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국이란 조선 숙종 때의 정치적 상황으로, 급작스럽게 정권이 교체되는 국면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환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있었던 숙종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숙종은 본인보다는 주변의 여인들 때문에 많이 알려지게 된 인물이다. 숙종의 부인이었던 장희빈, 인현왕후를 둘러싼 극적인 이야기가 후대의 문학이나 사극에서 자주 다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종은 조선사에서 저평가된 왕들 중 하나로 꼽힌다. 숙종은 어려서부터 기민하고 영특하단 평가를 받았고, 상공업을 비롯한 국가 경제를 다방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며 부국강병에 힘쓴 군주였으며 백성을 향해 애민적 선정을 베푼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거기다 본인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탁월한 정치적 감각까지 갖춘 왕이었다.


숙종과 그의 필적, 숙종은 우유부단한 공처가가 아니라 냉혹한 정치가였다.


현종 15년에 남인은 갑인예송에서 서인을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는 데 성공한다. 바로 그 해에 즉위한 숙종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이 시기는 신권이 왕권에 비해 월등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때였다. 두 차례의 예송으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정치적 주도권을 쥘 동안 정작 국왕은 전면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듯한 형세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숙종의 정치적 능력은 탁월했다. 세자 시절부터 신권에 휘둘리는 부왕의 모습을 보며 성장한 것은 숙종에게 큰 경험적 자산이었다. 숙종은 일단은 부왕이 신임했던 남인 계열 인사들을 중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에 대한 경계심도 늦추지 않았다.


더욱이 권력을 잡았던 남인은 오랜 세월 야당으로서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서였는지 집권 세력으로서 다소 미흡한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인이 허목의 청남과 허적의 탁남으로 분열되어 소모적인 당쟁에만 급급했던 당시의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숙종으로 하여금 남인에 대하여 부정적 인식을 갖게끔 만들었다. 때문에 즉위 초기에는 남인을 신임했던 숙종의 태도는 점차 바뀌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빗대기도 했다.


"암까마귀와 수까마귀를 가리기 어려운 것 같고 솥 밑과 가마 밑이 서로 흉보는 것 같다."

- <연려실기술> 권33 '숙종조고사본말'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경신년인 1680년 남인의 수장이었으며 영의적이었던 허적의 집에서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그 날 비가 내리자 허적은 궁궐에 있던 유악(기름을 먹인 천막)을 무단으로 가져다가 사용했다. 영의정이라는 지위와 국왕의 신임을 믿은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숙종도 비가 내리는 것을 알고 영의정에게 유악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는데, 이미 그가 가져갔다는 보고를 듣고는 이에 대노했던 것이다.


환국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병권의 교체를 단행했다. 훈련대, 총융청, 수어청 등의 각 군영 수장을 서인 출신 인사들로 교체했다. 주요 관직도 교체했다. 서인의 핵심인물이었던 송시열을 복권시키고 김수항을 영의정에 임명하는 등 의정부와 삼사의 대부분 관직을 서인으로 물갈이 했다. 또한 허적을 비롯한 남인의 주요 인물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을 접수하여 남인과 종친들을 유배보냈고, 그 중 일부는 사사되었다. 이때 형을 받았던 100여 명 중 대부분은 남인이었다. 이에 따라 남인은 환국이 일어난 지 석 달도 안 되어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제거 당하는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경신환국을 전환점으로 하여 붕당정치는 점차 감정적인 차원으로 가열되었다. 예송 때까지는 한 파가 우세하더라도 반대당을 용인하여 서로 공존하는 체제를 유지해 왔고 반대당의 사람들을 살육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붕당정치가 변질되면서 이론투쟁과 무력투쟁이 표리관계를 이루어 보복과 살육의 참극을 불러오게 된 것이었다. 이 시기부터 붕당정치는 상대방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 일당독재의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