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란의 축구 성지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이란과의 월드컵 최종예선전이 있었다. 해발 1200m의 고지대, 7만 이란 관중의 일방적인 함성, 빗물로 젖어있는 나쁜 그라운드 조건, 호흡 맞춰보기엔 부족했던 시간 등 여러가지 악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0:1로 끌려가던 후반 '캡틴 박'의 극적인 동점골로 무승부를 거뒀다.

허정무 감독은 4-4-2 카드를 뽑아들었다. 이란이란 상대도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갖고 있었고, 원정경기라는 부담도 있었기에 중앙의 김정우와 기성용을 밑으로 내리는 안정적인 경기 운용을 택했다. 또 해발 1200m라는 높은 고도 탓에 체력 부담 또한 만만치 않았고 가운데를 거쳐가는 공격 작업보다는 후방에서 전방으로 바로 연결되는 정성훈의 머리를 겨냥한 롱패스 위주의 공격 전개방식을 이끌어나갔다. 때문에 경기 내용이 답답해보이는 면이 없지 않았지만 90분의 체력 안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허정무 감독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이란은 강하지 않았다. 아시안컵에서 매번 우리의 발목을 잡았던 이란의 날카로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개인기술이나 힘은 여전했지만 과거의 모습처럼 짜임새있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수비적인 경기 운영으로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이란이 경기의 주도권을 잡을 줄 알았지만 오히려 볼 점유율을 높인 것은 우리 대표팀이었다. 우리의 긴 패스와 중거리슛 위주의 단조로운 공격 작업에도 이란은 쉽게 흔들렸고 과거 같이 개인기량을 바탕으로 돌파를 시도하기에는 이영표와 오범석의 벽이 너무 거대했다. 허정무 감독이 전반이 끝나기도 전에 정성훈을 빼고 염기훈을 교체 투입시킨 것은 이란이 예상보다 약한 전력임을 알고 난 후 단조로운 공격 패턴을 벗어나 다양한 공격옵션을 만들기 위한 카드였다.

염기훈의 교체투입을 시작으로 우리 대표팀은 활발한 공격 작업을 꾀했지만 오히려 이란에게 선취골을 내주는 등 이란을 효과적으로 공략하지 못했다. 공격 실패 후 번번히 역습 찬스를 내주었고 이란 공격진의 단조로운 움직임에도 너무 쉽게 공간을 내주었다. 기성용은 활발히 공격 가담을 했지만 이따금 자리를 비우고 나와 뒤가 열리는 경우가 많았고, 김정우는 다듬어지지 않는 태클로 몇 번씩이나 경고 누적의 위기를 맞이했다. 공격 작업을 전개할 때에도 후방과 전방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연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전방으로 길게 연결되는 세컨 볼을 따내기 위해 전진할 뿐 수비라인과의 교감은 별로 없었다. 때문에 우리나라는 점유율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답답한 경기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란에 비해 볼을 점유하고 있는 시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무승부로 끝낼 수밖에 없었던 그 간극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김남일의 빈자리였다. 한 때 '나이트 삐끼'였던 그의 과거나 경기장 안팎의 거친 언행으로 홀딩으로의 터프한 이미지가 박혀 있는 그이지만 사실 김남일만큼 터프한 동시에 차분하게 공격을 전개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미드필더도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힘들다. 이번 경기 김정우와 기성용의 중원 라인은 다소 조급한 모습을 보였다. 부족한 수비력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차분한 공격 작업을 만들어나가기보다는 달려드는 이란의 압박에 허둥지둥 공을 전방으로 차내기에 바빴다. 덕분에 패스는 뚝뚝 끊겼고 공격은 답답해졌다.

북한전에서 김남일이 실수를 연발하는 등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여준 뒤, 현재 대표팀의 주장완장은 박지성에게 전해 내려졌다. 물론 당대 최고의 클럽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만큼 박지성 또한 주장으로서 손색이 없는 선수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박지성에게 아직 주장완장은 익숙해보이지 않는다. 공격의 활로를 열어주는 키플레이어임은 분명하지만 주장으로서 갖춰야 할 카리스마나 리더십은 아직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번 이란전에서도 젊은 선수들끼리 신경전이 많았는데 주장으로서 이런 선수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대 선수들로부터 우리 선수를 보호하는 모습이 조금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최근 한국 축구에는 '기성용'이라는 걸출한 재목이 주목을 받고 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클럽이나 대표팀에서 주전을 꿰찰 만큼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선수다. 중앙 미드필더로서 패싱력도 수준급이고 활발한 공격 가담도 일품이다. 다만 가끔 경험부족으로 어리숙함을 드러내고 젊은 나이만큼 다혈질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이런 기성용에게는 김남일이라는 든든하고 노련한 중원의 파트너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성용 입장에서는 수비 부담을 덜 수 있고 김남일은 기성용의 부족한 경험을 노련함으로 극복할 것이다. 또 멘탈적인 면에서도 김남일은 기성용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천하의 진공청소기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었던지 시간이 흘러가면서 과거만큼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태클은 노련해졌고 압박은 터프함을 더해갔다. 유명한 보란치들, 비에이라, 마케렐레, 코쿠, 로이 킨, 알벨다 등이 대부분 30을 넘겨서도 더해가는 노련미로 전성기를 구가했듯이 김남일 또한 더욱 농익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주장으로 대표팀을 이끄는데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