대적 선민의식에 매몰된 사람들이 사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는지는 뉴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흔히 ‘꼰대’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사람들은 서울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기도 하고 청와대에서 학생 시절의 혈기만 앞세워 반쪽자리 정책을 입안하기도 하니까.

세상은 늘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거다. 아마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사실 빼고는 모든 게 변할 수도 있다. 세상의 변화가 주는 충격의 정도는 사람마다 그리고 세대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충격을 본인 또는 본인 세대만이 겪는 혼란으로 오인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특별한 시대인 것도 아니고 우리가 특별한 세대인 것도 아니다. 요즘 들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은 원래 미쳐 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세상이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은 원래 이 모습이었는데 우리는 이제야 그 사실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팟캐스트 '시네마운틴'에서 장항준은 이런 말을 했다. "질곡의 현대사를 같이 살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소재로 만들어서 영화를 제작하고, 어떤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욕해버리고 말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득권이 되어) 그 시대를 즐기기도 했는데, 저 구석에서 이 모든 걸 보면서 킥킥거리고 웃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인 것 같다."

장항준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현대사의 한 단면을 기차라는 공간으로 재현한 후 다양한 인간군상과 그 면면을 신랄하게 폭로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된 각자의 뒤틀린 욕망이라는 게 상황을 얼마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양상으로 만들어가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를 단순하게 87년 민주화 항쟁처럼 강자에 대한 약자의 승리에 비유하는 건 반쪽짜리 해석이다. 기차에 타고 있던 국회의원(박영규)도 한때는 독재에 맞섰던 민주투사였다거나, 주인공 허봉구(김승우)는 그저 라이터를 되찾아올 목적이었을 뿐 대의에는 무관심했던 사실만 봐도 이 영화가 이런 일차원적인 해석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영화에 등장하는 다수의 승객들은 시점마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소수 건달들의 횡포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다가, 나중에는 분노해서 들고 일어나지만, 정작 중요한 지점(열차 지붕으로 올라가야 하는)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주인공에게 떠넘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언론과 인터뷰할 때는 자신이 모든 것을 해낸 것처럼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이다.

주인공 허봉구도 약자들의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에 불과하다. 그의 유일한 무기는 돌머리, 즉 무식함 또는 무능력함이다. 가진 게 없으면 잃을 것도 없다. 그래서 가진 게 없는 인간이 가장 무서운 인간이 되기도 한다. 300원짜리 라이터가 그의 텅 비어있었던 심연의 밑바닥이었다면, 기차의 소동은 그로 하여금 밑바닥을 치고 올라가게 만든 계기가 된 셈이다. 기차를 멈추게 하고 승객들을 구하게 된 건 미필적 고의에 의해 우연히 얻어진 결과일 뿐이다.

사실 풍자라는 형식은 필연적으로 기득권 또는 강자에 대한 비판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풍자의 대상이 되는 시대나 사회구조는 결국 기득권이 만들고 유지하려는 양식이니까. 하지만 이 영화는 철저하게 세태의 단면 단면을 조소할 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가치판단이나 선악의 개념과는 거리를 둔다.

현대사를 하나의 게임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의 시점은 그 어떤 쪽의 플레이어에도 속해 있지 않다. 장항준의 말대로 한쪽 구석에서 제3자의 시선으로 플레이어들을 희화화할 뿐이다. 그래서 더 차갑고 시니컬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의 강점은 여기에 있다. (예를 들면 장진의 영화들처럼) 일말의 인간미나 따스함을 남겨두던 당시의 한국영화들과 달리,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적 본질에 가까웠던 영화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하지만, 블랙코미디는 이를 전복시켜야 한다. 세부적 표현은 희극이어야 하지만 총체적 분위기는 비극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폭을 소재로 한 희극적인 연출은 이따금 진부한 한국식 코미디라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하다. 이 영화가 갖는 의미는 그 너머에 있다. 감독 장항준보다는 입담꾼 장항준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저 그런 영화 중 하나로 치부되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작품이다.

초상화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마리안느가 처음 그린 초상화는 엘로이즈를 닮고 있지 않다. 마리안느의 설명대로 회화라는 정형화된 도식을 따른 특징 없는 그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건 마리안느의 일방적 시선이 재현한 반쪽짜리 그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마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밤중에 있었던 여자들의 회합에서 둘의 시선은 서로를 마주한다. 타오르는 불처럼 강렬하게. 그때부터 초상화는 서로의 시선을 담기 시작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릴 때 엘로이즈가 바라보는 건 다름 아닌 마리안느 자신이다. 그렇게 둘의 시선이 교차할 때 마리안느의 초상화는 그녀 본연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슬프게도 그녀들의 사랑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사랑은 불길처럼 타올랐지만, 현실은 일렁이는 겨울 바다처럼 계속 해서 닥쳐온다. 차가운 파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언제나 사랑할 수는 없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도 끝맺음이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붓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둘의 그림은 완성이 된다. 미완의 습작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완결로서.

사진이 없던 시절, 그림은 기억이기도 하다. 순간의 시간을 잡아 영원의 액자에 가두는 양식이다. 소피가 보자기에 수를 놓는 장면에서, 처음 화병의 꽃은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꽃은 시들어버렸다. 화병의 꽃은 이미 시든 꽃이 되어버렸지만, 그 앞에서 수를 놓는 소피는 여전히 싱그러운 꽃을 수놓고 있다.

이별을 앞둔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고 그 기억을 그림으로 간직하는 것밖에 없었다. 영화의 장면 하나 하나가 한 폭의 그림 같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하나의 장면은 한 폭의 그림처럼 기억에 남아야 하는 것이다. 꽃으로 비유하자면 수놓기를 시작했을 때처럼 가장 만개했던 순간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이 이별을 맞이하던 자세는 기존의 퀴어영화와 달랐다. 운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지만 무기력하게 굴복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담담하게 운명을 직시했다. 엘로이즈의 재해석처럼 오르페우스를 뒤돌아 보게 한 건 다름 아닌 에우리디케인지도 모른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도 서로를 마주본 순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로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신화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시대적인 젠더상, 낙태라는 소재를 통해 보여준 당시의 현실과 여성 연대의 가능성 등은 이 작품에게 여성영화 혹은 퀴어영화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주지만, 이건 영화가 가진 일부의 장점만을 보여줄 뿐이다. 화폭을 옮겨 담은 듯한 압도적인 장면들, 아름다운 영화적 비유들, 신화의 독창적인 재해석만으로도 이 작품의 영화적 가치는 차고 넘친다. 여러모로 곱씹을 만한, 아니 곱씹어야 마땅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엔딩이었는데, 근래 본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엔딩이었던 것 같다. 음악을 듣는 엘로이즈가 처음엔 반갑고도 애틋한 눈물을 흘리고, 음악이 환기시키는 행복했던 나날을 회상하면서 웃음을 짓다가, 다시 슬픔이 사무치는 현실로 돌아오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이야기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듯한 감정흐름이었다. 종이 울리기 전 가르친 내용을 복습해주는 선생님처럼, 엔딩크레딧이 오르기 직전 이야기의 감정을 다시금 고조시키는 탓에 관객들은 무거운 여운을 느끼며 가슴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코필드 일병은 살아남았다. 군모에 총을 맞아 나자빠지고, 빗발치는 총알 속을 뛰어다니고, 폭포에 추락하면서도 마침내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음으로써 영화의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그런데 훈장도 와인이랑 바꿔 먹으면 그만이었던 그를 프랑스 여인의 호의도 물리치고 지옥불로 뛰어들 게 만든 건 투철한 군인정신,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사명감 같은 게 아니었다. 그를 변하게 만든 건 죽음이었다.

2개 대대 병력을 살리는 건 분명 중요한 임무였다. 하지만 반드시 내가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블레이크를 원망했다. 많은 동료 중에 왜 하필 자기를 데려왔냐고. 하지만 블레이크의 죽음은 그에게 그것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다주었다. 블레이크의 형을 살리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건 이제 그가 아니면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었기 때문이다.

블레이크가 임무에 차출되었던 건 그에게 친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정에 빠져 있는 대대를 구하는 것이 곧 자신의 형을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블레이크는 임무의 적임자였다. (부상 당한 파일럿에게 칼을 맞을 정도로) 평범한 군인에 불과했지만 블레이크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영예로운 훈장, 임무에 대한 책임감, 조국의 승리 같은 대의적인 가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사사로운 동기일 뿐이다. 멀리서(일반적인 전쟁영화의 카메라 앵글에서) 보면 임무를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명 한명의 병사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매 순간을 임하는 것뿐이다.

웅장하거나 다이나믹한 앵글이 사라지고 오롯이 한 인물의 시점만이 카메라에 담겼을 때, 다른 영화에서는 발견하기 힘들었던 참혹한 세계가 드러난다. 사람과 동물의 사체, 그것을 뜯어먹는 쥐들, 먼지처럼 쌓인 탄피 등등. 멋있게 적군을 해치우는 영웅은 없다. 현실에서는 상처 없이 철조망 하나 통과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블레이크가 숨을 거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건 의무병들이었다.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혈만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그는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체감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외딴 들판에 아군의 의무병이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을 터. 전체로 볼 때는 시간의 흐름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지만, 개인에게는 시간이란 것도 허망한 순간의 연속일 뿐이다.

이 작품은 단지 기술적인 성과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말처럼 영화의 촬영기법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그 자체였다. 전쟁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을 만큼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였다. 흥미로운 서사, 웅장한 스케일, 거룩한 애국심 같은 클리셰는 때로 전쟁을 아름답게 비추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처럼 철저하게 개인의 눈으로 전쟁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다. 카메라 그리고 우리가 1917년 한 병사의 시간으로 돌아갔을 때 전쟁이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찰리 채플린의 말대로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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