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요순, 중흥군주, 정복왕 등 우리 역사에는 왕에 대한 별명이 많다. 그런데 왕의 별명 중에는 '돗자리 왕'이라는 별명도 있다. 왕건에 이어 고려의 2대 왕에 올랐던 혜종의 별명이었다. 혜종이 '돗자리 왕'으로 불려진 연유는 특이하면서도 흥미롭다. 이는 사가에도 언급되어 있다.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 사람으로, 조부는 부돈이고 아버지는 다련군인데, 가문 대대로 목포에서 살았다. 다련군은 연위의 딸 덕교에게 장가 들어 장화왕후를 낳았다. 왕후는 일찍이 물가의 용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놀라서 부모에게 말하니 모두 그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조(왕건)가 수군장군으로써 나주에 출진하여, 목포에 정박하고 시냇가를 둘러보니 오색의 구름이 있었다. 곧 (시냇가에) 이르러 보니 장화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고 태조는 그녀를 불러서 동침하였는데, (그녀의 가문이) 한미하였기에 임신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침석(잠자리에 까는 돗자리)에 사정하였는데, 왕후가 즉시 그것을 흡수하고 마침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곧 혜종이다.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있어서, 세간에는 그를 '주름살 임금'이라 불렀다. 항상 물로 침석을 닦고, 또 큰 병에 물을 담아 팔을 씻겨도 젖지 않았으니, 진정한 용의 아들(왕의 자손)이었다. 혜종의 나이가 7세가 되자, 태조는 왕위계승의 은덕을 알고 어미의 신분이 미천한 탓에 왕위를 잇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상자에 자황포를 담아 왕후에게 하사하였다. 왕후가 (그것을) 대광 박술희에게 보여 주자, 술희는 그 의중을 알아차리고 (태조에게) 정윤(태자)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 '고려사' 열전 中 후비 장화왕후 오씨


정리하면 이렇다. 왕건이 궁예 수하에 있던 때 후백제의 뒤를 치기 위해 나주 정벌을 단행하였는데 나주의 호족 오다련의 딸을 만나 동침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왕건은 임신을 원치 않았기에 돗자리로 체외사정을 하였는데, 오씨 여인이 돗자리에 떨어진 정액을 스스로 빨아들여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때문에 이 아이의 이마에는 돗자리 무늬가 새겨졌는데 훗날 왕이 되어서도 이마의 무늬 때문에 '주름살 임금'이라 불렸다.


오늘날의 과학적 상식 수준에서 이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홀로 정액을 빨아들여 임신했다는 것도, 정액이 돗자리에 떨어진 탓에 태어난 아기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가 있었다는 것도 모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현재 개성에 위치해 있는 고려 제2대 혜종의 순릉


이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유언비어였을 가능성이 크다. 알려져있다시피 왕건이 많은 호족들과 정략혼인을 했던 탓에, 왕건 사후 왕실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외척들간의 세력 다툼이 치열했다. 혜종이 즉위한 뒤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혜종의 외척인 서남해안의 호족세력을 제외한 서경파 호족, 신라지방 출신 세력들은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며 왕권을 견제했다. 혜종은 즉위 기간 내내 신변의 위협에 시달렸다. 실제로 혜종을 암살하기 위해 왕궁으로 자객들이 침입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혜종은 즉위한 뒤 3년만에 죽었는데, 죽음의 이유를 두고 유력 호족세력들의 독살설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을 정도다.


따라서 '돗자리 왕'이라는 별명 또한 서남호족세력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온 신라지역 출신 호족들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장화왕후와의 혼인은 정략결혼이 아니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나주호족의 세력은 비교적 힘이 약했다). 사실 혜종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부터 왕건과 함께 직접 전장에 나가 활약할 정도로 용맹스러웠고, 개인적 능력으로도 일국의 제왕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훗날 고려 왕실의 주도권이 바뀜에 따라 '돗자리 왕' 혹은 '주름살 임금'이라는 후대의 오명을 피하지 못하게 된 셈이다.


사가의 기록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참고문헌: <고려사 열전>, '김세환의 역사 미스테리', 두산백과, 김창현 '광종의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