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려면 모호해야 한다. 철학이나 종교의 언어가 모호한 건 모든 것을 아우르려 하기 때문이다. 모호함 속에서 다양한 의미가 도출되기도 하고 그 담론의 영역이 넓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담론의 텍스트가 수용자들에게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기 까닭에 모호함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방향에서건, 완벽하려면 모호할 수밖에 없다. 영화로 따지자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그런 경우다. 그가 만든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는 모호한 부분이 많다. 덕분에 다양한 해석과 유추가 회자된다. 하지만 기본적인 주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놀란의 주관적인 세계관이 투영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방대한 세계관을 영화라는 한정된 서사에 응집시키려다보니 불가피하게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제를 내레이션처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건 영화라는 예술적 장르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두세 시간의 런닝타임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반면 '곡성'은 다르다. '곡성'에서 모호함은 영화의 전부다. 관객을 속고 속이는 그 모호함을 걷어내면 사실 남는 게 별로 없는 영화다. 물론 나홍진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플롯, 그리고 오컬트란 장르를 훌륭하게 로컬화시켰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다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류의 영화는 아니란 얘기다. 깊이 있는 세계관이 담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 혹은 철학적 메타포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본 후 멍해지는 순간은 있다. 하지만 그 여운은 작품 내의 적과 아, 선과 악을 구분하는 데서 오는 혼란스러움일 뿐, 깊은 공상에 빠지도록 만드는 여운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을 곱씹을수록 깊이를 느끼는 게 아니라 찝찝함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그리고 찝찝함 느끼는 데에는 감독의 트릭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반전이란 건 생략을 통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한 편의 서사 구조가 있다면 그 서사의 부분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관객이 특정한 관점을 갖게끔 유도하는 거다. 이따금 비워야 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덜 생략함으로써 관객에게 힌트를 주는 복선을 만들기도 하고(예를 들면 일광의 훈도시처럼), 마지막에는 생략됐던 부분을 한 순간 드러내면서 물음표를 느낌표로 완성시키는 반전을 만들기도 한다. 완성도가 높은 영화일수록 이런 과정이 깔끔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곡성'은 관객을 속이는 데 몰두했던 만큼 잃는 것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게 외지인이 종구 일행에 쫓기는 장면이다. 결말을 고려해볼 때 이 장면에서 묘사되는 외지인의 모습은 개연성을 갖췄다고 하기 어렵다. 결말에서 드러난 외지인의 정체와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후반부 반전을 위해 시점마다 캐릭터의 특성을 바꾸는 건 삼류에나 어울리는 기법이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나홍진답지도 못했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좋은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깊이 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것. 적어도 내 취향에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