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말해 상류층의 흑인과 하류층의 백인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영화다. 기존의 영화가 주로 상류층의 백인과 하류층 흑인의 이야기들을 다뤄왔던 것과는 좀 다른 설정이다. 엘리트지만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흑인 뮤지션과 맨하튼의 골목세계에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이태리계 비주류 백인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통해 스스로를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말해 설정은 참신한 편이지만 이야기의 경로는 예상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디테일한 시대 묘사, 아름다운 미장센, 차분한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만으로도 두 시간의 런닝타임이 금방 지나가버리는 영화다. 특히 비고 모텐슨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는 스페인에 사는 덴마크계 미국인인데, 작품 속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태리 출신 이민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은 어디로 가고 두둑하게 배가 나온 중년의 아재 외양과 이태리 출신 미국인 특유의 어눌한 영어발음까지. 폭력의 역사나 이스턴 프라미스에서의 진지한 역할은 많이 봤지만 뻔뻔하고 익살스러운 역할까지도 이렇게 잘 소화해낼 줄은 몰랐다.

‘백색 구원자 서사’로 논란이 일기도 했고, 토니(비고 모텐슨)의 비중이 너무 큰 나머지 돈(마허샬리 알리)에 대한 내용은 제3자의 시선 속에 머물고 말았다는 아쉬운 평도 있다. 하지만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이니만큼 자칫하면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적당한 톤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비고 모텐슨의 연기 덕분이었고, 그런 점에서 토니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시켰던 패럴리 감독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어쨌든 아카데미 상을 받은 만큼 완성도도 높고 재미도 있고 메시지도 있는 괜찮은 영화였다. 메시지라고 해서 단순하게 인종차별에 대해서만 생각해볼 영화는 아니다. 백인과 흑인이라는 큰 축의 대칭점 말고도 이성과 감정, 개인과 집단, 위엄과 폭력 등의 여러 대칭점들이 등장한다. 그 속에서 어떤 갈등이 일어나고 그것이 어떻게 봉합되는지,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나름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