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서구는 주소를 적는 순서가 다르다. 우리는 넓은 단위부터 좁혀서 건물 이름을 적는 순인 반면, 서구는 건물 이름에서 시작해서 넓어지는 행정구역을 적는 순이다. 시작이 되는 기준점이 우리는 전체이고 서구는 개별인 것이다.

집단주의는 사회적 위기에 대처하는 데 용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하여 판단하고, 결정과 실행이 신속하기 때문이다. 서구와 달리 우리는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 공개를 두고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이미 사회적 합의가 끝나있었기 때문이다. 이견은 없었다. 즉시 공개하고 조치했을 뿐이다.

반면 서구에서는 확진자 동선 공개부터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 영역이 침해받는 건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몸에 이상이 없는 사람은 마스크도 불필요하게 여긴다. 각자의 안전은 각자가 지키는 것일 뿐, 공동의 안전을 위해 익숙치도 않은 마스크를 착용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인 것이다.

미국의 총기 소지는 이런 개인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미국인들에게 개인의 안전은 공동체가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 지킬 뿐이다. 그래서 총을 소지하며 자신을 보호한다. 총기 소지 때문에 전반적인 사회적 위험도가 높아져도 개인의 입장에선 전혀 신경쓸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공동의 안전을 위해 마스크 착용을 권유하는 건 씨도 안 먹힐 얘기다.

반대로 우리 중에는 단지 눈치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서울 시내는 거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고 있는데, 전부 다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는 건 아니다. 맨 얼굴로 거리에 나섰을 때의 심리적인 위축, 불편함 때문에 내키지 않아도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도 많다.

마치 나 빼고 전부 짜장면을 시켰는데 나 혼자 짬뽕을 시킬 수 없는 상황인 거다. 짬뽕을 시킨다고 해서 아무도 내색을 하지 않지만 스스로가 불편함에서 견딜 수가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한다. 그만큼 이 사회에서는 눈치(집단적인 시선)라는 게 개인의 행동양식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거다.

코로나19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비교가 될 만한 다른 국가들의 대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투명한 정보 제공이나 평소 다져놓은 의료 인프라 등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것 같다. 시스템을 잘 구축해놓은 거니까.

하지만 거기까지다. 과하게 자화자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인사법, 마스크에 대한 인식과 접근성, 기후 등등. 코로나19 대응에 대해 우리와 서구의 숫자가 확연히 다른 건 이런 사회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우연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더 우월하거나 대단한 건 없다. 상대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다.

오히려 사생활 침해, 비이성적 공포에 의한 마녀사냥 같은 것들처럼, 코로나19 예방에 모든 걸 올인하면서 간과되고 있는 이면의 가치들에 시선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이 사회가 평소 어떤 특징을 갖고 있고 그로 인해 어떤 지점을 놓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