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는 따로 호명되지 않는다. 호명하는 주체가 주류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를 부를 일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장애인, 동성애자, 다문화가정이란 말에 익숙하다. 하지만 비장애인, 이성애자, 非다문화가정(사실 다문화가정의 반대말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같은 말들은 좀처럼 입에 붙지 않는다. 그만큼 흔하게 쓰이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호명되는 쪽은 항상 소수자들이다. 경계를 만들고 구분을 짓는 건 늘 주류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싸’라는 말은 예전부터 쓰이던 말이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만 하더라도 ‘아싸’는 존재했다. 선배든 친구든 주변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항상 혼자 생활하는 이들을 ‘아싸’라고 불렀다. 이들은 혼자 (아니면 많아야 셋 정도가 같이) 다니면서 강의를 듣고 밥을 먹고 캠퍼스를 거닐었다. 그리고 여러 모임이나 행사 같은 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아싸’를 비난하거나 배척할 필요는 없었다. 즐겁게 어울리는 자리에 끼지 못하는 건 그 스스로의 손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요즘은 ‘아싸’라는 말보다 ‘인싸’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인다는 점이다. 이건 주류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인싸’였던 주류들이 소수였던 ‘아싸’를 호명했지만, 이제는 ‘아싸’인 주류들이 소수인 ‘인싸’를 호명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는 오히려 ‘아싸’라는 말을 듣기 힘들다. 전부 ‘인싸’에 대한 말들만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주류와 소수의 관계가 전복된 셈이다.

간단히 말해, 과거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던 이들이 주류였지만, 이제는 혼자 다니던 이들이 주류가 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학생활이라는 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학업보다는 주변 선후배들과 어울리면서 인간관계를 만들고,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발한 과외활동을 벌이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던 과거의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는 이제 드물어졌다. 대신, 고학점을 위해 전공 공부에 매달리고, 토익 점수를 위해 영어학원을 다니거나,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매일 도서관을 전전하는 요즘의 대학생들만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다.

이들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는 기껏해야 공모전을 준비하기 위한 스터디그룹 정도가 전부다. 그만큼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게 과거의 캠퍼스 라이프는 사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뿐이다. 그리고 그 경쟁을 뚫을 수 있는 건 오로지 개인의 능력뿐이다. 따라서 그 능력을 키우는 일 외에는 모두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내가 학교에서 보았던 ‘아싸’는 이 시대의 마지막 ‘아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는 일종의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10여 년 전만 해도 이미 대학생활이란 저울의 추는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에서 스펙 경쟁의 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무한경쟁의 장으로 내몰린 20대들에게 이제 ‘인싸’의 삶은 소수만의 생활양식이 되어버렸다. 사람들과 마음껏 어울리고, 여러 가지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그런 삶은 취업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소수만이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문에 주류와 소수의 관계는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거와 달리 이제 주류는 소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러워한다. 그래서 주류로서 소수인 ‘인싸’를 호명하지만 오히려 그 소수의 ‘인싸’를 닮고 싶어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 담장을 넘어서 전 사회적으로 불고 있는 ‘인싸’에 대한 열풍은 학생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주류적인 삶은 이제 소수만이 영위할 수 있는 각박한 세상이 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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