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 작품을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한 건 아니지만 감독인 윌리 피스터도 그렇고 전반적인 제작진이 놀란 사단인만큼 기존의 놀란 작품들처럼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영화의 힌트나 키워드를 유추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조니 뎁)의 이름은 윌인데 영어로 표기하면 Will, 사전적인 의미로는 '의지'를 뜻한다. 의지라는 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의식적 행동을 하게 하는 내적인 욕구를 의미한다. 기계가 생물이 될 수 없는 건 바로 이 의지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은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라 할지라도 종족 번식이라는 의지를 갖고 자가 번식을 한다. 반면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고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기계라도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외부에서 입력한 명령어대로 연산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핀'이란 인공지능 컴퓨터가 의지를 갖게 된다. 주인공인 윌 캐스터의 기억·생각 등이 프로세서에 업로드 되면서 기계가 인간처럼 의지를 갖게 되는 초월체(영화 제목처럼)가 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다. 의지라는 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이고 그 욕구에 의해 감정이 발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의지와 감정이라는 건 불가분의 관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트랜센던스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로서의 신보다는 인간과 비슷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갖고 있는 그리스의 신들을 닮아있기도 하다. 영화에서도 에블린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감정은 트랜센던스 스스로를 멈추게 하였다. 바이러스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블린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전지전능한 트랜센던스도 불합리한 선택을 하고 만다. 인공지능을 무결점적인 존재로 바라보던 기존의 시각을 깨는 순간. 지금까지 자각 능력을 갖춘 미래의 기계 문명이나 인공지능이라 하면 '터미네이터'나 'A.I.', '매트릭스'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고 냉철하고 빈틈이란 찾아볼 수 없는 기계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실제로는 스스로를 작동시킬 수 있는 기계, 다시 말해 의지를 가진 인공지능이란 결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에블린은 죽기 직전 깨닫는다. "윌, 정말 당신이었구나."

좋은 작품은 언제나 물음과 여운을 남긴다. 그런 점에서 괜찮은 영화였다. 고민을 많이 하게 하니까. 과연 무엇을 주인공인 '윌'이라 할 수 있는지. 프로세서와 온라인을 떠다니는 전기 신호인지, 애초에 강에 뿌려진 한줌의 재인지, 아니면 과학기술에 의해 복원된 그의 신체인지. 더 나아가면 '나'란 무엇인지. 정신이 '나'인건지 아니면 육체가 '나'인건지. 두 가지 다 있어야 하는 건지, 하나만 있어도 되는 건지. 여기서 또 재밌는 건 윌의 스승이었던 요셉 태거(모건 프리먼이 분했던)란 이름에서 '요셉'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남편으로 예수의 신체적인 아버지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는 정신적인 아버지인 하나님과 육체적인 아버지인 요셉, 두 아버지를 가진 셈. 물론 섣부른 유추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하는 영화인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