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국가가 식민지를 지배하면 가장 먼저 하는 건 원주민들에게 패배의식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도전은 언제나 패배로 귀결되고 만다는 일종의 관념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이 작업이 성공하면 식민지배는 수월해진다. 원주민들의 머릿속에 뿌리 내린 부정적인 패배의식이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서운 건 패배의식, 무기력에 사로잡힌 이들은 절대 저항의식을 가질 수가 없다는 점이다. 마치 말뚝에 묶인 채 성장한 코끼리가 거대한 크기의 성체가 되어서도 그 말뚝을 뽑을 엄두조차 못내는 것처럼.

일제도 조선을 삼키고 먼저 했던 일이 조선인들에게 패배의식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조선인은 게으르고 감정적이며 안이하고 분열되기 쉬운 민족성을 가진 반면 일본인은 근면하고 이성적이며 치밀하고 결속력이 강한 민족성을 가졌다는 인식은 바로 그때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은 당파정치에만 매몰되어 자력으로 근대화를 일으킬 여력이 없었다는 식민사관 역시 이런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서운 건 이런 인식이 여전히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은 차분하고 계산이 빠르고 예의 바른 반면, 한국인은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민족성을 갖고 있다는 점, 또는 일본산 제품과 한국산 제품 사이에는 여전히 넘사벽이 존재한다는 점 등등.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관념들이 경험적인 추론만으로 형성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상당한 부분은 일제 이후 만들어져 내려온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인식들이 지금까지도 무분별하게 답습되고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일본은 거대한 나라다. 대부분 경제력을 기준으로 일본의 비교우위를 이야기하지만, 사실 일본이 한국을 앞서고 있는 건 경제력만이 아니다. 우리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겪을 수 있었던 의식 수준의 변혁, 진보의 과정을 훨씬 일찍부터 밟아온 게 일본의 역사다. 한국이 패스트푸드라면 일본은 슬로푸드 혹은 숙성요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나라의 갭은 크다. 정치, 사회, 인문학, 철학, 기초과학 등 어떤 분야든 인용할 연구를 찾기 위해 굳이 영미나 유럽 같은 먼 곳을 뒤질 필요가 없다. 바로 옆 일본만 하더라도 우리가 인용해야 할 연구나 이론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만 여전히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는 없다. 학교에서 일진들이 괴롭히는 학생은 대충 정해져 있다. 일진이라고 해서 아무나 건드리고 다니는 건 아니다. 싫다는 의사표현이 확실한 애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대신 아무리 괴롭혀도 도전할 생각도 없이 가만히 있는 애들만 괴롭힌다. 국가 간 관계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어떻게 보면 개인 간의 관계보다 국가 간의 관계가 더 원초적이다. 말 그대로 자연법의 상태에 놓여있다. 개인들 사이에는 국가라는 존재가 있지만 국가들 사이에는 국가를 뛰어넘는 초국가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시비를 걸어오면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하는 게 맞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체념하는 태도는 국제무대에서 전혀 도움 될 게 없다. 누군가 나를 때리면 나도 맞기를 각오하고 때려야 한다. 그래야 내가 존중받을 수 있다. 그게 자연법의 룰이다. 불매운동은 분노의 자위행위가 아니다. 필요한 반작용이다. 효과가 미미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뭐든 대응을 하는 것, 그게 곧 자신을 지키는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일본과의 갈등상황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궁극적 목표는 전범국가의 오명에서 벗어나 군대를 보유하고 군사대국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속도가 문제였을 뿐, 일본과 다른 동북아국가들과의 갈등상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올 게 온 것뿐이다. 재무장, 우경화를 외교적 해결로 좋게 좋게 풀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외교라는 건 때로 강경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그래야 더 얻는 게 많을 수도 있다. 당장의 손해에 급급하다보면 더 큰 의미를 보지 못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