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드라마 왕국'으로 표현한 신문 기사가 있었다. 한 해 드라마 제작 건수도 많을 뿐만 아니라 한류 열풍에 힘입어 불티나게 수출되는 우리나라 드라마의 호황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이런 드라마 왕국에서 이번에는 축구를 가지고, 그 것도 우리의 숙적인 일본을 상대로 한 편의 드라마를 찍어냈다.

솔직히 말해, 한 풀 기가 죽은 채로 시작했던 경기. 좋지 못했던 경기 내용을 둘째 치고라도 이라크전의 아쉬운 승부차기 패배로 또다시 아시안컵 우승이 좌절된 상황에서 맞이하는 김샌 3,4위 순위 결정전이었다. 물론 상대였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3회 연속 대회 우승이라는 값진 커리어를 눈 앞에서 놓친 일본 또한 한층 무거워진 발걸음마냥 기가 꺾인 심적 상태에서 경기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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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내용은 여느 한일전과 다를바 없이 한마디로 용호상박이었다. 우리가 결정적 기회를 만들면서 분위기를 타는가 싶으면 어느새 일본도 우리 골문앞에서 위협적인 순간을 만들면서 맞받아쳤다. 역시 일본은 세밀하고 아기자기한 플레이로 서서히 기회를 만들어나가는 한편, 우리나라는 비교적 굵직굵직하고 역동적으로 일본을 위협했다. 경기 내용으로만 본다면 양측 모두 끊임없이 몰아치는 흥미진진한 경기였다.
그러나 강민수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고 이에 강한 어필을 한 우리나라의 코치진이 거의 모두 퇴장당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고, 우리는 굉장히 어렵게 경기를 풀어나가야 했다. 수적 열세에 몰린 우리나라는 불가피하게 수비 위주로 경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보는 내내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두 경기 연속으로 연장전까지 가면서 피로가 누적됐던 우리 대표팀은 일본을 상대로 또다시 연장을 치루는 상당히 고욕스러운 상황을 맞이했지만, 때로는 온 힘을 다해, 때로는 지혜롭게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며 끝내 승부차기까지 버텼고, 이운재는 어김없이 일본 선수의 슈팅을 막아내며 다시 한번 온 국민들에게 짜릿한 승리감을 맛보게 해주었다.

오범석. 염기훈과 함께 이번 대회 우리 대표팀의 가장 큰 수확물이다. 경기 중 해설자의 말대로 포항에서 잔뼈가 굵은 선수이다. 역시 브라질리언 팀 출신답게 재치있고 기교있는 축구가 눈에 띄었다. 사우디전 페널티킥을 허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상대의 윙어들을 무력화시켰다. 아마 이번 경기 일본 감독은 아마 한국 선수들 중 이 오범석 선수를 제일 원망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수비 뿐만이 아니라 오버래핑도 활발했다.
김치우. 과거 인천유나이티드가 일으켰던 돌풍의 핵이며, 인천유나이티드의 선수 장사의 대표적 수확이다. 일본전에는 몇 번의 결정적 위기를 파인플레이로 잘 막아내며 오범석과 함께 가장 큰 활약을 해주었다.
김진규. 무엇보다 언제나 상대를 부숴버리려는 당찬 기세가 마음에 든다. 잠깐 있었던 양팀 선수간의 몸싸움에서도 그는 가장 먼저 일본 선수를 향해 달려가서 위협을 가했다. 거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팀에는 몇몇의 거친 선수가 존재해야 한다. 여러차례 상대에게 위협을 가하며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선수말이다. 김남일이 부상에서 빠진 우리 대표팀에서 김진규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었다.

조재진. 이번 대회 가장 실망스러웠던 선수였다. 지난 경기들은 물론 이번 일본과의 경기에서의 부진은 J리그 최고 공격수라는 그의 간판이 한없이 작아보였다. 월드컵 때 세계적인 수비수들과 당당히 힘겨루기를 했던 그 모습은 사라져버린채, 그의 장기인 헤딩도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원톱으로서 볼을 간수하는 키핑능력, 볼을 분산시켜주는 패스, 포스트 플레이, 볼트래핑, 몸싸움 모두 부족했다. 비교적 약체라고 할 수 있는 아시아 팀들을 상대로 이런 실망스러운 경기 내용을 보여주었다는 점은 앞으로 그의 자질 문제가 거론될 가능성이 크다.

이영표, 박지성, 설기현, 김남일.
일본의 10번. 나카무라 슌스케는 역시 최고였다. 스코틀랜드 리그의 최우수 선수답게 일본 선수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 미드필드에서의 그의 조율과 정확도 높은 패스는 왜 그가 최고의 선수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이런 슌스케의 경우처럼 한 팀에서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선수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크다. 비록 11명이 뛰는 축구이긴 하지만 이러한 최고 수준의 선수 몇명으로도 그 팀 전체의 수준이 좌지우지 되고는 한다. 슌스케와 일본팀을 보면서 가장 아쉬웠고 그리웠던 이들이 바로 이영표, 박지성, 설기현, 김남일이었다. 특히 이영표나 박지성은 슌스케와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의 최고의 기량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다. 이런 선수들이 슌스케처럼 팀의 주축이 되어 팀을 리드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갖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