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앚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뒤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을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걸

우리 또래라면 어렸을 적에 한번 쯤 들어봤음직한 노래, '네모의 꿈'의 일부다. 네모에서 시작해 네모로 끝나는 이 노래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있다면 어딜까. 조금은 어둡긴 하겠지만 교도소만큼 이 노래에 잘 들어맞는 곳도 없을 듯 싶다. 네모난 창살 안의 네모난 감방, 네모난 침대와 네모난 창, 네모난 교도소와 네모난 운동장. 무엇보다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그들이기에 이 노래에서 교도소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 네모의 창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쇼생크의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오늘과 내일이 똑같은 지겨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쇼생크라는 테두리 안에서 먹으라면 먹고, 자라면 자고,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고, 일하라 그러면 일하고, 쉬라 그러면 쉬는 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다. 좋아하는 취미나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따위는 중요치 않다. 단지 하라는 것만 하고 하지 말라는 것만 하지 않을 뿐이다. 아직 교도소에서의 삶이 익숙치 못한 신참 수감자들은 점점 바깥 세상에서의 삶의 내용을 잃어가고 다른 수감자들과 다를 바 없는 네모난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다. 과거에 들판에서 하모니카를 멋드러지게 불어쟀꼈던 추억, 아내와 피크닉을 다닌 추억 등은 말그대로 다시는 겪어볼 수 없는 추억이 되어버릴 뿐 교도소를 들어오기 이전의 삶은 맥주 거품처럼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삶에서 동떨어진다.

하지만 이전의 삶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길들어짐'이다. 쇼생크에 의해 보호받고 감시받으면서 수감자들은 감옥 생활에 길들여진다. 40년 만에 교도소에서 출옥한 '레드'가 '40년 동안 허락을 맡고 화장실을 다녔다. 이제는 누가 허락해주지 않으면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다.'라고 말한데서 길들여진 삶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쇼생크의 한 늙은 수감자는 석방을 두려워했다. 교도소 담장 너머로의 자유롭기만한 새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오히려 교도소 밖으로의 발걸음을 무서워했다. 수 십 년간 굳어지고 단단해진 그의 쇼생크에서의 생활은 쇼생크 밖의 자유로운 새 삶을 살기엔 너무도 벅찼다. 그가 감옥에서 나와 겪게 되는 세상은 그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세상에 비해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런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또 그를 돕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에게 벅찬 자유는 이미 쇼생크에 길들여진 그에게 독이 되었고 그가 마지막으로 누렸던 자유는 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쇼생크에서의 삶을 살아왔다. 물론 지금까지의 삶을 죄수와 비교하는 것은 과하겠지만 나는 지금껏 부모님과 세상의 보호 아래 살아온 것은 분명하다. 아침 점심 저녁 밥상을 차려주면 밥을 먹었고, 그만 자라 그러면 누워서 잠을 잤다. 돈을 받아서 필요한 물건을 샀고, 공부하라 그러면 공부를 했고, 놀아도 좋다 그러면 그제서야 맘껏 놀았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것이라 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차례로 다녔다. 물론 대학생인 지금 사회에서는 법적으로 어른 대접을 받지만 지금의 어른은 허물과 형식치레에 불과하다.

하지만 몇 년 후 나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학교와 부모님이라는 보호 감옥 아래서 벗어나 하나부터 열까지 내 판단과 내 행동을 스스로 해야 한다. 더 이상 먹을 것을 주고 잠잘 곳을 마련해주고 해야할  일을 정해주고 보호해주는 존재는 없어질 것이다.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쇼생크 너머의 삶을 두려워했던 레드의 서글픈 눈망울처럼 나또한 아무런 보장이 없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그리고 사회로 내딜 첫 발걸음에 대해 두려워하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 초년생으로의 내딛음을 기다리고 있는 대학생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지는 무한 자유에 마냥 기뻐하지만은 못하고 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이 영화는 잠깐이나마 용기를 갖게 해준다. 갖가지 절망적인 고통도, 그리고 쇼생크 안에서 간수들로부터 여러가지 혜택을 누리며 안락한 수감생활에 안주할 수 있었던 타협의 순간도 모두 떨쳐버리고 자유로의 희망, 이 한 가지만으로 결국 '쇼생크탈출'을 이뤄낸 그의 해피엔딩은 어려운 상황, 고민 속에서도 한 가닥 막연한 기대와 희망섞인 여지를 가능하게 해준다.

'태평양이 내 꿈에서처럼 푸르르기를 희망한다.'

40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늙은이가 된 채 세상에 나온 레드가 새 삶이라는 희망찬 긴 여행을 시작하면서 한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좋았던 점이 주인공들의 주옥같은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였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영화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걱정스럽고 불안하기만 한 쇼생크 밖의 새로운 삶, 막연한 자유, 미래에 대해 저 한 마디면 족하다

  • skyplot* 2008.06.25 17:05 신고 # modify/delete reply

    쇼생크 탈출..
    수십번씩 보고도
    다시 보고싶다고 생각하는 영화들 중 하나이지요^^

아침부터 인터넷이 뜨거웠다. 모두들 최대 인파가 몰려들 것이라고 예상한 토요일 밤이 막 지난 때였다. 역시나 인터넷은 전날 밤의 뜨거웠던 집회 열기로 달구어져 있었다. 촛불집회 등으로 여론이 거세지자 현 정권도 다방면으로 국정쇄신책을 검토중이라는 속보도 끊임없이 보도되었다. 현 정부가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의 국정쇄신을 추진시킬지는 아직 의심의 여지가 많지만 일단은 들끓는 여론이 촛불집회를 통해 가시적으로 폭발한 덕분인지 정권이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버리고 한 발 물러선다는 것은 어쨋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일들은 여전하다. 더 이상 집회가 아니라 시위로 변모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어제 새벽에는 시위대가 청와대 진입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삼청동에서 청와대로 가려는 시위대와 이를 막는 경찰간의 충돌이 큰 이슈가 되었다. 시위대가 청와대로의 행진을 시작하자 경찰들은 버스로 길을 막고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물대포를 쏘고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과정에서 많은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인터넷에는 이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시위대의 사진들과 당시의 생생한 장면을 담은 동영상도 개진되어 있었다. 사진 속 광경은 매우 처참했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고, 동영상에서는 경찰의 무자비한 물대포를 맞는 시민들이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분했다. 아무런 힘 없는 학생들이 무기력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아팠다. 하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광경들을 본 누구라도 왠지 모를 슬픔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물론 무자비한 공권력에 짓밟힌 시위대의 처참함은 정말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집회가 시위가 되고, 이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는 것은 분명 우리가 경계해야 할 상황이다. 왜 촛불집회가 찬사를 받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촛불집회는 해외로부터도 호응을 얻을 만큼 평화적인 집회다. 촛불문화제라 불릴 만큼 집회 참가자들이 스스로 분위기를 즐기고 이어나가는 성격이 강하고, 갖가지 사회 현안에 대해 마음놓고 자신의 의견을 나누는 토론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시민들의 축제의 장인 촛불집회가 자꾸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촛불집회 그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흐름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현 정권인 이명박 정부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또 촛불집회 자체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직접 행동으로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는 집회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존경스럽다. 더불어 촛불집회를 강경 진압하고 해산하려 하는 경찰의 태도에도 많은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시위대가 청와대로의 진입을 시도했다는 것은 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그것도 한참을 넘어선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되면 인정하긴 싫지만, 평화스러운 촛불집회를 과격한 시위로 변질시키려는 불분명한 세력이 있다는 정부와 여당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청와대로 진입하려다 경찰에 의해 강압적인 진압을 당한 시위대들은 정권이 시대를 역행해 군사독재 시절로 돌아가려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 속 피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면 이 말이 그럴 듯 해보인다. 하지만 정작 시대를 역행해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은 청와대에 진입하고자 했던 그 시위대가 아닌가 싶다. 이승만 정권에 저항해 경무대 앞까지 들이닥쳐 이승만을 하야시켰던 50여 년 전과는 다르다. 그 당시와 현재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만큼 그 당시는 민주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너무나도 잘못된 정권이었고 지금은 그 후 몇 50여 년에 걸쳐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으로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화를 실현시킨 민주주의 정국이다. 청와대에 진입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급진적인 혁명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것인가. 순수하게 그들 말대로 대통령을 만나 대화를 나누겠다하더라도 이런식으로 물리력을 이용해 무작정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은 법과 질서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다.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또래가 힘들게 정착시켜온 민주주의의 법과 질서를 말이다.

청와대 앞에서 자행되었던 경찰의 강경 대응은 어찌보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어느 나라의 경찰이 현 정권 최고통치자의 집무실을 시위대가 저항 없이 진입하도록 놔두겠는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찰의 강경 대응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경찰은 경찰 나름데로 그들의 의무를 충실이 이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민주주의라지만 그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의 최소한의 시스템과 절차는 필수적인 것이다.

평화적이지만 규모있고 열정적인 집회를 통해 시민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의사를 표현한다. 그리고 정부는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을 수정하고 좀더 여론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갖추고, 국회는 시민들을 대변하여 그들을 위한 법안을 만들고 정부를 경계한다. 현재 진행 중인 촛불집회가 갖을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절대 급진적이고 과격한 변화와 혼돈은 필요치 않다. 현재 국가의 시스템에서 권력은 절대적으로 국민으로부터 발생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과 법, 질서 등을 무시하고 현재의 정국을 감정적이고 폭력적으로만 몰고가는 것은 분명 지양해야 할 것이다.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온 아줌마들, 아이를 목에 태운 아저씨들, 부모형제가 걱정되어 나온 중학생부터 대학생들까지. 기존의 시위와 다르게 이번 촛불집회가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다양한 계층의 참여, 그리고 그들끼리 즐기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문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인터넷상에서의 활발한 참여들은 더 이상 최루탄과 돌멩이로 대변되는 저항과는 색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누가 아닌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긍정적인 참여의 형태다. 도대체 촛불집회를 과격한 시위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누군지는 잘 몰라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분명 그들은 촛불집회에 의사를 표현하려 온 순수한 시민들을 과격한 시위의 현장으로 몰고 갈 것이 분명하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한 공권력과의 충돌을 이용하여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해 더욱 급진적이고 과격한 시위로의 양상을 꾀할 것이 분명하다.

'감정'에서 벗어나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감정적인 대응은 절대적으로 삼가야 한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응집되는 상황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또 그래야만 지금의 정권과 사람들에게 더욱더 설득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 이미 촛불시위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각 언론들은(물론 의도적으로 관심에서 배제시키는 보수 언론들도 존재하지만) 앞다투어 촛불집회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단순히 집회의 양상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집회의 특징과 배경, 그리고 시민들의 목소리 등을 원론적인 수준에서부터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부도 바짝 긴장해있다. 미군 여중생 장갑차 사건, 탄핵 정국 등 굵직굵직한 사건 등이 있었지만 이미 이번 촛불집회는 그 수준을 넘어섰다. 정부 또한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일부 운동권의 과격한 행동과 시민들에 대한 선동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번 촛불집회는 정권과 여당이 계속 지적하고 있는 불순세력데 대한 의심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좀더 효과적으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을 집회로부터 배제시키지 못한다면 무고한 시민들은 어제의 청와대 앞에서와 같이 과격한 시위의 현장으로 내몰릴 것이며 정부와 시민의 대립은 더욱더 감정적인 갈등의 양상으로 치다을 것이다.

이번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민주주의 축제의 장과 다름없다. 누구한테든 자랑스럽게 찬사받아야 마땅하다. 외환위기 때의 금모으기 운동, 월드컵 당시의 길거리 응원 등을 보며 이미 우리의 역동적인 시민들의 참여 의식을 실감해 왔던 외국 언론들은 이번에는 촛불집회로 높은 시민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우리의 국민들에게 또 한번 놀라고 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지금까지 시민들의 모습은 완벽했다. 이제 이 집회를 어떻게 끌고가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관철시키느냐 역시 시민들에게 달렸다. 보여주어야 한다. 이 시대의 시민들이 얼마나 성숙하고 민주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그 힘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쥬라기공원>에서 관객들은 난생 처음보는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에 감탄했다. 스크린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아넘치는 공룡들을 보며 관객들은 그저 신기해할 뿐이었고 이 영화는 괴수 영화의 새로운 한 획을 긋게 되었다. 그 후, <고질라>에서부터 <킹콩>, 우리나라에서는 <괴물>에서 <디워>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컴퓨터 그래픽(CG)로 무장한 괴수영화들이 연달아 개봉되었고 긍정적인 성과를 얻었다.하지만 <클로버필드>는 이런 기존의 괴수영화들과는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다른 괴수영화들보다 유난히 작품성이 높다는 것은 아니다. 시나리오나 작품성 등을 떠나서 단지 이 영화는 다른 괴수영화와는 확실히 특이했다. 영화는 철저히 1인칭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영화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들고 다니던 캠코더 렌즈의 시각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약 10년 전 <블레어위치>란 영화가 처음 시도했던 캠코더 1인칭 시점 화면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1인칭 시점 화면과 괴수란 아이템의 절묘한 만남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로스트>,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인기 '미드'다. 한 장면, 장면이 긴박한 빠른 전개와 흥미로운 시나리오 구조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드라마에서 제작진이 자주 사용했던 흥미 요소가 바로 보이지 않는 '공포'였다. 등장인물들은 분명 누군가에게 공격당하고 쫓겨다녔지만 드라마에서는 그 공격자들의 정체를 절대 시청자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았고 그런 보이지 않는 적에게 우리는 더욱 긴장해야만 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에서의 괴물은 다른 괴수영화와는 달리 철저히 가려졌다. 빌딩에서 빌딩 사이로 몸을 숨기거나 캠코더의 렌즈 시야에서 벗어나면서 절대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괴물이 어떠한 생김새였는지 확신이 안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괴물의 숨바꼭질은 관객들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관객들은 단 몇 초씩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괴물에 대해 일말의 갈증을 느끼고, 때로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물 때문에 꼴딱꼴딱 침을 삼켰다.

등장인물이 캠코더를 들고 폐허가 된 거리를 뛸 때 내는 긴박한 숨소리는 마치 내 숨소리 같았고, 조그마한 괴물들이 등장인물들에게 덤빌때는 마치 내가 공격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캠코더를 들고 있는 등장인물이 마치 나처럼 느껴지는 생생함. 이것 또한 1인칭 시점이었기에 가능했다. 괴물이 캠코더를 향해 덤벼들때마다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질끈 거려야 했다. 대신 영화 속 인물이 무자비할 정도로 캠코더를 흔들어댄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어지러움을 참아야 했다. 우리야 스크린 한 쪽에 쓰여진 자막을 읽느라 잠깐씩이라도 눈을 고정시킬 수 있었지만 쉴틈없이 스크린만을 응시해야 했던 미국인들은 우리보다 몇 배 어지러움을 느꼈을텐데 그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잘 버텼나 궁금하다.

사실 영화 속 인물 또한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관객들과 별다를 바 없는 일개의 시민이기에 괴물이 나타났을 경우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설정이 가장 사실적인 시나리오일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는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괴물과 맞딱드리도록 하기 위해 얼렁뚱땅 사랑을 사용한다. 형을 잃고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숴진 건물의 꼭대기로 올라간다는 설득력없는 설정은 이 영화의 깊은 약점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1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계속 이끌어가기에 불가피했던 제작자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괴수란 아이템과 1인칭 시점의 절묘한 결합은 이 빈약한 내용 전개를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성공의 열쇠로 꼽히는 것이 바로 차별화다. 괴수영화도 더이상 이런 차별화의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나보다. 괴수영화에 한강찬가만큼이나 난데없는 휴머니즘을 결합시킨 영화가 큰 호응을 얻었고, 어제 봤던 영화에서는 캠코더인지 영화인지 구분이 안가는 1인칭 시점으로 등장인물과 관객을 혼연일치시켜버렸다.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하던 도중, 갑자기 심형래 감독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얼마나 정교하고 실제감있는 컴퓨터 그래픽을 구현해냈느냐는 더이상 괴수영화의 경쟁력이 아니다. 그저 기본 옵션일 뿐이다. 이제 괴수영화 제작자들은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만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평가받으려는 어리석은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나아가 컴퓨터 그래픽에 자신의 영화만의 독특한 어떤 것을 가미시키려 끊임없는 실험을 하고 있다. 과연 심 감독이 영화 <클로버필드>를 보고 어떠한 생각을 할 지 정말 궁금하다.

  • 천재님^0^ 2008.01.27 01:43 # modify/delete reply

    저는 영화 보는 내내 심형래가 떠올랐어요
    저는 1인칭 촬영기법을 한 점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요
    다들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 후반부가 별로다, 이게 뭐냐 이러쿵 저러쿵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요즘 할리우드에서 이런 류의 영화가 많이 개봉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911테러에서 비롯된 발상이더군요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달리 괴물이 어떻게 나타나고 무슨 일을 하는 지에 대해 알려주기 보다는 관객 조차 알지 못하는 아니, 당하는 피해자인 주인공들 조차 알지 못하는 말 그대로 "모르는 것"에게서 무방비적으로 당하는 것이 911테러 이후 급격히 는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래요

    911 테러 당시 갑작스레 누군지도 모르는 적에게서 무슨 이유인 지도 모르고 받은 공격에 너무나도 큰 신체, 정신적 충격을 받은 미국인들의 무의식을 자극하여 그에서 공포를 느끼게끔 하려고 이러한 소재, 형식의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공포 영화에서 공포는 바로 익숙한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라고 보는 것이기에 사막, 아마존과 같이 독특한 배경적 상황을 제시하지 않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갑작스레 괴수에게서 공격을 받는 것으로 설정 한 것 같아요


    다른 영화들과 달리 철저히 1인칭 관점을 함으로서 관객이 그 시점에 몰입하여 실재감을 더욱 느낄 수 있게 하여 그로부터 공포감을 더욱 가증시켰다는 점에서 저는 이 촬영 방식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답니다.




    크크 그런데
    저는 아직까지도 괴수의 정체를 몰라요
    겁이 많아서 자막만 봤어요.... 괴물이랑 그 이상한 소리내는 작은 것들 나올 때는 ㅠㅠ
    그리고.........영화 본 날에는 잠을 못 잤죠...
    새벽 6시까지........................

하루종일 지겹도록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던 어제, 문과대 체육대회 축구 준결승전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전날 밤잠을 설쳐가며 설레여 하고 기대했을 경기였지만, 몇 번의 허무했던 경기 취소와 찌뿌둥하기만 한 날씨로 사실 축구 대회에 대한 열정 따위는 식을대로 식어있었다. 수중전. 보는 사람들이야 시원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비가 내리고 빗물이 고여있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일이란 평소 축구를 할 때보다 두 세 배는 더 힘이 든다.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비는 자꾸 눈에 들어가서 시야를 방해하거나 눈가를 간지럽히고, 흠뻑 젖은 유니폼과 타이즈, 축구화는 물만 먹고 점점 무거워진다. 공도 물을 먹고 무거워지고 땅은 듬성듬성 물로 고여있어 뛰어다니기에도 불편해진다. 이렇게 힘든건 비단 우리 뿐만 아니었다. 상대팀이었던 사회복지학과 팀도 우리처럼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두 팀 모두 패스면 패스, 드리블이면 드리블 하나 같이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한명 두명 상대와의 몸싸움에 넘어지면서 설상가상 감정까지 격해졌다. 이쯤되면 선수들끼리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기 쉽상이다. 어제 역시, 경기 도중 각 팀 선수들끼리 시비가 붙어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었다. 서로 말을 놓고 심지어 욕설까지 내뱉으며 대치하는 양 팀 선수들. 이들을 말리는 같은 편의 팀 동료들. 상대 팀에게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자며 어깨나 등을 토닥이는 선수들. 분을 못삭히며 팀 동료에게 붙잡혀 있는 선수들. 이들 사이에서는 정말 만감이 교차한다. 승부라는 것이 정말 냉철하다. 마음의 여유 따위는 절대 없다. 평소 같으면 넘어진 상대팀 선수에게 괜찮냐고 다친 곳이 없냐고 물으며 서로 웃음으로 넘겨버릴테지만 냉혹한 승부에서는 상대팀 선수에 대한 배려 따위는 발 붙일 곳이 없다. 그저 힐끗 쳐다보고는 쏜살같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수 밖에. 물론 이에 대한 재책감을 갖을 이유도 없다. 단지 내가 넘어졌을 때 상대팀 선수도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할거라는 이유로. 우리 팀이 골을 넣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우리는 모두 열광하고 서로 얼싸안는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이 하늘로 치켜 올려지고 뱃 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함성이 내뱉어진다. 불과 몇 초 전의 찌뿌리고 힘겨운 표정은 어디로 간채 모두들 서로서로 웃는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바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선수들이 하나 둘 고개를 떨군다. 때로는 좀 전 자신의 움직임에 대한 죄책감으로, 때로는 서로에 대한 말 못할 원망감으로, 정말이지 '절망'이란 단어가 이 때 만큼 뼈저리게 와닿는 때가 없을 정도로 온몸이 푹 꺼진다.

경기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서로 줄을 서서 마주보고 악수를 나눌 때, 방금 전까지의 치열했던 순간은 사라지고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서로를 격려한다. 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웃음을 지어주며 악수를 해주던 사회복지학과 선수들이 고맙게 까지 느껴졌다. 물론 이 고마움 또한 승자의 여유겠지만. 어느 한 쪽은 승리라는 기쁨에 도취되어 웃음과 환호가 만발하는 반면, 그 한 쪽 만큼 다른 한 쪽은 패배라는 절망에 분을 삭이고 마음 속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낸다. 승자와 패자. 어찌보면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것처럼 슬프고 침울한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만, 모두들 이 침울함을 되내이기보다는 어떻게든지 승자가 되려 치열하게 뛰고 죽을듯이 달린다. 하긴, 어떻게 보면 치열하게 달리는 길만이 이 침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겠지만 말이다. 또 한 고비를 힘겹게 넘어섰다. 지금까지 두 번의 경기를 어찌되었건 이기게 되었지만, 승자와 패자로 정확히 양분되는 50%의 게임에서, 다음 번에도 반드시 승자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고비'라는 표현이 어제의 승자가 된 기분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