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면 누구든 인권을 가진다는 명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구든’이란 전제이다. 만약 ‘누구든’이 아니라 일부만 인권을 가진다고 한다면 사실상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권 같은 기본권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정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기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일부만 그것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건 차별주의자의 논리이다. 예를 들어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할 수 있었던 건 흑인들에겐 아무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권이 일부에게만 인정된다는 인식을 가지는 순간 인권은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권이라는 개념도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정될 때 의미를 갖는다. 동물권을 선별적으로 인정하는 건 모순이다. 특정 동물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다른 동물의 생명을 외면하는 건 일종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동물권을 이야기할 땐 반드시 그것이 모든 동물의 권리임을 전제해야 한다.

인권이 모든 인간들의 권리인 것처럼 동물권도 모든 동물의 권리여야 하는 것이다. (소나 돼지처럼 식용 가축들은 생태계 먹이사슬로 치부하더라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낚시하는 손맛을 위해 물고기를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 개체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멧돼지를 사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물권을 이야기하는 이들 중에 낚시나 멧돼지 포획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동물보호론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기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백인우월주의자들처럼 인권을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일부 인종의 전유물로 보는 이들을 인권주의자로 볼 수 없듯이 동물권을 특정 동물에게만 적용시키는 이들도 진정한 의미에서 동물보호론자들이라 하기 어렵다.

동물보호란 개념에서 논리를 들어내면 남는 건 취향과 기호의 문제가 된다. 가치나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귀여움'이나 '가여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물은 존재만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설득할 게 아니라 차라리 학대 당하는 동물이 가엾지 않냐고 호소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논리적 허영심이 아니라 감정적인 호소만으로도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엔 충분할 것이다.

동물보호론자들의 활동은 ‘동물보호’가 아니라 ‘반려동물보호’에 가깝다. 인권주의자이기보다는 차별주의자에 가깝다. 따라서 근거 없는 도덕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차라리 솔직해지는 게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보다 진솔한 사람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386세대(지금은 586이 되었지만)가 저항세대가 아닌 기성세대의 지위로 등극한 순간, 그들의 요란한 목소리 안쪽에서는 얼마나 공허한 울림만이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이 노래하던 낭만적인 담론의 핵심엔 앙상한 안티테제만 남아있던 것이다. 자부심을 가졌던 저항의 기억은 그들에게 훈장인 동시에 족쇄였던 셈이다.

그들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능력과는 얼마나 유리된 세대였는지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야구해설가가 갑자기 배트를 쥐고 타석에 선 것처럼, 냉철하고 능숙한 판단이 필요한 현실세계에서도 그저 허울 좋은 이상과 이론만을 좇을 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윗세대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사이 스스로가 윗세대를 닮아버렸다는 점에 있다. 니체의 말대로 오랫동안 심연을 보다보니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윗세대로부터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을지 몰라도 그 안의 내용적 모순은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산업화세대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부작용을 필요악으로 치부했던 것처럼, 386세대도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한 주변적인 희생과 일탈을 불가피한 과정으로 여겼다. 각자의 지향점은 달랐을지 몰라도 방법론에 있어서는 똑같이 파쇼적이었다.

꼰대의 핵심은 본인이 꼰대인지 몰라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면에 있어서 386세대는 꼰대의 전형이다. 그들은 주로 윗세대와의 비교우위를 통해 스스로를 차별화시키지만, 아랫세대들이 봤을 땐 같은 꼰대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꼰대는 내로남불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선민의식 탓에 내가 하는 건 전부 아름다운 로맨스로 자각하지만, 남들에게는 똑같은 불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최근 들어 386세대라는 안티테제의 안티테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윤석열이라는 인물로 현상화되고 있는데, 그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어떤 가치관과 이념을 갖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윤석열의 스탠스는 안티 문재인(혹은 386)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법치주의의 회복을 얘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보기엔 빈약할 따름이다.

안티테제의 맹점은 테제가 사라지는 순간 드러난다. 안티 문재인의 한계는 정권이 교체되는 순간 모든 목적이 상실된다는 점에 있다. 386세대가 집권 후 스스로의 무능을 드러낸 것처럼,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정치적 진공상태를 낳았던 것처럼, 안티테제의 집권은 익숙한 공허함만을 드러낼 것이다.

사형제가 필요한 건 정의를 위해서다. 다른 이유는 필요없다. 그럼에도 예방, 격리효과, 비용 등 주변적인 논리를 끌어오다보니 오히려 설득력이 상쇄되고 마는 것이다. 정의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 사회과학이나 공리주의적 잣대를 들이미는 건 구차한 작업이다. 사형제도를 논하는 데 우선되어야 할 건 정의라는 개념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도덕철학자들이 밤새 토론해도 정리하기 힘든 문제다.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교집합의 영역은 엄연히 존재한다. 보편적으로 말하는 정의란 바로 이 부분을 의미하며, 사람들은 이를 토대로 정의로운지 여부를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있고, 반대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세상이 있다면, 누구든 전자보다 후자가 정의에 가까운 세상이라고 말하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 이걸 정의라고 여기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응보란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한 정의의 개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형제가 폐지된다면 ‘생명은 존엄하다.’는 명제는 선언적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생명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그 누구도 이를 빼앗을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도 살인자를 버젓이 살려둔다는 건 일종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모순을 안고도 사회가 유지된다는 건 누군가 그 불균형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희생되는 건 살인의 피해자다.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억울한데 알량한 계몽주의 탓에 두 번 희생되는 것이다.

살인의 가장 정당한 대가는 가해자의 생명을 몰수하는 것이다. 공권력을 두고 폭력이라 하지 않는 것처럼 사형제를 두고 살인이라 할 수 없다. 사형은 국가가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가족들이 가해자에게 몰려가서 돌팔매질을 하는 사적 제재와 최고형을 언도받은 범죄자에게 국가가 집행하는 사형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가 뜨거운 분노의 복수라면 후자는 차갑고 무정한 균형 맞추기이다.

사형제를 폐지하는 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정의가 훼손된 상황을 방기하겠다는 것이다. 본인 손에 피를 묻히려 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국가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들어 놓고도 굳이 사형 집행을 막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원래 옳은 길을 가는 건 불편하고 어려운 법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안일함으로는 정의든 뭐든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영화에서 서복은 말한다.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어요,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가.” 하지만 이 대사의 화자는 서복이 아니라 영화 자체인 것 같다. 영화가 관객에게 하는 변명으로 들린다. 끝내 무언가가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 서복처럼 이 작품도 의미를 찾기 전에 자폭하고 말기 때문이다.

영화는 삶과 죽음, 실험체 윤리, 인류의 영생, 국가윤리, 양심과 탐욕 등 SF 장르가 다룰 수 있는 소재는 거의 전부 건드려 놓는다. 그리고 수습이 되지 않자 모든 인물을 한 곳에 모아 폭발시킨다. 그리고 서복마저 없애버린다. 장황한 세계관치고는 무책임한 결말이다. 가장 손쉬운 마무리니까.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방식도 투박한 편이다. 복제인간에 관한 철학적 고민을 영화 속 인물이 전부 이야기해버린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여운이 없다. 영화를 본 후 관객의 머리에 남아야 할 질문들을 인물의 대사가 직접 말해버리기 때문이다.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영생은 무엇을 가져올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직접적인 대사가 아니라 메타포로 그려져야 한다. 영화의 서사, 인물, 이미지, 분위기는 그 메타포를 위해 쌓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게감은 작품의 깊이를 만든다. 좋은 작품을 본 후의 묵직한 뒷맛은 여기서 오는 거다.

예를 들어 ‘기생충’에서는 “가난하다는 게 어떤 의미야?”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가난을 “가끔 지하철 타다 보면 나는 그런 냄새”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영원하다는 건 어떤 거야?”, “죽는다는 건 어떤 거야?” 같은 대사보다 이에 대한 독창적인 비유가 있어야 했다.

감독이 밝힌 것처럼 이 작품의 키워드가 두려움이었다면, 영생이 왜 두려운 미래인지에 대한 메타포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매일 골수를 뽑는 서복의 고통은 영화적인 설정일 뿐 영생이 두려운 이유를 비유하진 못한다. 두려움은 서복을 제거하려고 하는 악역들의 명분으로 소모될 뿐이다.

메타포가 부재한 SF물에는 화려한 클리세만 남는다. 감독의 담백한 연출이 되레 진부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건 배우의 연기인데, 그나마도 인상적인 편은 아니었다. 박보검의 순진무구한 복제인간 연기는 ‘응답하라1988’의 기시감을 벗어나지 못했다.

복제인간이란 고작 히어로를 만드는 데 써먹을 소재가 아니다. 이왕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보다 깊은 고민을 다뤘어야 했다. SF라고 해서 반드시 장황한 설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작고 사소한 내러티브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방대한 세계관일수록 개연성과 흡인력은 옅어지기 마련이다. 스케일의 강박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비유로 미래를 그려내는 상상력, 국내 SF 장르에서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19금은 미성년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영상물등급제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상물로부터 미성년자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19세 이상, 성인은 보호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성인은 영상물을 문제없이 수용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췄다고 보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는 상대를 칼로 찌르고 총을 쏜다. 그 중에는 너무 리얼하거나 잔혹해서 이용자를 19세 이상으로 제한하기도 한다. 간혹 이런 게임을 하다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람을 향해 총을 쏘거나 칼을 찌르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게임을 못하게 하는 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게임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리얼돌과 여성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것도 리얼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봐야 한다. 일종의 일탈인 셈이다. 리얼돌이 왜곡된 성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다는 게 리얼돌을 반대하는 대표적 논리이지만, 사실 대중적 장르인 영화나 소설에서도 강간, 성매매 같은 소재들은 비일비재하고, 포르노에서는 대놓고 성을 상품화하고 있다. 리얼돌은 여성을 본 딴 정지된 인형이지만, 포르노에서는 진짜 여성들이 나와서 열연을 펼치는 게 차이일 뿐이다.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영화나 포르노 때문에 왜곡된 성 인식을 갖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리얼돌도 개인적인 성생활에 활용되는 내밀한 섹스토이일 뿐이다. 그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장난감과 실제 여성을 혼동할 이는 거의 없다. 왜곡된 성 인식이란 야동이나 섹스토이를 규제한다고 잡을 수 있는 어떤 게 아니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모순이나 젠더 문제처럼 사회적인 요인이나 가정폭력 같은 개인사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페티시즘도 비인격적 사물에 성적 욕망을 물화시킨다는 점에서 리얼돌과 비교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스타킹, 교복, 구두 같은 것들인데, 페티시적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물들을 섹스토이로 활용하거나 상대에게 착용시켜서 관계를 갖기도 한다. 그런데 리얼돌에 반대하는 논리라면 페티시즘은 리얼돌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이런 사물들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거리에만 나가도 스타킹과 구두를 신은 여성은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페티시즘 관련 성범죄가 폭증하는 건 아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은밀한 성생활과 일상생활 정도는 구분할 줄 알기 때문이다.

리얼돌이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리얼돌이 눈앞에 있다면 남성들마저 고개를 돌릴 것이다. 민망하니까. 하지만 수치심이나 민망함 때문에 리얼돌을 없애야 할 당위가 생기는 건 아니다. 음란물도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개된 장소에서 음란물을 보지 않는 이상 음란물 자체를 금지하진 않는다. 리얼돌도 마찬가지다. 존재 자체는 수치심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을 사무실이나 야외에서 대놓고 사용하지 않는 이상 그 수치심은 일반론적인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결국 리얼돌을 둘러싼 논란은 혐오의 문제로 귀결될 뿐이다. 일본에서는 인형과 결혼한 남성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여성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아내로 대하는 남성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혐오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서 인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었으니까. 리얼돌도 다를 바 없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인체와 닮은 섹스토이를 만들어 사용하는 남성을 보며 혐오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혐오감만으로는 타인을 제재할 수 없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라면 개인의 자유는 불가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리얼돌을 반대하는 주장은 성을 부끄럽고 더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전통적 성관념에 빚지고 있다. 수음을 하면 타락한다는 명제는 종교 교리에서나 찾을 수 있는 말이다. 실제로 수음을 한다고 타락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리얼돌을 사용한다고 해서 타락하는 것도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다. 아이러니한 건 리얼돌을 반대하는 건 주로 페미니즘 쪽이라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이야말로 이런 전통적 성관념의 대척점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얼돌 반대를 위해서 상대 진영의 논리를 차용하고 있는 셈이다. 애초에 이들의 주장에는 논리라는 게 없었고 혐오만 있었기 때문이다.

리얼돌이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성범죄자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왜곡된 성 인식을 이유로 리얼돌 자체를 금지시키는 건 멀쩡한 남성들을 전부 잠재적 성범죄자로 간주하는 셈이다. 미성년자에게 하듯이 성인 남성들도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성갈등만 조장할 뿐 생산적인 논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리얼돌을 두고는 더 근본적인 논쟁이 있어야 한다. 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는 주 드로가 여성들에게 성적 만족을 제공하는 섹스로봇으로 등장한다. 당시에도 이 설정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그때의 논의가 아직까지도 유효할 수밖에 없는 건 리얼돌이 머지 않아 섹스로봇으로 진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혐오감에 갇혀 있을 때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할 때다. 리얼돌이 던져 주는 난해하고 철학적인 물음들, 그러니까 성에 대한 정의, 인간과 섹스의 관계 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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