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무관중이 된 덕분에(?) 축구 중계에서 선수와 코치들의 소리가 잘 들리게 됐다. 그간 관중의 소음에 가려졌던 소리가 중계진의 마이크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는 것이다. 서로 부르는 소리, 작전을 지시하는 소리, 심판에게 어필하는 소리 등등. 생각보다 많은 목소리가 경기장을 메운다.

그중에서 상대 선수나 심판을 향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다. 고함소리의 대부분은 자기 팀 동료들을 향한 소리다. 감독이나 코치만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건 아니다. 선수들 서로가 서로에게 지시를 한다. 누구를 맡아라, 어디로 달려라, 패스를 해라, 슛을 해라 등등.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의 목소리가 쉴 정도다.

때로는 신경질적인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같은 팀 동료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손흥민 경기만 봐도 팀 동료와 갈등하는 장면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왜 본인에게 패스를 하지 않았냐고 불만을 갖는 것이다. 공격수들은 항상 공이 본인에게 오길 바라기 때문이다. 공격만 그런 건 아니다. 수비수들끼리도 (때로는 골키퍼까지) 상대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두고 격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팬들은 걱정스럽게 보기도 하지만 선수들은 쿨하게 반응한다. 그런 갈등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다. 경기 중 같은 팀 동료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선수가 있어도 그의 행위를 문제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감독들마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경기의 한 부분이라고 여길 뿐이다. 하지만 국내의 반응은 달랐는데, 같은 팀 동료끼리 충돌하는 건 국내 정서로서는 굉장히 낯선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목소리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명하복의 수직적 질서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점심 메뉴를 정할 때조차 튀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는 세상에서 개인적 견해를 어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후배라면 선배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위계질서 속에서 구성원끼리 큰 소리를 내고 다투는 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국회의원이 당론과 다른 의견을 냈다고 해서 당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이런 문화 때문이다. 권위주의를 몰아내는데 젊음을 바쳤지만 스스로도 권위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건 운동권 세대의 아이러니한 특성이다. 투쟁적인 태도에서 연유된 것인지 아니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산업화세대를 닮아버린 것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꼰대란 말을 들을 만큼 그들은 형식적 민주주의에만 집착할 뿐 실질적인 민주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이고 있다.

소수의 지도부가 당론을 정하고 다수의 의원들은 그것을 따르는 거수기가 되어버리는 게 지금 여의도의 모습이다. 최장집의 비판대로 과거 독재정권의 여당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정당이라는 건 집권을 위해 일사분란한 조직력을 보여주는 이익집단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대변할 수 있어야 하는 정치결사체다. 권위주의나 성장주의가 아닌 민주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정당에 있어야 할 건 지시나 명령이 아니라 토론과 대화인 것이다.

히딩크는 대표팀에서 위계질서를 없앴다. 경기할 때만큼은 존칭이나 존댓말을 쓸 수 없게 했다. 선배 선수들만 뭔가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후배 선수들도 선배들에게 자유롭게 지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천수가 홍명보에게 "명보! 패스!"라고 소리쳤던 것처럼. 좋은 경기력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소통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집단 내에서 자유롭게 여러 의견이 나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건 잡음이 아니라 더 나은 의사결정을 위한 과정에 가깝다.

정치든 축구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열과 오를 맞춰야 하는 매스게임과는 다르다.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소수의 리더를 따라 획일적으로 움직이던 꼰대의 시절은 지났다. 축구에서도 잘하는 팀은 늘 시끄럽다. 소리치고 떠드는 선수들이 많기 때문이다. 군기가 없는 집단을 가리켜 옛날 말로 당나라 군대라고 했지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태도일지도 모른다. 당나라 군대 같은 느슨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눈치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