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은 주인공 ‘나’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내면의 세계이다. 누구나 이런 세계를 품고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편화된 이미지로 얽혀있는 카오스적인 내면의 핵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나’처럼 단단한 코끼리공장을 갖고 있어야 하며 박사가 만들어준 제3의 회로를 통해서야 비로소 ‘세계의 끝’으로 갈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 스스로가 설계한 세상의 존재를 상정하는 건 영화 ‘인셉션’과 비슷하다. 하지만 ‘인셉션’과 이 작품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있다. 같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국적 기업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이야기를 확장시킨 반면, 하루키는 개인의 의식세계로 이야기를 축소시킨다. 무한히 작은 한 점을 향해 축소되는 건 마치 ‘백과사전의 봉’을 떠올리게 한다.

그 한 점에 위치해 있는 세계의 끝은 결락의 공간이다. 실제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그곳에는 결여되어 있다. 그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자아도, 가치관도, 마음도 없다. 습관처럼 남은 순수한 생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루키 소설들의 주인공은 모두 외로운 존재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 역시 외로운 인물이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다. 하지만 ‘세계의 끝’은 더 고독한 세상이다. 그곳에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받아주는 건 단지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혹은 단순한 배려심 때문에 받아주는 것뿐이다.

하루키의 멜랑콜리함이 인물의 차원이 아니라 총체적인 차원에서 발현된 세상이다. 이곳에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음악도, 문학도, 위스키도 없다. 간간히 느끼는 알 수 없는 따스함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목적없는 운동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마치 하루키라는 필터로 하루키 월드를 한번 더 거른 것 같다. 가장 하루키적인 알멩이만 남게 된 세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남는 쪽을 선택한다. 그림자와 함께 현실세계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홀로 세계의 끝에 남은 것이다. 그곳은 다름 아닌 ‘나’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구멍 뚫린 주머니처럼 계속 잃어가는 게 나 자신이라고 해도 계속 잃어가는 인생이 곧 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숲속의 삶처럼 고단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끝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어쩔 수 없다. 설령 모든 것을 잃어 습관만이 남은 삶이라 하더라도 나는 내 삶에 책임을 다하는 것밖엔 없다.

처음에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차분하고 느린 호흡으로 배경의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낮은 채도의 도시 모습, 쌀쌀한 날씨, 성냥갑 같은 아파트, 인물의 걸음걸이, 흘러가는 담배연기.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시간을 들여 그려주는 것 같았다. 소설로 풍경을 읽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기 시작한다. 서술하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시선’을 따라서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속이 비어있는 눈동자의 아버지는 아파트 베란다 창문에서 담배를 핀다. 그리고 한참 동안 밑에 있는 주차장을 내려다본다. 카메라의 시선도 그것을 따른다. 그렇게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카메라는 시선을 좇는다. 기태 아버지의 시선, 희준의 시선, 준영의 시선. 카메라는 각각의 시선을 좇으며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고, 보는 이는 그 감정선에 이입된다. 인물이 보게 되는 것, 카메라의 시선은 딱 그만큼을 따라 가면서 그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리고 그에게는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흔들리는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 영화를 보는 이의 불안한 감정을 투영한다. 아슬아슬한 소년들을 보고 있으면 흔들리는 게 카메라인지 아니면 나의 불안한 마음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핸드헬드 기법을 사용한 영화들은 많았지만 이 영화만큼 그것의 장점을 잘 살린 작품은 흔치 않다. 이런 기법도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표현방식이다. 불안을 자아내기 위해 구불구불한 글씨로 소설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클라이막스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씬이다. 현재의 준영이 방에서 나와 식탁에 앉았을 때 자연스럽게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갔던 장면, 그리고 엔딩에서 현재의 준영이 과거의 기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두 장면 모두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비사실적인 장면이지만, 영화는 준영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기태의 내면을 남김 없이 보여준다. 이로써 기태는 학폭의 가해자가 아니라 관계에 미숙한 한 명의 소년이 된다.

117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비해 이야기의 분량은 길지 않다. 그만큼 작품의 상당한 시간은 장면의 분위기, 작지만 미묘한 감정선 같은 것들을 자아내는 데 할애되었다. 그리고 그 긴 호흡은 관계와 우정, 그것에 상처 받는 소년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먹먹한 감정과 함께 '나'의 소년 시절이 떠오르게 된다.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무명시절의 이제훈과 박정민은 전혀 이질감 없는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거나 이야기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스토리 중심의 영화도 좋지만, 그게 영화란 예술의 전부는 아니다. 국내에서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쇄도하면서 스토리 중심적인 경향이 더 짙어진 상황인데, 그 가운데서 영화적 표현이 가득한 영화다운 영화를 만나는 건 꽤 반가운 일이다.

코로나로 무관중이 된 덕분에(?) 축구 중계에서 선수와 코치들의 소리가 잘 들리게 됐다. 그간 관중의 소음에 가려졌던 소리가 중계진의 마이크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는 것이다. 서로 부르는 소리, 작전을 지시하는 소리, 심판에게 어필하는 소리 등등. 생각보다 많은 목소리가 경기장을 메운다.

그중에서 상대 선수나 심판을 향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다. 고함소리의 대부분은 자기 팀 동료들을 향한 소리다. 감독이나 코치만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건 아니다. 선수들 서로가 서로에게 지시를 한다. 누구를 맡아라, 어디로 달려라, 패스를 해라, 슛을 해라 등등.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의 목소리가 쉴 정도다.

때로는 신경질적인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같은 팀 동료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손흥민 경기만 봐도 팀 동료와 갈등하는 장면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왜 본인에게 패스를 하지 않았냐고 불만을 갖는 것이다. 공격수들은 항상 공이 본인에게 오길 바라기 때문이다. 공격만 그런 건 아니다. 수비수들끼리도 (때로는 골키퍼까지) 상대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두고 격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팬들은 걱정스럽게 보기도 하지만 선수들은 쿨하게 반응한다. 그런 갈등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다. 경기 중 같은 팀 동료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선수가 있어도 그의 행위를 문제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감독들마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경기의 한 부분이라고 여길 뿐이다. 하지만 국내의 반응은 달랐는데, 같은 팀 동료끼리 충돌하는 건 국내 정서로서는 굉장히 낯선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목소리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명하복의 수직적 질서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점심 메뉴를 정할 때조차 튀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는 세상에서 개인적 견해를 어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후배라면 선배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위계질서 속에서 구성원끼리 큰 소리를 내고 다투는 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국회의원이 당론과 다른 의견을 냈다고 해서 당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이런 문화 때문이다. 권위주의를 몰아내는데 젊음을 바쳤지만 스스로도 권위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건 운동권 세대의 아이러니한 특성이다. 투쟁적인 태도에서 연유된 것인지 아니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산업화세대를 닮아버린 것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꼰대란 말을 들을 만큼 그들은 형식적 민주주의에만 집착할 뿐 실질적인 민주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이고 있다.

소수의 지도부가 당론을 정하고 다수의 의원들은 그것을 따르는 거수기가 되어버리는 게 지금 여의도의 모습이다. 최장집의 비판대로 과거 독재정권의 여당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정당이라는 건 집권을 위해 일사분란한 조직력을 보여주는 이익집단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대변할 수 있어야 하는 정치결사체다. 권위주의나 성장주의가 아닌 민주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정당에 있어야 할 건 지시나 명령이 아니라 토론과 대화인 것이다.

히딩크는 대표팀에서 위계질서를 없앴다. 경기할 때만큼은 존칭이나 존댓말을 쓸 수 없게 했다. 선배 선수들만 뭔가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후배 선수들도 선배들에게 자유롭게 지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천수가 홍명보에게 "명보! 패스!"라고 소리쳤던 것처럼. 좋은 경기력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소통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집단 내에서 자유롭게 여러 의견이 나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건 잡음이 아니라 더 나은 의사결정을 위한 과정에 가깝다.

정치든 축구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열과 오를 맞춰야 하는 매스게임과는 다르다.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소수의 리더를 따라 획일적으로 움직이던 꼰대의 시절은 지났다. 축구에서도 잘하는 팀은 늘 시끄럽다. 소리치고 떠드는 선수들이 많기 때문이다. 군기가 없는 집단을 가리켜 옛날 말로 당나라 군대라고 했지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태도일지도 모른다. 당나라 군대 같은 느슨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눈치 보지 않기.

과거에는 불편한 진실이라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이 접할 수 있는 건 신문이나 TV 뉴스처럼 기성 언론의 정제된 정보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믿고 싶은 정보를 찾는 게 용이해졌다. 소수의 음모론이라 하더라도 거짓 근거로 살을 붙여 그럴듯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정보가 떠도는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믿고 싶은 정보만 수용하려 한다. 예를 들어 확증편향이나 인지부조화 이론처럼, 선거에서 지지했던 세력이 패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편한 진실을 수용하지 않고 '탈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탈진실로 인한 충돌은 사상적 대립보다 종교 갈등에 가깝다. 같은 사실을 두고 다른 견해를 갖는 게 아니라 애초에 다른 사실을 기반으로 다툼을 하기 때문이다. 의견이 다를 땐 대화가 되지만, 믿고 있는 사실이 다를 땐 대화 자체를 할 수 없다. 변증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극단적인 갈등만 있을 뿐이다.

인터넷은 토론보다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인터넷은 다른 의견을 수용하기보다 믿고 싶은 의견을 재확인하는 공간에 가깝다. 생산적인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뉴스 댓글만 봐도 서로에 대한 조롱과 욕설뿐이고, 게시판 커뮤니티는 배타적이고 자가증식적인 친목질만 하고 있다. 탈진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진영을 떠나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사실 탈진실은 새롭게 등장한 어떤 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 사회나 내재되어 있던 특성이기 때문이다. 굳이 '상상의 공동체' 같은 복잡한 예를 들지 않아도 된다. 인스타그램만 하나만 봐도 탈진실은 만연해 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은 그대로의 모습보다 보정된 이미지가 많다. 턱을 깎거나 눈을 키우거나 뽀얀 피부를 만들어서 본인보다 예쁘게 나온 셀카를 올리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의 이미지는 실재하는 것과 다르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인스타그램의 셀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보정은 당연히 있겠거니 생각하고 사진을 본다.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이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고 싶은 인스타그램 주인의 심정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욕망과 이해관계는 끊임없이 탈진실을 만들어내고, 인터넷 보급은 그것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인터넷에 가짜 정보들이 돌아다니는 걸 인위적으로 막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건 탈진실이나 인터넷이란 매체의 속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탈진실이 거스르기 힘든 일종의 경향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차원에서 다뤄야 할 문제일 수밖에 없다. 유튜브에 가짜뉴스가 판친다고 해서 그것을 일일이 솎아내거나 유튜브 자체를 폐쇄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탈진실 자체라기보다 그것이 무분별하게 수용될 때 발생한다. 결국 수용자 개인이 분별력 있게 가려 듣는 수밖엔 없다.

필요한 건 비판의식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비판의식이란 것도 특별한 건 아니다. 인스타그램을 볼 때처럼 사진의 보정 여부를 한 번 의심해보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멍하게 앉아 TV 뉴스를 보던 시절은 지났다. 서로가 서로의 미디어가 된 세상에서 비판의식은 실존의 필수 조건이 된 지 오래다. 진영논리에 따라 휘둘리는 좀비들처럼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무분별하게 정보를 받아들일 때, 사람들은 탈진실의 노예가 되고 아렌트가 말하는 무사유의 인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두 여성의 목소리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성의 목소리는 의미 없는 소리, 즉 소음에 불과하다. 델마의 남편 데릴은 여행 얘기를 꺼내려는 그녀에게 "아침부터 당신이 소리치는 걸 들어야겠어!"라며 짜증을 낸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처럼 여성의 목소리는 철저히 묵살될 뿐이다. 심지어 정색을 하거나 울면서 호소해도 돌아오는 건 남성들의 협박과 조롱이 전부다.

하지만 총이 등장하면서 관계는 전복된다. 델마의 호소에도 강간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남자는 이마에 총구가 겨누어지자 비로소 행동을 멈춘다. 여성은 총 같은 비대칭 무기(?)를 들어야만 화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총 없이 말로만 이야기하는 건 소리 없는 아우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같은 약소국은 비대칭 전력(핵무기) 개발에 집착한다.

아이러니한 건 주인공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기 위해 총을 사용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면 할수록 자신은 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사회란 질서라는 명목하에 기득권을 유지하고 수직관계를 재생산하고, 그 사회에서는 총기 사용 같은 폭력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같은 출발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에 놓여있는 것이고, 총을 들이대는 것처럼 반칙을 하지 않으면 절대 그 기울기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임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껏 뛰든지 아니면 그 운동장에서 아예 나와버리든지(운동장의 바깥이란 결국 세상이 끝나는 지점이지만). 다시 말해, 남편에게 여행 간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아내로서의 삶을 살거나 온전히 내 목소리를 갖고 깨어있는 자신을 느끼는 자유의 삶을 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주인공들은 후자를 택한다. 기존 사회로의 편입을 거부한 것이다. 이들의 선택은 일탈이 아니다. 일탈이란 말도 결국 기존 사회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선택은 일탈이 아니라 자유나 해방에 가깝다. 법과 질서의 억압적인 상징계를 거부하고 세상 밖의 세계, 그러니까 세상에는 없는 무(vacant)의 공간으로 떠나버린 것이고,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벽한 휴가(vacation)를 완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