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포스트 "갑자사화와 연산군") 이후 거칠 게 없었던 연산군의 폭정 때문에 중종반정은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왕조 최초의 반정이었기에 그 공신들에게 대대적인 포상이 이루어짐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려 백 명이 넘는 인원이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다보니 반정이 끝난 후에도 논공행상이 판을 쳤다. 처음보다 공신의 수가 늘어나기도 했다. 뇌물이 오가기도 했고 반정에서 별다른 공로가 없던 사람이나 연산군에게 깊이 협력하였던 사람들까지도 다수 공신으로 책훈(공을 인정하여 상을 내림)되었다.


그러자 중종의 입장에서는 반정 공신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중종은 그동안 조정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신진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종에 의해 새롭게 정계에 진출했던 이들을 기묘사림이라 한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림은 국왕의 적극적인 신뢰와 지원을 받으며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삼사를 비롯한 주요 언관직을 차지하고 반정 공신들을 견제했다(기묘사림의 성장이 댑부분 국왕의 지원 덕분이었다는 점은 훗날 현실화된 이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조광조와 신진 사림은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경연을 활성화하여 중종에게 군주의 이상을 가르쳤고,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해 미신타파와 향약 실시를 강행했다. 또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하게 하였으며, 현량과를 실시하여 참신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현량과는 학문과 덕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한 뒤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였는데, 문제는 합격자가 모두 기묘사림의 일원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기묘사림의 공정성과 도덕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들이 매우 당파적인 집단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기묘사림은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였고 지나친 이상주의를 따라 급진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반정 공신 117명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가 없기 때문에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하여 작위를 삭탈하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를 모두 국가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위훈삭제 사건을 야기시켰다. 이는 기성 세력을 단번에 무너뜨리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는 급진적 시책이었다. 이에 신진사림을 지지했던 중종마저도 삭훈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삼사를 비롯한 기묘사림은 끈질기게 삭훈을 주장했고 끝내 중종은 이를 윤허함으로써 반정 공신 중 76명의 삭훈을 관철시켰다.


이는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국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은 현량과로 기묘사림의 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삭훈의 자신들의 현실적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을 보면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하들의 심상치 않은 동향은 일순간 현실적인 반란으로 표출될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신하들의 반정으로 추대된 경험을 가진 중종에게 이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중종은 불안의 원인을 제거해 국정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대신들의 요구에 공감했다. 결국 국왕은 사화를 개가했다.


홍경주, 남곤, 정광필 등 중종의 밀지를 받은 주요 대신들은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주요 인물을 전격적으로 체포하였다. 죄목은 당파를 만들어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천거하고 그렇지 않은 부류는 배척했으며, 서로 연합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즉각 유배되었고 삭훈되었던 반정 공신들은 원래대로 복권되었다.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 기묘사림의 주요 인물들은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나머지 수십 명도 유배되었고, 이들을 두둔한 이들도 파직되었다. 이때 몰락한 이들을 기묘명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조광조를 노무현과 비교하기도 한다. 실제 두 사람의 개혁이 실패한 원인은 놀랄만큼 닮아있다.


기묘사화가 있은지 얼마 안 된 시대를 살았던 율곡 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기묘사림의 실패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하였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조광조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하였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4대 사화 관련 포스트:  사림의 등장과 무오사화,  연산군과 갑자사화,  을사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