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서복은 말한다.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어요,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가.” 하지만 이 대사의 화자는 서복이 아니라 영화 자체인 것 같다. 영화가 관객에게 하는 변명으로 들린다. 끝내 무언가가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 서복처럼 이 작품도 의미를 찾기 전에 자폭하고 말기 때문이다.

영화는 삶과 죽음, 실험체 윤리, 인류의 영생, 국가윤리, 양심과 탐욕 등 SF 장르가 다룰 수 있는 소재는 거의 전부 건드려 놓는다. 그리고 수습이 되지 않자 모든 인물을 한 곳에 모아 폭발시킨다. 그리고 서복마저 없애버린다. 장황한 세계관치고는 무책임한 결말이다. 가장 손쉬운 마무리니까.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방식도 투박한 편이다. 복제인간에 관한 철학적 고민을 영화 속 인물이 전부 이야기해버린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여운이 없다. 영화를 본 후 관객의 머리에 남아야 할 질문들을 인물의 대사가 직접 말해버리기 때문이다.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영생은 무엇을 가져올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직접적인 대사가 아니라 메타포로 그려져야 한다. 영화의 서사, 인물, 이미지, 분위기는 그 메타포를 위해 쌓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게감은 작품의 깊이를 만든다. 좋은 작품을 본 후의 묵직한 뒷맛은 여기서 오는 거다.

예를 들어 ‘기생충’에서는 “가난하다는 게 어떤 의미야?”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가난을 “가끔 지하철 타다 보면 나는 그런 냄새”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영원하다는 건 어떤 거야?”, “죽는다는 건 어떤 거야?” 같은 대사보다 이에 대한 독창적인 비유가 있어야 했다.

감독이 밝힌 것처럼 이 작품의 키워드가 두려움이었다면, 영생이 왜 두려운 미래인지에 대한 메타포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매일 골수를 뽑는 서복의 고통은 영화적인 설정일 뿐 영생이 두려운 이유를 비유하진 못한다. 두려움은 서복을 제거하려고 하는 악역들의 명분으로 소모될 뿐이다.

메타포가 부재한 SF물에는 화려한 클리세만 남는다. 감독의 담백한 연출이 되레 진부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건 배우의 연기인데, 그나마도 인상적인 편은 아니었다. 박보검의 순진무구한 복제인간 연기는 ‘응답하라1988’의 기시감을 벗어나지 못했다.

복제인간이란 고작 히어로를 만드는 데 써먹을 소재가 아니다. 이왕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보다 깊은 고민을 다뤘어야 했다. SF라고 해서 반드시 장황한 설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작고 사소한 내러티브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방대한 세계관일수록 개연성과 흡인력은 옅어지기 마련이다. 스케일의 강박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비유로 미래를 그려내는 상상력, 국내 SF 장르에서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