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만큼이나 역시 무책임한 게 아닐까. 사회보장이라는 개념이 중요시 되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왜 문제가 발생했는지 시스템의 결함을 찾고 그것을 바로잡는 게 우선되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간다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문제가 ‘개인의 일탈’에 의한 것이라면, 이에 대한 조직이나 사회의 책임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책임이 없기 때문에 달라지고 개선되어야 할 것도 없다. 따라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문제를 개인의 차원보다는 구조적 차원에서 바라보고자 했고 이를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 한다. 개인이 아니라 그 문제가 발생하게 된 사회를 탓하는 것이다. 사회의 탓이라는 건 결국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작동시키는 이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탓이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모두의 것은 결국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경제학으로 보면 공공재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인 거다. 공공재는 말 그대로 모두의 소유물이지만 그것을 진정 본인의 소유물처럼 아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내 방바닥에는 과자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지만 길거리에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린다. 책임도 마찬가지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건 결국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게 되기 마련이다.

특히 개인과 사회를 구분해서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주 간단히 말해서 개인과 사회는 불가분한 관계의 개념이다. 사회는 개인의 총합이 아니다. 근대 이후에 우리가 발견한 건 사회가 개인을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외부의 모든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사적인 취향이야말로 진정한 나만의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그 취향이란 것도 외부의 유행이나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처럼. 결론적으로 개인은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 사회라는 것도 결국엔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느 하나 먼저랄 것도 없이 물고 물려있는 것처럼.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지우가 말하는 것처럼 ‘책임 있는 개인’이 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전국민이 집단적 우울증에 빠졌던 건 단순한 슬픔이나 애도의 감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허망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세상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이 사회의 어른으로서 모종의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감 때문에 달라진 게 있었다. 사회의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불편함이 있더라도 안전에 대한 절차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책임 있는 개인’의 의미는 바로 이런 과정을 말한다.

외부의 문제는 결국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내부의 문제를 애써 외면하려는 성향을 보이곤 한다. 예를 들어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걸 고민한다고 해서 하늘에서 돈 한 푼 떨어지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서 말한 것처럼 개인의 사유가 결여된 사회가 어떤 위험을 안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개인에게 어떻게 되돌아오는지 (개인을 어떻게 파멸의 종국으로 이끄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당연한 (그만큼 망각하기 쉬운) 명제이지만 성숙한 사회는 성숙한 개인의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성숙한 개인의식이란 책임감을 가진 눈으로 사회를 보는 걸 말한다.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일부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정치인, 재벌, 부패관료, 운동권 같은 일부의 탓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건 결국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