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다. 정비였던 신씨는 고모가 연산군의 후궁이었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중종 반정의 공신들이 왕비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들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였다. 결국 신씨는 궁에 들어온 지 7일만에 폐위되었다. 이듬해에 후궁이었던 장경왕후 윤씨가 새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9년 뒤 원자인 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 뒤 중종 12년에 문정왕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되었다.


중종 15년에 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중종의 후계 구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35세에 어렵사리 경원대군을 낳고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경원대군의 외숙부이자 문정왕후의 형제였던 윤원로, 윤원형이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당연히 세자 인종의 외숙부였던 윤임이 이를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윤임과 윤원형의 외척들 간의 세력다툼이 시작되었다. 인종의 외척을 대윤, 경원대군의 외척을 소윤이라 하여 두 일파 사이의 대립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어진 성품을 지녔던 인종은 중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고 중종 승하 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정계는 자연스럽게 대윤이 득세하였다. 유관, 이언적 등 사림의 명사들이 새롭게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기묘사화 이후 정계를 떠났던 사림들도 돌아와 정권에 참여하였다. 한편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마찬가지로 정계에서 한 발 물러나있던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들도 대윤과 소윤 양 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특히 소윤의 공조참판 윤원형이 대윤 일파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윤원로 역시 파직된 사건이 일어나자 소윤 측이 갖고 있던 대윤 측에 대한 불만은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인종이 일찍 세상을 뜨고 만 것이었다. 인종은 후사가 없었기에 그의 유언에 따라 문정왕후의 아들이었던 경원대군이 왕위에 올라 명종이 되었다. 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머니였던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었다. 조정의 세력은 윤임의 대윤 일파에서 윤원형의 소윤 일파에게로 넘어가게 되었고, 윤원형은 곧바로 대윤 일파에 대한 숙청 작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윤 일파에 대한 모함은 한 차례 실패를 겪기도 하였지만 소윤 측의 끈질긴 시도 끝에 대윤 일파가 봉성군(중종의 8남이자 윤임의 조카)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들을 무고하였다. 결국 윤임 등 인종의 외척들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대윤 일파를 이루던 주요 사림들이 대부분 유배 보내졌고 일부는 사형을 당하였다. 을사사화 이래 수년 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대윤 측 사림들은 무려 100여 명에 달하였다.


"정유년 이후부터 조정 신하들 사이에는 대윤·소윤의 설이 있었는데 일을 좋아하는 군소배들이 부회하여 말이 많았다. 이기·임백령·정순붕·최보한의 무리들은 윤원형 형제와 은밀히 결탁하였다. …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하니 소문이 위에까지 들리고 자전은 밀지를 원형에게 내렸다. 이에 이기·정순붕·임백령이 이로 인해 변을 고하여 큰 화를 만들어 냈다."

- 명종실록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제목처럼 외척들의 시대가 그려졌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씨 외척간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림에 대한 훈구 세력의 공격에 가까웠다. 1498년(연산군 4년) 이후 약 50년 동안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다. 사림은 네 차례의 사화를 통해 큰 피해를 입고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훗날 서원과 향약을 배경으로 선조 때 다시 중앙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네 차례의 사화는 조선 후기 사림이 분파를 나눠 붕당을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