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니시비란 조선 숙종 때 송시열과 윤증이 서로를 비방했던 사건을 말하며, 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회니'란 말은 송시열이 지금의 대전 근처에 자리했던 회덕에 살았고, 윤증이 논산군에 해당하는 니성에 살았기 때문에 두 곳의 지명을 따서 붙여진 용어다.


노론과 소론을 이끌었던 윤증(좌)과 송시열(우)


송시열과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는 김장생의 수하에서 수학한 동문이었다. 하지만 병자호란에 강화도 사건이 일어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청군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갔던 윤선거가 절의를 지키지 못하고 청군에 항복했던 것이다. 송시열을 비롯한 조정에서는 의리를 버리고 목숨을 부친 윤선거를 비난했고, 이로 인해 윤증은 부친을 따라 과거도 단념하고 평생을 자숙하며 재야에서 지내게 되었다. 중앙에서는 몇 차례 명망이 높았던 그를 불러냈지만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더욱이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 속에서 윤증은 대청 실리외교의 노선을 견지한 반면, 송시열은 숭명의리를 앞세워 유교적 명분을 강조하면서 양측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예송논쟁에서 윤선거, 윤증 부자가 송시열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자, 이에 불만을 품은 송시열의 지지세력이 윤증의 지지세력에게 본격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의리론을 두고 양측의 논쟁이 뜨거워졌다. 윤증 측은 송시열의 교조주의와 독선적인 면을 공격하였고, 송시열 측은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들의 경박함과 이단성을 비난하였다.


그렇다고 송시열과 윤선거의 개인적 감정이 크게 악화된 것은 아니었다. 둘은 명분론으로 논쟁을 벌이면서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윤선거가 현종 10년에 죽게 되었다. 당시는 선비가 세상을 떠나면 지인들이 묘갈명을 써 주는 것이 관례였다. 윤증은 스승이었던 송시열에게도 부친의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비문에 윤선거가 윤휴를 옹호했던 점을 비판하는 내용을 모욕적으로 담았으며, "나는 다만 기술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고 마무리를 하여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윤증이 수 년에 걸쳐 장문의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찾아가 비문의 개찬을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은 비문의 요지에 전혀 손대지 않은 채 글자 몇군데만 고쳐 보내고는 했다.


이로 인해 한때 사제지간이었던 송시열과 윤증의 사이는 서로에 대한 증오가 싹트기 시작했고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했다. 후에 윤증은 송시열을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주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로 평가하였고, 그기 내세우는 존명벌청은 말로만 방법을 내세울 뿐 실익이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정적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서인은 급격하게 분파되기 시작했으며, 송시열의 명분의리론을 따르는 세력은 노론, 윤증을 중심으로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는 세력은 소론으로 갈라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