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시각이라는 건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이게 맞는 건가?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 같은 대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 밀즈는 이런 능력을 ‘사회학적 상상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한국 사회는 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하에 근대화란 일념 하나로 뭉쳐있던 사회에서 비판론, 회의론 같은 건 불필요한 걸림돌에 불과했다. 방향과 목표를 콕 집어서 한시라도 빠르게 달려가야 하는 판국에 갑자기 멈춰 서서 ‘이 방향이 맞나?’, ‘다른 방향은 없을까?’ 고민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거룩한 민족적 대업을 방해하는 일에 불과했다. 사회는 이런 이들을 빨갱이, 간첩(혹은 좌파)이라 부르며 중심으로부터 점점 몰아냈다.

그로부터 많은 과정과 시간이 지났지만, 비판이나 회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내재되어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화되고 대물림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선생님은 물론 주변 친구들마저 그런 학생을 이상하게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직장 회의시간에서도 이견을 내길 주저하고, 동료들과 점심 메뉴를 정할 때도 눈치 때문에 메뉴를 통일할 때가 많다. 우리에겐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왜냐면, 모두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 같은 외부의 시선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외국인들은 한국사회가 집단주의적이고 획일화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한국사회는 너무 개인화, 원자화 되어가고 있다고. 그래서 무관심, 이기심만이 팽배하고 있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국사회는 더 개인화되고 더 원자화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개인의 비판적 의식이 자라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서구로부터 민주주의, 공화주의라는 절차적 형식들만을 도입했을 뿐이다. 아직 그 형식을 채우고 있는 내용은 영글지 못한 상태다. 아직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이 잔존해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한국사회가 비판론, 회의론이란 말을 부정론, 비관론이란 말과 동일어로 생각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관론자의 결론은 자살이다. 무엇이든 비관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면 뒤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결국 사라지는 것, 자살뿐이다. 하지만 회의론자의 결론은 자살이 아니다. 회의론이라는 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가 없다.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회의한다는 건 의심하는 것이다. ‘진짜’를 찾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비판을 하고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건 사회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더 나은 선택, 더 좋은 방향을 찾기 위해 고민을 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