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사실성은 다른 개념이다.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의미하지만, 사실성은 실제로 있을 법한 일을 의미한다. 극drama이란 사실을 다루는 게 아니라 사실성을 표현하는 장르다. 따라서 극의 내용을 두고 그것이 왜곡됐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다. 왜곡이란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는 걸 말하는데, 극이야말로 사실을 다루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두고 역사왜곡이란 비판을 하는 건 사실과 사실성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다.

재해석이 없다면 그건 극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논픽션)다. 사실 다큐멘터리도 제작자의 견해가 투영된다는 점에서 사실만을 다룬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만을 기록한(?) 창작물이란 존재하기도 어렵고 존재한다고 해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극이란 필연적으로 사실을 비틀고 재구성해야 한다. 실제 있었던 일과 다르게 이야기하는 걸 왜곡이라 한다면 세상의 모든 시대극, 역사극은 전부 역사왜곡물이어야 한다.

‘조선구마사’는 제목만으로도 판타지 장르임을 알 수 있다. 엑소시즘이란 소재부터가 조선이란 배경과는 전혀 맞지 않으니까. 그런 작품에 역사적 고증을 기대하는 건 ‘킹덤’을 보고 조선시대에 왜 좀비가 등장하냐고 따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작가에 의해 완전히 재창작된 세계관에서 작중 인물이 실제 역사 기록과 얼마나 부합되는지를 비교하는 건 전혀 의미 없는 짓이다.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재현하느냐는 창작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수용자로서 그의 재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을 비판하거나 외면하면 된다. 하지만 이를 넘어 표현 자체를 제재하려고 해선 안 된다. 영화 관련 사이트에 들어가서 별점 테러를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게시판은 영화나 드라마의 상영 또는 방영을 중단시켜달라는 청원이 빗발치고 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작품에 제재를 가하면 그 피해는 오롯이 대중에게 돌아온다. 사회적 분위기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창작자의 자기검열이 강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막대한 자본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영화, 드라마, 소설 등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경쟁국가와는 다르게 아직까지도 중앙권력의 감시와 통제가 유효한 곳이 중국이기 때문이다.

8,9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던 홍콩영화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도 중국이 영화란 문화산업을 체제의 선전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던 시기와 궤를 같이 한다. 중국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보다 웅장해지고 화려해졌지만 이전만큼의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문화적 역량을 키워주는 건 자본의 힘이 아니라 그 사회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인 것이다.

문화 콘텐츠 대결은 자본유입을 막는다고 이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중국자본이든 넷플릭스 같은 미국자본이든 시장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흐름을 거스르는 건 쉽지 않다. 민족주의적 정서를 건드려 중국자본이 투입된 작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결국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정공법밖엔 없다. 끊임없이 양질의 콘텐츠를 개발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콘텐츠 개발이란 다양한 시도들이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창작자가 주변의 눈치를 볼수록 상상력의 범위는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 국가검열이 아니라 시민검열이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를 경직시킨다는 점이다. 시민검열은 보이지 않는 내부에서 스스로를 잠식시킨다는 점에서 국가검열보다 치명적이다. 하지만 ‘조선구마사’ 논란만 봐도 시민검열을 경계하는 자정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

‘폐지’, ‘중단’, ‘방영취소’ 같은 워딩은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한다. 자본력으로 문화산업을 위협하고 역사에 대한 동북공정을 시도하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과 똑같이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판타지 드라마에 중국풍 음식이 잠깐 등장한다고 해서 동북공정의 단서를 제공해주는 건 아니다.) 검열이 아니라 비평의 범주에서 작품을 평가하는 난상토론이 오가고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다채로운 시도들이 계속되는 것, 그들에게는 없는 이런 자유롭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대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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