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에서 대를 이을 원손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한 불안 요소였다. 조선 숙종의 경우가 그러했다. 서른 살이 다 되어가도록 숙종에게는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다. 이는 왕실과 조정의 조바심을 가중시켰다. 그러던 중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가 죽고 난 후 숙종은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궁녀 장옥정을 후궁으로 삼았는데, 오래지 않아 장씨가 왕자 윤을 낳게 되었다. 학수고대 하던 왕손을 얻은 숙종은 크게 기뻐하였다.


후사 문제로 인해 정비였던 인현왕후 민씨와 소원해졌던 숙종은 장씨를 희빈으로 삼고, 왕자 윤을 원자로 책봉하려 했다. 그러자 노론은 철저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반대를 간하기 시작했다. 경신환국 이후 조정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노론계 서인은 정비 인연왕후의 나이가 아직 젊으므로 그녀에게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왕자 윤의 원자 책봉에 제동을 걸었다. 예송에서처럼 당시 서인에게 있어 왕위의 적자 계승은 굉장히 중대한 것이었다. 더구나 숙원장씨는 남인과 일련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노론으로서는 쉽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숙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끝내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숙원장씨를 희빈으로 정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지난해 11월 초에 지금의 영의정 김수흥이 글을 급히 신에게 보내어 알리기를, '후궁에게 왕자의 경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쇠약하여 정신이 혼몽하고 귀가 어두운 가운데서도 저절로 기쁨에 넘쳐 입이 벌어졌는데, 오늘날 이르러 듣건대, 윤의 세자 책봉이 너무 이르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송나라의 철종은 열 살인데도, 번왕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습니다. 이와 같이 천천히 한 것은, 제왕의 결정은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 숙종실록

이에 노론의 수장격이었던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는 옳지 않다고 간하였다. 그런 전례는 동서고금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송시열의 강도 높은 비판에 숙종은 분개했다. 


숙종은 다시 전격적이고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원자와 희빈의 책봉이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상소를 올린 바로 그날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고 그를 제주로 귀양보냈다. 이어 영의정 김수흥도 파직시켰다. 송시열을 탄핵하지 않은 삼사의 대간들도 즉시 교체했고, 송시열의 주장을 따른 많은 노론계 인사들을 파직, 유배했다. 뿐만 아니라 서인의 학통을 정립한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축출하였으며, 송시열을 유배지에서 압송한 후 정읍에서 사사했다.


대신 경신환국으로 관직에서 배제되었던 남인을 대거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로 인해 남인은 다시금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또한 이번 환국의 원인이었던 왕실 문제를 처리함으로써 이 환국을 마무리했다. 결국 정비였던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에 의해 서인으로 폐출되어 사가로 내보내졌고, 희빈 장씨는 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우암 송시열에 대해서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인물이다. 그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총 2848건으로 생전에 언급된 내용이 2000건 가까이 되고, 사후에 그에 대해 기록된 사건도 1000여 건에 이른다고 한다. 그는 83세로 긴 일생을 살았고 인조·효종·현종·숙종 무려 4대에 걸친 정치적 이력을 갖고 있었으며 학문과 저술이 방대했던 탓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사후에도 조선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문묘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의 서원에 제향되어 그의 이념은 수많은 유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였기에 현대에 이르러서도 뜨거운 논쟁의 대상으로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다.


우암 송시열과 그의 문집인 <우암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