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청계천을 만들고 대통령이 된 MB. 그리고 같은 당 출신으로 뒤이어 서울시장이 된 오세훈 시장. '선배'나 다름없는 MB의 행보에 영감을 받아서였을까. 오세훈 시장은 MB보다 한 술 더 떠 서울을 디자인하겠다고 나섰다.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 서울을 '감히' 디자인하겠다는 것이다. 판교나 일산 같은 신도시에서나 어울릴 법한 시정 계획을 들고 나선 오세훈 '서울' 시장. 그는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시간이 디자인해낸 서울의 공간들을 단 4년만에 갈아 엎어버렸다.



조선시대 광화문 거리, 수시로 벌어지는 양반들의 행차를 피해 평민들이 즐겨 다녔다는 종로의 샛길 피맛골('말을 피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 21세기를 알리는 보신각의 종소리가 울려퍼진지 오래였지만 그 바로 옆 피맛골은 해방 이후 근대 종로의 모습 그대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 종로 도심 일대의 재개발로 인해 피맛골은 기억으로밖에 남을 수 없게 되었다. 도심의 서민들이 즐기던 빈대떡과 막걸리, 생선구이, 세월의 때가 묻어나오는 작은 상가 건물들 모두 사라지게 된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는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꼭대기에 대기업의 로고가 불을 밝히고 있는 수십 층의 은회색 빌딩들. 문제는 그곳이 600년 전통의 거리 종로라는 점이다. 그 바람에 종각, 운현궁, 종묘, 탑골공원 등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옛 공간들은 높은 빌딩숲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왕궁이 자리하고 있는 고도의 중심거리를 수십 층짜리 현대식 건물로 메우는 도시는 없다. 최대한 과거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려 애쓴다. 왜 그럴까? 높고 세련된 빌딩을 새로 지을 돈이 없어서? 절대 아니다. 그들은 역사와 전통이 물려준 맥락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낡은 건물을 밀어버리고 고층 빌딩을 세움으로써 얻는 당장의 경제적 효과보다 수백 년의 기억을 간직한 공간들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얻는 자부심, 멋, 전통에 대한 가치를 볼 줄 아는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 스포츠의 발전과 경기사를 간직하고 있던 동대문운동장도 이 '디자인 서울'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동대문운동장은 1920년대 지어져 최근의 고교야구대회까지 약 한 세기가 가까운 세월 동안 온갖 스포츠 행사가 이루어지던 곳. 우리나라 근대 스포츠와 맥을 같이 하는 살아있는 역사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을 철거시키고 역사공원과 디자인플라자를 건립하기로 했다. 고스란히 실체로 남아있던 '역사의 장'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역사'공원이라는 괴상망측한 공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광화문 거리가 바뀌었다. 대체 몇 차선이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넓었던 아스팔트의 차도가 줄어들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새로 조성된 광장의 모습이 광화문 거리라는 오래된 공간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는 참으로 의문이다. 광장 한가운데는 무미건조하게 뚫려있는 지하 공간은 지하 벙커를 떠올리게 하며, 아무런 맥락 없이 도로 위에 만들어진 회색 빛의 마당은 마치 평양의 광장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600년 조선왕조의 상징이자 심장인 광화문의 코앞에, 꼴랑 지하 공간 하나 파놓고 거기서 기념품을 팔고 있는 꼴이다. 그것도 '해치'라는 요상한 캐릭터 상품을 말이다. 중요한 것은 '해치' 같은 캐릭터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광화문 거리라는 공간성을 잘 살리는 동시에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거리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다. 하지만 현 서울시의 야심작이라는 '해치마당'은 이러한 고민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디자인'이란 것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인간이 의미 있는 것을 실체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온 결과가 인간의 생활이고, 문명의 세계이며, 따라서 생활의 실체, 문명의 실체가 곧 디자인의 세계인 것이다.

오세훈 시장의 취임 이후 서울시는 '디자인 서울'이라는 모토를 새롭게 내세웠지만, 원래 서울은 디자인되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디자인되고 있는 것이다. 꼭 유명한 외국 건축가나 디자이너를 섭외해 와야만, 무언가 새롭고 최첨단의 것만을 추구해야만 '디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서울은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우리만의 문화, 문명, 역사, 전통이 실체로서 드러나도록 디자인되고 또 디자인된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