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란 말 그대로 사(士), 즉 사림들이 화(禍)를 입은 사건이다. 따라서 사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림'의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 사림은 사士의 복수 개념과 같다.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아 관념적인 성리학에 매진했던 학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지방에 근거지를 갖고 있는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기보다는 본래 지방에서 유향소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력이었다.


조선이란 나라가 자리를 잡고 국정이 안정된 시기에 즉위했던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했다.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여 성리학 이념에 합당한 체제 정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집현전을 통해 성장한 성리학자들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다가 대부분이 사육신처럼 숙청 당하거나 재야로 유배되었다. 왕위 찬탈로 정권의 이념적 명분이 취약했던 세조는 성리학보다는 실용적인 학문에 치중하면서 계유정난(세조의 왕위 찬탈)에 공을 세웠던 측근 관료들을 결집시켰다. 이들 공신세력을 '훈구'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세조의 강력한 왕권을 등에 업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세를 넓혔다.


세조가 죽은 후에도 훈구의 영향력이 그대로 유지됨에 따라 뒤에 즉위한 성종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성종 때에 이르러 <경국대전>이 완성되었는데,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를 비롯한 주요 관서들의 기능이 이 시기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성종은 삼사와 언관직에 그동안 중앙에서 배제되었던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였고, 삼사의 활동을 제도로 보장해주면서 사림들로하여금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게끔 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성종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사림이 갖고 있던 훈구에 대한 반감은 예상외로 깊었다. 사림의 비판은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으며, 계속 격화되는 속성을 지녔다. 성종 말기에 거칠 게 없었던 삼사의 위상은 지나친 수준까지 팽창했다. 성종은 승하하기 직전 당시의 정국을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삼사의 위상 제고는 유교 정치의 이상에 다가간 의미 있는 정치적 발전이었지만, 국왕과 대신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현상이 분명하였다. 즉위 직후부터 왕권 강화에 의지를 보인 연산군에게는 더욱 그랬다. 아울러 삼사의 강력한 탄핵에 시달려온 대신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김종직과 <조의제문>


결국 연산군과 대신은 당시의 가장 커다란 폐단이 삼사(사림)라는데 합의를 하고, 그들의 행동을 '능상'으로 규정했다. '윗 사람을 능멸한다'는 의미의 이 단어는 연산군대의 거의 모든 사안을 관통한 핵심적인 판단 기준이었다. 무오사화는 이 기준을 적용한 첫 번째 정치적 숙청이었다.


1498년 <성족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면서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이극돈이 임면되었는데 그는 계유정난 이후로 등장한 훈구 대신의 일원이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삽입한 사초의 내용을 문제삼아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그의 사초에 계유정난을 비방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혐의였다. 연산군은 신속하게 김일손을 잡아들여 문초하기 시작했다. 이에 삼사와 예문관은 어떠한 경우에도 국왕이 실록을 열람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강조하며 김일손의 국문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는 사림에 대한 연산군의 의심만을 키울 뿐이었다.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여 답계역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훤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하는 말이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인데, 서초 패왕 항우의 죽인 바 되어 빈 강에 잠겼다.'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드디어 문을 지어 조한다."

-조의제문, 김종직

이때 발견된 것이 김일손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이었다. 수사의 핵심배후였던 유자광에 의해 발견된 <조의제문>은 세조를 의제를 죽인 항우에 비유해 계유정난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었다. 혐의에 대한 확실한 증거물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따라 국왕과 대신들은 김일손은 물론 김종직에게도 부관참시의 극형을 내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합의했다. 그런데 여기에 삼사가 제동을 걸었다. 이미 죽은 자에 대한 부관참시는 가혹하다는 의견을 고했다. 이에 연산군은 대역죄인을 비호하는 것이라 하여 대노했고 삼사의 대간들을 체포해 국문하고 반역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처벌했다.


이 사화는 김일손이 체포되고 주요 연루자들의 처벌 내용이 확정되어 전교되기까지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추국이 시작된 시점부터 계산하면 20일도 걸리지 않았다. 돌발적으로 일어나 매우 짧은 기간안에 전격적으로 마무리된 사건이었다. 이는 무오사화가 상당히 제한적이며 절제된 목표를 가지고 시행된 정치적 숙청이었다는 중요한 논거 중 하나다. 


이처럼 국왕과 훈구 대신은 삼사의 그릇되고 과도한 언론활동을 교정해야한다는 공통된 목표 아래 서로 제휴하여 일차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국왕과 신하라는 양측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한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삼사를 제압한 연산군은 그후 자신의 개인적 성향을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양측의 괴리는 더욱 커졌다. 뒤이어 정치세력의 상호관계와 정국의 전개양상도 크게 변화하면서 이는 뒤이어 갑자사화라는 더 큰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4대 사화 관련 포스트: 갑자사화와 연산군,  기묘사화,  을사사화


참고자료: 이기백 <한국사신론>, 김범 네이버캐스트 "무오사화",  두산백과 "사림", 두산백과 "훈구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