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차를 몰고 가다가 차가 부숴져버리면 어쩔까 할 정도로 폭우를 맞았던 어제와 달리,
오늘 오후는 오랜만에 햇빛이 쨍쨍히 비추는 맑은 날씨였다.
한창 비가 왔던 날씨 때문인지 하늘은 먼지 한 톨 안날리는 듯 깨끗했다.
특히 오후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해가 건물들을 아주 밝게 비추는 상아색 빛이 보기 좋았다.
또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하얀 구름들도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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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베란다에서 찍은 모습. 잘보면 63빌딩도, 남산타워도, 용산발전소 굴뚝도 보인다.

중학교 교향악단에 있었을때, 우리들의 연주를 봐주러 오는 음대 졸업생 형, 누나들이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이 했기에, 몇몇 형들과는 많이 친해져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한 형이 당시 어린 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음대를 나와도 할게 없어. 나랑 친한 선배는 음대나오고 유럽 유학까지 다녀왔는데도 할게 없어서 동네에서 치킨집차렸어. 이따 저녁에 거기 가야해."

고등학교 때 우리 국어 선생님의 또다른 직업은 시인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자주하셨다. "원래 시인이라는 직업이 참 어려운 겁니다. 자신의 직업이 따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저와 같이 선생님이나 교수를 다른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시인들은 참 운이 좋은경우에요. 상대적으로 다른 직업보다 글을 쓴 시간적 여유도 많은 편이니까요."

불과 몇일 전, 네이버 뉴스창 한가운데에 이런 기사 제목이 떴었다.
-신춘문예 등단자들, "글써서 밥벌이? 소설같은 이야기"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1/h2007011418595684290.htm

대학 교양 강의로 '공연예술의 이해'란 강의를 들었을 때 교수가 한 말도 기억에 남는다. "연극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대학로에서도 대부분 공연 분야 종사자들의 월급이 100만원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내가 개인적으로 겪고 들은 이야기 말고도, 원래 예술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배고픈 분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흥미롭게도 현대문학 624호에서는 문학과 돈에 대한 이야기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특히 이번 특집 글에서는 시인들이 쓰고 있는 돈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성경에 가라사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하였으니
2백억을 축재한 사람보다 1백9십9억을 축재한 사람 또한 그만큼 더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천국은 그의 것이요
그보다 훨씬 적은 20억 원이니 30억 원이니 하는 규모로 축재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천국은 얻어놓은 당상이라
돈 이야기로 시라고 써놓고 있는
나는 어느 시대의 누구보다도 궁상맞은 시인이므로 천국은 얻어놓은 당상이라
(오규원, 「마음이 가난한 者」,『오규원 시전집』)

이 시처럼 돈을 예술적 순수함과 창조적인 문화활동을 저해하는 요소로 보고 이러한 돈을 애써 외면하고 거리를 두기 위해 벽을 쌓는 시인들도 있는 반면,


낮잠을 자고나서 들어보면/후란넬 저고리도 훨씬 무거워졌다/......
윗호주머니나 혹은 속호주머니에 들은/치부책노릇을 하는 종이쪽/그러나 돈은 없다
 -돈이 없다는 것도 오랜 친근이다.
-그리고 그 무게는 돈이 없는 무게이기도 하다.
(김수영,「후란넬 저고리」,『김수영 전집1』)
 
이 시에서 돈이 없는 무게를 친근하다고 여기며 그 무게 자체를 견디려 하는, 즉 돈이 없는 가난을 애써 피하고 막으려 하기 보다는 그 자체를 친근하게 느끼면서 그 것을 견디려 하는 자세를 갖고 있는 시인도 있다. 시인 서정주의 솔직한 시도 재미있다.

밤 새어 긴 글 쓰다 지친 아침은/찬술로 목을 축여 겨우 이어 가나니
한 수에 오만 원짜리 회갑시 써 달라던/그 부잣집 마누라 새삼스레 그리워라.
그런 마누라 한 열대여섯 명 줄지어 왔으면 싶어라.
(서정주, 「찬술」,『서정주 시전집1』)

사람은 자기가 제일 하고싶은 것을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돈과 명예를 떠나서 너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학생이다. 아직 직업 비스무리한 것도 없다. 그러나 앞서 말한 주윗 사람들의 경우와 이러한 시인들의 돈에 대한 고충을 당신들의 시를 통해 엿보면서, 사람이 어렵사리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직업을 가졌는데, 경제적인 메리트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직업을 포기해야하고 그 직업을 유지해 나가는게 어려워질 때 과연 어떠한 느낌을 받는지 그 절망감의 정도가 얼마나 큰 건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나온지 몇 백년이 지나도 아직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유명한 클래식 곡들이 있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등 유명한 작곡가들에게서 만들어진 곡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면에는 그들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음악에만 열중하며 명곡들을 작곡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당시의 귀족, 왕족 스폰서들이 있었다. 이러한 스폰서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운명','피가로의 결혼' 등 명곡들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문학도, 다른 예술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인과 소설가들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과 관심만이 우리 문학이 좀더 질적, 양적으로 수준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결국 작품을 읽는 독자들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차례 차례 복날이 다가오는 여름철마다 이러한 동물보호단체 등은 개고기를 먹어선 안된다며 한 목소리를 내기 바쁘다. 사진에서와 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완견들을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냐며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야만인 취급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개를 식용으로 먹는 민족은 찾아볼 수 없다며 개고기를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바득바득 증오하기에 이른다. 개고기 먹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이렇다. 개는 인간을 그 어미아비처럼 믿고 따르며 헌신하고 봉사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으로서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다른 동물, 즉 소나 돼지, 닭 등은 합법적인 식용 동물이지만 전 인류적으로 볼 때 개를 식용 동물로 삼는 곳은 없다. 따라서 개를 먹는 것은 지극히 옳지 않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목적으로 동물을 키운다. 앞서 말한 닭, 돼지, 소와 같이 식용을 목적으로 동물을 사육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사진에서와 같이 애완을 목적으로 애완견이나 다른 애완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 또한 있다. 여기서 개고기 먹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마다 이렇듯 동물을 키우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개고기와 달리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를 먹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로 먹는 개고기는 귀여운 애완견들과 달리 식용으로 키워지는 식용개가 아닌가. 식용으로 키워지는 개랑 식용으로 키워지는 소랑 무엇이 다르다는 소린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어항 속에 여러가지 물고기를 넣고 키운다. 우리가 평상시 사랑이 듬뿍 담긴 물고기 밥을 던져주는 금붕어와 비슷한 과라고 할 수 있는 물고기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식탁에 올려 맛있게 먹는다. 물고기와 개 모두 한 쪽으로는 사랑을 통해 키워지지만 다른 한 쪽으로는 식용으로 잡혀서 식탁에 올려진다. 그런데 생선을 먹지 말자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문화의 상대성은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러한 문화의 상대성을 접고 생각하더라도, 도대체 개고기를 먹는 행위가 전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예를 들면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들에 반하는 것이 있는지 묻고 싶다. 채식단체의 논리 또한 묻고 싶은 점이 많다. 인간이 육식을 하기 위해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하는데 이러한 도살 과정에서 동물들이 많은 고통을 겪고 생명을 잃기 때문에 육식을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들과 달리 식물들은 이러한 직접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열매와 잎을 뜯겨도 금방 재생되어 생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채식주의자들이 먹는 여러가지 과일과 채소들은 아무런 생명의 죽임 없이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들일까. 열매와 잎만을 뜯겨 생명엔 지장이 없다는 논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특정한 작물의 잎과 열매를 얻기 위해 농부에 손에 수없이 뜯겨진 잡초들은 생명이 아닐까. 생고기를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알래스카인들도 그들의 손에서 동물들을 놔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이해. 바로 이것이다.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저런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개들을 모두 식용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채식주의자들도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이해해주어야 한다. 나도 개고기를 먹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건 채식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건 이들 모두에게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나 자신들만의 가치관이 전부인냥 다른 사람들을 싸잡아 야만인 취급을 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나 또한 그들을 애써 부정하려는 감정적일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 되는 수 밖엔 없을 것이다.

  • ㅇㅇ 이 사람들이 개고기 먹지 않는다는건 좋아.
    하지만 왜 무슨 권리로 먹지 말라는건지,
    아직 자기 주관도 잡혀있지 않을 어린애들을 동원(이라고 표현하면 좀 그런가?)해서까지 저래야할까?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라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보는 느낌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나 말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 영화에서와 같이 '타인'이라 칭한다. 심지어 살을 부비고 지내는 가족도 '나'가 아니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타인'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 '나'들에게 다른 '타인'들을 그냥 말그대로 '타인'일뿐이다. 나의 삶을 사는데도 하루 하루가 벅찬 우리 '나'들에게는 타인의 삶이란 관심이 별로 가지 않는, 관심이 가더라도 그 관심만이 타인의 삶에 대한 최대한의 관심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는 비교적 '나'와는 거리가 먼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 타인의 삶을 직업으로 삼는 한 남자가 있다. 타인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날밤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는 모든 일들을 도청하고 감시한다.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당을 위해 그 당에 해가 될 만한 타인들은 모두 그의 눈과 귀에 의해 발가벗겨진다. 이러한 그에게 씌여져 있는 것은 '냉정'이라는 안경. 그는 그의 밖의 모든 세상들과 오로지 '냉정'이란 단어로만 소통한다.


문제는 그가 그와 너무도 대비되는 삶을 살아가는 한 타인의 삶을 지켜보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가 '냉정'이란 단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의 '타인'은 '열정'이란 단어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극작가로서의 '열정'은 물론 정의를 열망하는 '열정', 또한 한 여자의 애인으로의 '열정'까지. '타인'에게 그 모든 것이 '열정'이었다. 이 영화에서 '냉정'과 '열정'의 대결은 매우 싱겁게 끝이 난다. 자켓의 자크를 마지막까지 올려입고, 허리와 목을 곧게 세우고 경직된 자세로 뚜벅뚜벅 걷는 그의 모습. 그가 영화 처음에서부터 보여준 그의 '냉정' 그 자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쯤, 그에게 '냉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듯 그의 경직된 발걸음에서 뿐이다.


투명무색의 맑은 물에 떨어진 몇 방울의 빨간 잉크가 그 물의 전체를 조용하게 물들여버리듯, 그의 무미건조한 삶 또한 타인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삶에 어느 순간 조용히 물들어버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물들어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희생, 그 자체이다. 그가 타인이 모르게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지켜봐왔듯이,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시킨다. 받는 사람 마저 알지 못하는 슬픈 희생.


의도된 노출. 모순이다. 원래 노출이란 어떠한 것이 당사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밖으로 드러났을 때를 말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의도된 노출이라니. 앞뒤가 안맞는다. 그런데 가끔 연기자들은 이러한 의도된 노출을 해야할 때가 있다. 관객들에게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숨기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관객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한다. 즉, 관객에게 은밀히 자신의 속내를 들켜야한다.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들어나면 의도적 노출이 아니다. 그냥 일반적인 싱거운 표현일 뿐이다. 또한 의도는 했으나 노출이 충분히 되지 않아도 소용없다. 내용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야기다. 비즐리 역을 맡고 있는 울리쉬 뮤흐는 영화 내내 관객에게 의도된 노출을 한다. 겉으로 비밀 경찰이라는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섬세한 안면 연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가 이미 자신의 직분을 잊은채 타인의 삶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듯 떨리는 그의 미간의 주름은 의도된 노출의 정점이었다.


올리쉬 뮤흐. 독일에서는 큰 인정을 받는 국민배우였다고 한다. 사랑, 예술, 통일 등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그가 무표정으로 헤드폰을 끼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단 몇 미리의 눈동자 움직임만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배우. 어쩌면 '타인'이 아니면서도 '타인의 삶'을 가장 잘 흉내낼 줄 아는 사람이 그가 아닐까 생각된다.

  • dasan 2007.04.02 16:09 신고 # modify/delete reply

    So Good.
    요즘 어떻게 사냐?
    언능 스킨 꾸미는거 갈켜줘라

    • 주중에 잠깐이라도 뵈요.
      제가 할줄아는건 나모랑 아주 약간의 html이라..
      그거라도 알려드릴 수 있는 한 알려드리겠습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네요^^;

  • 나 금요일에 용식이형 생일 안가고 이거 보러 151 타고 내렸다가 시청에서 시위하길래 얼떨결에 동참했었다.
    위에 글은 하나도 안봤다 나 꼭 보려고 푸헬

  • dasan 2007.04.03 18:48 신고 # modify/delete reply

    그래 그럼 주중에 시간이 되면 한 번 보자꾸나.

  • 아뤼스트 2007.08.24 13:01 # modify/delete reply

    트랙백 감사합니다.
    내용에서 전문가적 기질이 보이시네요...
    작품에 대한 통찰력...부럽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우리는 '콤비'라는 말을 자주 쓴다. 개개인의 능력도 물론 수준 이상이지만, 그 개인이 서로 반응하며 매우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때 우리는 그들을 콤비라고 이름 붙여준다. 세상에는 유명한 콤비가 많다. 90년대 NBA를 주름잡았던 조던-피펜 콤비, 세계 배드민턴 혼합복식을 독식했었던 김동문-나경민 콤비, 최근 큰 유행이었던 차범근-김성주 축구 해설 콤비 등등. 특히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조직적인 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축구에서는 유독 유명한 콤비가 많다. 최근 재결합으로 화두에 오르는 루드-베컴 콤비, 피를로-가투소 콤비, 모리-라울 콤비 등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콤비를 들자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라하-알벨다'콤비를 꼽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대표팀은 명장 히딩크 감독의 조련 아래 매 경기마다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히딩크의 말대로 우리나라 대표팀은 경기를 지배할 줄을 알았고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우리나라 대표팀이 경고 누적과 부상 등으로 인한 몇몇 핵심 주전의 결장으로 석패했었던 독일과의 경기를 제외하고 가장 고전을 겪었던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었다. 앞서 말한데로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세계 최고 수준의 팀들과의 중원 싸움에서 압박을 무기로 절대 밀리지 않은 우리나라였지만 스페인 만큼은 중원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며 매우 고전했다. 바로 스페인의 강력한 미드필더들 때문이었고, 그 중심에는 바라하와 알벨다 콤비가 있었다.


이들은 2000년부터 라리가의 빅3 중 하나인 발렌시아에서 발을 맞추기 시작했고, 이에 더불어 스페인 국가 대표팀에서도 똑같은 자리에서 호흡을 같이 했다.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에서 국가 대표팀을 준우승에 올려놓았고, 02~03 시즌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의 강팀들을 뚫고 소속팀 발렌시아가 리그 우승을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만약 바라하가 알벨다를 만나지 못했고, 알벨다 또한 바라하를 만나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비록 그랬다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평가를 받았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둘 다 유명한 선수들이 되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밀려온다. 과연 나에게는 나만의 바라하, 혹은 알벨다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머릿 속을 스쳐지나가는 몇몇 친구의 얼굴이 살며시 떠오른다. 친구를 생각하니 그를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더 소홀히 대하지는 않았나하는 괜한 후회가 든다. 또한 그 친구는 내가 그 친구를 생각하는 것만큼 나를 가깝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학교를 다닐 때는 줄곧 연락하고 얼굴도 자주보던 친구였지만 각자의 진로로 흩어져버린 후 생각처럼 자주 보고 자주 연락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또 이런 생각도 든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앞으로의 내 인생에 있어서 나의 바라하 혹은 알벨다가 될 사람은 없을까. 있다면 과연 누굴까. 그런 친구 혹은 형, 동생을 찾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래된 친구의 그리움만큼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쉽지만은 않은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