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승"에는 큰 스님과 동자승이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나온다.

큰 스님: 도념아, 저 소나무 밑의 바위가 네 마음 속에 있느냐 마음 밖에 있느냐?
동자 스님: 예, 마음 밖에 있습니다.
큰 스님: 이 녀석 봐라, 거짓말을 하네.

다음 날,
큰 스님: 도념아, 저 소나무 밑의 바위가 네 마음 속에 있느냐 마음 밖에 있느냐?
동자 스님: 예, 마음 속에 있습니다.
큰 스님: 이 녀석 봐라, 거짓말을 하네.

데이비드 흄은 말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없다. 오로지 안다고 믿을 뿐이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객관적인 지식인지 아니면 흄이 말한 것처럼 믿음일 뿐이지는 철학사에서도 오랜 세월 계속된 논쟁이었다. 우리가 평소 진실이라고 혹은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과연 진짜로 진실인지, 위의 동자승처럼 바위가 정말 마음 속에 있는지 마음 바깥에 있는지 가려내는 일은 참 어려운 문제다. 인간 이성을 통해 무엇이든 알 수 있다던 대륙의 합리주의도 무너진지 오래이고, 서구의 가톨릭이나 동양의 유교처럼 절대적이었던 신념이나 가치도 해체된지 오래다. 대신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 믿음이 정말 옳은 것인지는 여전히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들 제가 갖고 있는 생각과 신념이 옳다는 전제 아래 삶을 살아가며, 혹은 이를 기준으로 삼아 서로 남을 비방한다. 정답이란 건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감독인 쿠엔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을 통해 이러한 우리의 단면을 희화화한다. 아니, 조롱한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일 테다. 은행털이 조직에 가담했던 '오렌지'는 본래 경찰이었다. 소탕 작전을 위해 은행털이범으로 위장 잠입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무렵이 다가오면서 조직에 가담했던 나머지 인물들은 그를 경찰로 의심한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가 스파이 노릇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직원 중 '화이트'는 끝까지 '오렌지'가 스파이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 확신에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오렌지'에 대한 연민 혹은 '오렌지'가 총에 맞고 자신에게 의지하던 모습 때문이었다. 결국 조직원들끼리 '오렌지'를 죽일 것이냐 살려둘 것이냐를 두고 싸우다가 서로 총을 발사하고, 즉사를 면한 '오렌지'와 그를 지켜줬던 '화이트'는 함께 손을 잡고 죽어간다. 그런데 그 때, '오렌지'의 한 마디. "I am a cop" 그리고 이어지는 '화이트'의 절규.

관객들은 영화의 처음부터 '오렌지'가 경찰이란 사실을 알았다. 영화는 처음부터 '오렌지'가 경찰이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 몰랐던 것은 오로지 '화이트'뿐이었다. '오렌지'의 진실된 말들, 괜찮은 인간성에 의해 바보가 된 것도 오로지 '화이트'뿐이었다. '화이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절망스러운 결말이었을 것이다. '오렌지'는 절대 경찰이 아니라는 자신의 확신에 목숨까지 걸었건만 결국 그 확실했던 믿음이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어리석은 '화이트'를 비웃었겠지만, 동시에 관객 자신들 또한 이런 '화이트'의 절망으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감독 타란티노의 메시지다. 절대적인 대상은 없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도 사실 믿는 것일 뿐일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하는 대상도 사실은 그와 다를 수 있다. 그저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기준으로 세상 모든 것을 재단하는 우리도 언제 '화이트'처럼 큰 허망함을 겪어야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이 영화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뷔작이다. 지금은 명장의 반열에 오른 그이지만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타란티노는 평범한 비디오 가게 종업원이었다. 그는 '관객'의 눈으로 수많은 영화를 섭렵하면서 틈틈이 자신만의 첫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타란티노는 이 시나리오를 토대로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던 중 시나리오가 당시 유명 연기파 배우였던 하비 케이틀('화이트'역)에게 우연히 읽혀졌고, 하비 케이틀이 이 시나리오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아낌없는 지원을 하게 되었고, 본인이 직접 출연도 하게 되었다. 하비 케이틀이 제작 지원을 하자 동료 연기파 배우들도 삼삼오오 타란티노의 시나리오에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저예산 영화로 만들어질 뻔했던 타란티노의 첫 작품 '저수지의 개들'은 공식 개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탄탄한 시나리오와 개성 넘치는 연출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다. 물론 천재적인 데뷔작으로 인해 타란티노가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이야 시간을 거스르고 시간의 순서를 뒤바꾸는 시나리오 전개는 TV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기법이 되어버렸지만, '저수지의 개들'이 개봉할 90년대만 하더라도 상당히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저수지의 개들'은 은행털이범들의 영화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은행을 터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메인 시점은 은행을 털고 난 후의 시간이며 은행털이 갱이 조직되는 과거의 이야기가 산별적으로 전개된다. 영화의 시간은 하루 전으로, 한 시간 전으로, 한 달 전으로 제 마음대로 바뀌어버린다. 그제 어제 오늘로 이어지는 일원화된 나란한 시간 전개는 없다. 마치 이 영화를 다 본 관객이 기억의 단편들을 모아 영화를 되새이는 것 같다. 영화의 진행은 자동차 수동 기어의 움직임처럼 이쪽으로 들어갔다 저쪽으로 들어갔다를 반복한다. 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타란티노의 천재적인 기어 변속 덕분에 극의 흐름은 산만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건 물론이다. 덕분에 다른 갱스터 영화처럼 시끄러운 총격전이 펼쳐지거나 긴박한 추격전이 시작되지 않아도 영화는 내내 관객을 빨아들인다. 

다른 타란티노의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잔인하다. 은행털이범 중 한 명인 '블론드'가 사로잡은 경찰을 고문하는 장면은 잔인함의 극치를 달린다. 생으로 귀를 자르고, 산 채로 불태워 죽이려는 '블론드'는 오히려 만신창이가 된 경찰 앞에서 환호성을 지른다. 관객들은 마치 자신의 귀가 잘려나가는 것마냥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다. 신기하게도 고문 장면에서 관객들은 하나 같이 고문을 당하는 자의 편에 선다. 이런 관객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아는 이 영화는 '블론드'란 인물이 되어 관객을 계속 괴롭힌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킬빌'이나 '바스터스:거친 녀석들'에서는 주인공이 '나쁜 놈'에게 갚아주는 잔인한 행각에 어떤 관객들은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타란티노의 작품들처럼 '유혈이 낭자하다'란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도 없다. 영화에 따라 그 순도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피가 튀고 살이 뜯겨져 나간다. 잔인하다. 하지만 잔인함을 보여줌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잔인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되묻는 것 같다. 어떤 때는 고통으로, 어떤 때는 쾌감으로, 어떤 때는 아름다움의 극치로, 우리에게 제각각 다르게 다가오는 그 잔인함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