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은 전혀 다른 문제다. 법에서는 위반인지 아닌지를 따진다. 법적 판단의 기준은 bad or not이다. 반면 정치에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를 따진다. 정치적 판단의 기준은 good or not이다.

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일이다. 정치인은 여러 선택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인지 판단해야 한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 bad or not은 의미 없는 기준이다.

bad or not에서는 현상유지가 최선이다. 진보의 여지가 없다. 기존의 룰을 잘 지켰는지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not bad가 아니라 good을 제시하고 화두를 던지는 사람이다. 정치인에게 현상유지는 목표가 될 수 없다.

정치인의 책임은 bad or not이 아니라 good or not의 영역에 있다. 정치인은 법을 위반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가치 판단을 했는지에 따라 평가받아야 한다. 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이 다른 것처럼 법적책임과 정치적 책임도 다르다.

그럼에도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법조인들이 요직에 있어서 그런지 정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이 과잉된 상태다. 하지만 정치인이 정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건 책임 회피에 가깝다. 정치인의 입에서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말이 나온다는 건 스스로 정치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편지를 쓰는 것과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다르다. 편지는 쓰는 건 무거운 행위다. 편지를 쓸 땐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해서 종이에 옮긴다. 한번 종이에 적힌 텍스트는 맘대로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문장 단위로 머릿속에서 말을 완성시키고 그것을 종이에 적는 것이다. 한 단어, 한 문장을 적을 때마다 다음엔 어떤 표현을 담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이렇게 편지를 쓰다보면 처음 펜을 잡았을 때 마음먹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을 쓰게 되기도 한다. 생각이나 감정이 정리되기도 하고, 어떤 의미가 더해지기도 하고, 뭔가가 생략되기도 하고.

반대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건 가벼운 행위다. 문자메시지는 실시간으로 송수신된다. 텍스트를 만드는 것도 손쉽다. 손끝으로 터치 몇 번만 하면 된다. 그만큼 생각을 정리하거나 의미를 미리 만들어보는 과정은 필요 없다. 단지 순간순간 떠오르는 말을 바로 전송하는 것뿐이다.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나 생각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예를 들어 셀럽들이 물의를 일으키고 온라인상에 사과문을 올릴 때, 종이에 직접 수기로 적은 사과문을 캡처해서 올리는 경우가 많다. 웹상의 텍스트보다는 종이에 손으로 직접 쓴 글이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자메시지로 사과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대면과 비대면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편지로도 어느 정도의 진중한 마음은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자메시지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숙고하는 어떤 무게감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클릭이나 터치를 통해 투표를 하는 것도 이런 무게감이 결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투표용지를 액정화면의 버튼 이미지가 대신한다는 건 단지 직접 투표소에 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게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정치적 선택이라는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가 한순간의 터치만으로 결정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숙고해야 할 시간들이 즉각적이고 즉흥적인 찰나의 순간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리를 걷다가 스마트폰으로 투표를 할 수도 있고, 집에서 요리를 하다가 잠깐 컴퓨터 버튼을 눌러 투표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투표소에 가서 종이투표지에 도장일 찍는 건 꽤 번거로운 일이다. 생각보다 많은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우선 투표를 하러 가기로 마음을 먹으면 집으로 배송된 후보자들의 공보라도 한 번 더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투표소로 가는 길에는 누구를 찍을까 고민도 해보고, 투표소에 도착하면 마찬가지로 투표를 하러 온 다른 이들을 보며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투표용지에 기표를 하기 직전 아주 잠깐 망설이기도 해보고, 투표소를 나오며 뭔지 모를 뿌듯한 감정을 맛보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저마다 뭔가를 느끼고 돌아간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투표를 하는 건 이미지 버튼을 누르는 순간 모든 게 끝이 난다. 선거라는 게 마치 온라인으로 상품을 고르는 인터넷 쇼핑과 다를 게 없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말했던 것처럼. 투표를 온라인으로 할 것이냐 혹은 오프라인으로 할 것이냐는 어떤 수단을 택할 것인가 하는 단순한 방법론적 고민이 아니다. 그건 선거, 더 나아가서는 정치라는 개념의 본질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기술진보는 우리 삶 전반을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어 왔지만, 그 빨라진 속도 만큼 우리에겐 잃어가고 있는 시간과 가치들이 있다. 모든 게 그렇지만 얻는 게 있으면 그만큼 잃는 게 있는 법,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정치'와 '민생'을 따로 생각할 수 있을까. 일단 두 단어에서 오는 어감상의 차이는 크다. 정치는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고매한 권력 다툼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민생이란 말은 '일반 국민의 생계'라는 사전적 정의처럼 시급한 경제적 문제로 여겨진다. 때문에 정치와 민생을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로 구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들어 '정치가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 '정쟁보다는 민생에 집중하겠다.' 같은 레토릭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 또한 이런 경향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정치와 민생은 모두 잡을 수 없고 반드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고루한 정치투쟁은 '덜' 중요한 이차적인 문제가 되고 민생은 '당장' 중요한 시급한 사안이 된다.

하지만 정치와 민생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애초부터 정치란 '먹고 사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협의적 의미에서의 정치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인간이 잉여 생산물을 가지면서부터다. 잉여 생산물을 분배하는 규칙, 그리고 그 규칙을 유지하는 힘이 수직적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고 인간들 사이에서 정치적 관계가 발생했다. 정치학 개론서에는 정치를 '사회적 제반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일'이라 뜻한다. 이는 유한한 자원 속에서 어떻게 가치를 생산하고 분배해 나갈 것인지 연구하는 경제학과 닮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정치학과 경제학은 따로 있지 않았다. 대신 정치경제학(economical politics)이 있었다.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것도 정치경제학(politischen Ökonomie)이지 경제학이 아니었다. 이처럼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특히 정치와 민생(경제)을 분리시켜 보고자 했던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먼저 일제의 식민 논리가 그러했다. 식민통치로 인한 정치적 탄압은 불가피했지만 대신 한국의 근대화 시기를 앞당겼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굉장히 익숙한 논리다. 뒤이어 집권한 군부정권도 이를 답습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논리가 과거사에 대한 책임 회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이 시기는 경제의 탈정치화가 전격적인 슬로건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경제를 탈정치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주로 집권세력의 정당성이 부족했거나 정치 철학이 부재할 때 나타났다.

요즘 회자 되고 있는 '민생법안'이란 말을 살펴봐도 민생이란 의미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민생법안은 '경제를 살리기 위한 법안'이므로 정치적 논의나 정쟁과는 상관없이 조속히 통과되어야 할 당위를 지닌 법안을 의미하는 듯 하다. 하지만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새로운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법을 만든다는 것은 경제적 가치와 자원을 분배하는 규칙을 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가령 보조금을 지원하는 신규 법안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법안 때문에 보조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국가의 세금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법적 합의가 '변경'될 뿐이다.

더욱이 국가 자원의 분배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는 속전속결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민생법안'의 내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시장의 규제 완화가 바로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의 활성화를 불러일으킬지 혹은 더 심각한 양극화를 초래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지금의 불황이 시장실패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공공성의 부재에 따른 것인지는 신중함을 갖고 계속해서 토론해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중차한 내용의 법안을 국회에서의 최소한의 논의도 없이 신속히 통과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민생'이란 공허한 선전을 이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경제의 탈정치화를 옹호하는 이런 주장이 가진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어디서 경제가 끝나야 하고, 어디가 정치가 시작되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경제의 영역에 속하는) 시장은 그 자체가 정치의 산물이다. 시장을 지탱하는 모든 소유권과 기타 권리들은 정치적인 기원을 가진다는 점에서 시장 역시 정치의 산물인 것이다. 경제적 권리는 정치적 기원을 갖는다.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많은 경제적 권리들이 과거에는 정치적으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런 사례들 중에는 아이디어를 소유할 권리, 그리고 어린 나이에는 일하지 않을 권리가 포함된다. 이런 권리들이 정치적인 논쟁의 대상이었을 당시에는, 이것을 존중하는 것이 왜 자유 시장과 양립할 수 없는가 하는 무수한 '경제적'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경제를 탈정치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경제와 정치의 구분선이 옳다는 가정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中

살면서 관심 가져야 할 게 참 많다. 가족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면 친구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사람만이 아니다. 날씨에도 관심을 가져야 외출할 때 무슨 옷을 입어야하는지 우산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냉장고 속 음식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하고, 현관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문단속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무엇보다 외모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해야 한다. 물론 "나는 외모에 관심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외모에 관심을 갖든 갖지 않든 그것은 자유다. 다만 지저분한 매무새에 너더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을 좋게 볼 사람은 없다.

정치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치에 관심을 갖든 갖지 않든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외모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그 자신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처럼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또한 그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람들이 바쁜 와중에도 뉴스나 신문 혹은 라디오로 정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술자리나 택시에서 정치 이야기를 나누고, 노년의 어르신들이 힘겹게 투표소를 찾는 것은 단지 심심해서가 아니다. 그만큼 정치와 '나'는 구분될 수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정치는 우리의 삶 모든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페이지를 보면 분야별로 기사 목록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국제, 교육, 스포츠, 연예 등등. 학문의 분과도 마찬가지다. 국문학, 경제학, 정치학, 경영학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래서일까, '정치'라는 것이 많은 분야 중 별개의 영역으로 떨어져나와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정치는 전체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하위 분류의 개념이 아니다. 정치란 공간은 사회의 꼭대기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회,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모든 것들을 직접적으로 아우른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국회를 생각하며 정치 뉴스에서 보던 국회의원들의 몸싸움 장면을 떠올릴 뿐 정작 그곳이 우리의 권리와 의무를 규율하는 모든 법을 만드는 곳이라는 사실은 쉽게 잊어버린다.

어떤 강남 아파트의 주부들은 선거일에 계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선거일이 쉬는 날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체로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온단다. 선거라는 것이 당장 내일의 아파트 값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총선이 끝나자 정부는 KTX 민영화 사업안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까닭으로 막바지 국정 운영에 탄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거일에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당장 몇 개월 후부터는 민영화로 비싸진 운임 때문에 KTX 대신 고속버스나 새마을호 열차를 이용할지 모른다. 또 선거는 당장 내일 사먹을 라면, 과자, 딸기 값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환율에 대해 어떤 정책을 펼치냐에 따라 당장 서민들이 체감하는 물가 수준이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이다.[각주:1] 이처럼 정치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직결되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이다.

변희재는 후진국일수록 투표율이 높다고 언급했지만 그런 논리는 군주가 누군지 몰라야 나라가 태평성대였다는 고대 은,주나라 때나 통했던 이야기다. 민주주의가 형식상의 요건이라면 그 형식을 채우는 알맹이는 선거권자들의 투표이다. 독일은 그 유명한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하고도 사상 최악이었던 나치 정권을 맞이했다. 최첨단의 민주주의제를 만들어놓았지만 그 제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독일 국민들의 정치 참여가 부족했던 탓이었다. 선진국의 투표율은 우리나라를 훨씬 앞서고 있다. 독일이나 프랑스는 80%에 가까운 투표율을 보이고 있고, 우리나라랑 정치 구조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대통령제와 양강 구도의 의회) 미국 또한 60%를 상회한다. 경제력에 비해 정치 성숙도가 낮기로 유명한 일본 또한 60%가 넘는다. 이같은 비교는 OECD 회원국의 평균 투표율이 70%에 이르는 것을 염두해 둔다면 더욱 심각해진다.[각주:2]

"그 밥에 그 나물",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정치에 무관심한 가장 큰 이유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 지도자는 우리가 선별하고 만들어내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YS나 DJ 같은 민주화 영웅은 없다. 이제는 선거, 여론, 미디어, 정당이 인물을 만들어나갈 뿐이다. 견제와 갈등을 원동력으로 삼는민주주의 하에서 100%의 지지를 받는 완전무결한 인물이 탄생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누가 선택을 많이 받느냐에 따라 인물이 만들어지고 또 몰락하는 것 뿐이다. 일례로 노무현이나 버락 오바마는 대선에서 승리하기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여론과 미디어가 그들이 제시하는 신념과 청사진에 관심을 갖고 커다란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비교적 단기간에 넓은 지지층을 형성하며 대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결국 정치 인물, 지도자를 만드는 건 투표에 참여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는 바로 '나'이다.

정치 무관심과 혐오증이 많아지길 바라는 정치꾼들
대의 민주주의에서 선거철만 되면 항상 투표율이 낮아서 문제라지만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원래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정치에 넌덜머리가 나서 더 이상 관심 갖기를 거부하도록 유도해 왔다.
이렇게 사람들이 정치와 정치인에 지겨워서 나가 떨어지도록 하는 능력이 탁월할수록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능력있는 정치인이라고 평가한다.  정치에 무관심한 우민들이 많아질수록 정치인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간다. 자신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이런 우민들은 부정부패에도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그들을 보위할 소수의 극렬지지자들 뿐이다. 이런 우민을 양산하는 능력이 가장 탁월한 정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유형의 정치인은 바로 국민들이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개입하도록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는 정치가이다.

- 찰스 스트릭랜드, '정치의 심리학', p.135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결국 지금의 정치인들이다. "꼴 보기 싫다"며 등을 돌리는 순간 그 꼴 보기 싫은 정치인들을 도와주고 있는 셈이고, "개판이다"며 외면하는 순간 정치판을 더욱 개판으로 만드는 셈이다. 똥은 그냥 피하면 되지만 정치는 혐오할수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 어려운 관심도 아니다. 꼭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야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정당에 가입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수준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하다. 대표성과 정당성을 지닌 정치의 실현, 그리고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와 견제는 '나'라는 개인들의 정치 참여도에 달려있다.


  1.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는 친기업적인 정책을 모토로 고환율 정책을 유지시켜왔다. 대기업들의 수출 실적 위주로 고성장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고환율에 따른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국내의 물가는 폭등하고 말았다. 물가란 '보이지 않는 세금'과도 같다는 점에서 대기업들의 수출 호황은 서민들의 물가 부담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 물론 투표율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그 나라의 정치 수준 또한 높다고는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투표율은 80%에 육박하지만 현재 이탈리아의 집권 세력인 베를루스코니 정권은 외부로부터도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는 정권이다. 지배 세력의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잠식 당해 관습적인 투표 행태를 보이는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보여진 바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높은 투표율 만큼 시민들의 정치 의식 또한 성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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