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감 嫌惡感 [명사] 병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

국어사전에 나오는 '혐오감'의 의미이다. 말뜻처럼 혐오감이란 어떤 것에 대한 불쾌한 느낌이 극대화된 감정.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대상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가식적인 정치인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정리 안 된 겨드랑이 털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은 징그럽게 생긴 바퀴벌레를 혐오한다. 혐오감이 참 불편한 감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혐오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혐오감을 느끼는 대상들을 없애려 하는 것은 과도한 발상이다. 물론 이런 발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반 세기 전, 아돌프 히틀러란 인물에 의해.

개고기를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애완견을 길러온 사람들, 혹은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혐오하고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혐오하고 개고기 식문화를 혐오한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복날마다 거리로 나와 개고기 반대 시위를 벌인다. '개는 인간의 반려동물입니다', '개를 먹는 것은 야만적입니다', '개에게도 감정이 있습니다' 등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말이다. 이들을 거리에 나서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역시 혐오감일테다. 자신이 사랑하는 개가 끔찍하게 잡혀먹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는 혐오감, 불에 그을린 채 모란시장에 늘어져 있는 식용 개들을 바라볼 때 드는 혐오감 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안방극장 가족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동성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느 연인들처럼 사랑을 속삭이고 스퀸십을 하는 게이 커플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드라마의 동성애 코드에 왜 불편해 했을까?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천륜이 무너진 것에 대한 인류애적인 죄의식 때문에? 아니다. 단지 동성애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남남 커플의 다정다감한 모습이 보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했던 어느 날, 야동을 보려다가 실수로 남성끼리의 성행위가 찍힌 야동을 본 적이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보기에 너무 불편했다. 혐오스러웠다.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게이 커플의 모습을 볼 때도 어떤 때는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성애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동성애자들의 동성애가 적어도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마음 속의 약간의 불편함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동성애 자체를 반대할 수 있을까?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마다 천성과 환경이 다른데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이 바라는 건 자신들에 대한 혐오감을 거두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이 불편한 것을 인내할 수 없어서 그 혐오감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뿐이다.

폭풍우가 몰아친 덕분에 올해는 좀 잠잠하려나 싶었더니, 역시 또 시끌시끌하다. 해마다 복날이면 거리로 나와 저런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이 거의 연례행사 수준이다. 요즘처럼 '표현의 자유'에 대해 말이 많은 때가 또 없었기에 그들의 이런 행위 자체를 내가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어찌 되었건 달갑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보신탕을 먹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태도다. 마치 요즘의 문명시대에는 걸맞지 못하는 야만인 따위로 여기면서 어떻게 반려동물인 개를 먹을 수 있냐며 치를 떤다. 참 독단적인 태도다. 논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들에게 논리적으로 개고기 반대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 주장인지 조목조목 따져주는 것도 이제 지겹다.

할 수만 있다면 시위를 하는 사람들 그대로 타임캡슐에 태워서 조선시대 사대문 거리로 보내고 싶다.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문명국가'의 거리에서, 고지식할 정도로 높은 문화적 식견을 갖고 있었던 양반과 선비들 앞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적 행위!"라고 한 번 외쳐보는 것은 어떨지. 굳이 '문화적 상대주의'니 뭐니 따지지 않더라도 언제부터 서양에서 들어온 애견문화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고상한' 문화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에는 푸아그라라는 요리가 있다. '절망의 진미'라고 불리는 거위 간 요리다. 거위 한 마리 당 손바닥도 되지 않는 극히 적은 양이 나오기 때문에 매우 귀한 요리이기도 하다. '절망의 진미'라 불릴 만큼 이 요리를 위해 매년 수많은 거위들이 끔찍하게 희생당한다. 프랑스인들은 최대한 많은 양의 간을 생산해내기 위해서 거위를 움직이지도 못할 좁은 철창 안에 가둬놓고 깔대기를 통해 엄청난 양의 사료와 물을 먹인다. 이에 거위의 간은 부을대로 부을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거위에게 억지로 '지방간'을 앓도록 만들어 거위 간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매년 프랑스 주변국들은 프랑스인들의 잔인한 거위 사육을 질타한다. 문화선진국이라 자부하는 나라에서 이런 동물학대가 자행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콧방귀'다. 한 마디로 '늬들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동물학대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두둑한 배짱만큼은 눈 여겨 볼만 하다는 의미이다. 개고기 문화를 국제적 망신이니 후진문화라니 하고 떠드는 이들은 문화 사대주의에 찌들어 나라 밖 눈치를 보느라 바쁜 사람들일 뿐이다. 프랑스가 푸아그라로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적 문화 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설령 우리의 개고기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들을 신경쓰지 않으면 될 뿐,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쩔쩔 맬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세상 어느 민족과 비교해봐도 남부럽지 않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를 영위해 나가고 있는 데 말이다.

푸아그라는 프랑스의 대표 요리를 넘어 세계적 별미가 되었다. 누구보다 프랑스인들 스스로가 푸아그라 요리에 자부심을 갖고 가장 맛있는 요리라고 치켜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만의 음식 문화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것일까.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먹는 전통이라며 외국인들에게 권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