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사회는 이분법의 세상이었다. 나와 타자, 개인과 사회로 양분되는 세상 속에서 타자(사회)는 나(개인)를 억압해왔다. 봉건귀족이 농민들을, 제국주의가 원주민들을, 파쇼세력이 자유민들을, 자본가가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했다. 사회, 정확히 말해서는 외부의 지배세력이 개인을 통제하고 착취했던 것이다. 따라서 개인은 외부의 적을 상정할 수밖에 없었다.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려면 외부의 지배세력을 무너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봉건왕정, 일본제국주의, 군부독재정권으로 대물림되었던 지배세력은 쉼 없이 한국의 개인을 억압해왔다. 그리고 개인은 그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고 결국 그들을 끌어내렸다. (‘완전하게 끌어내렸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지만, 일단 피상적인 상황만을 놓고 봤을 경우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어쨌든 근대의 개인은 그렇게 성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를 성취했다. 자신을 억압해오던 거대한 외부의 존재로부터 억압받았던 자유, 빼앗겨있었던 자유를 되찾아 온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동안 개인은 외부의 존재, 즉 타자를 통해 성장했던 것이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경계에 있는 어떤 타자를 상정하고 그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자신을 확장시켜왔다.

그런데 지금은 외부의 존재가 사라졌다. 자유를 뺏고 억압해오던 거대한 외부의 적은 이제 없다. 과거의 투쟁적인 삶은 자취를 감췄고, 단지 소비하는 현대인의 삶만 있을 뿐이다. 한병철의 말대로 외부의 지배기구로부터 통제를 받아오던 ‘규율사회’는 사라지고 개인 스스로를 착취로 몰아가는 ‘성과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개인을 억압하는 건 외부의 지배세력이 아니다. 개인을 억압하는 건 성과를 향한 그 자신의 욕망과 이상이 되었다. 더 이상 외부의 대상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방법으로는 억압과 착취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을 강제하고 규율하던 외부의 대상은 이제 없기 때문이다. 문제라는 건 이제 사회나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오롯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문제’라는 건 오로지 타인에게만 존재한다. 독재정권, 지배세력에 저항해왔던 과거의 사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적으로 상정할 실체가 사라지자 이를 대신하는 가상의 적을 설정하고 이들을 공격하기 바쁘다.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가상의 적을 설정하다보니 보수든 진보든 서로의 타겟은 극단주의적 사상에 맞춰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진보라 불리는 지식인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자아성찰적인 태도를 상실했다. 아니, 상실했다는 말은 옳지 않다. 상실은 가졌던 것을 잃었을 때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아성찰적인 태도를 가진 적이 없다. 원인을 항상 외부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외부의 상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가상의 적을 설정하고 모든 책임을 그것에 돌릴 뿐이다. 과오는 외부로 돌리고 스스로 완전무결의 상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에 매몰된 셈이다. 불행하게도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자기발전을 할 수가 없다. 이들은 외부로 확장되는 게 아니라 내부로 축소될 뿐이기 때문이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에서 마지막 단계는 자아실현의 단계를 말한다. 그 이전 단계들, 3번째의 사회적 욕구, 4번째의 자아존중의 욕구 단계에서 필요한 건 타자의 존재다. 타자의 인정과 존중을 받을 때 이 욕구가 충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타자만을 필요로 한다면 최종적인 단계인 자아실현의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나르시시즘적인 태도를 버리고 진정 ‘나’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지막 단계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나’를 문제 삼는 것이다. 스스로 반성하고 자각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 문제는 더 이상 사회에, 외부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자아성찰을 갖춰야만 비로소 외부로의 확장 가능성이 열린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장이란 바로 이런 걸 말한다.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열린 주체가 되는 것, 단순한 반작용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세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세대. 지금의 2030세대를 규정하는 언어다. 태어났을 때부터 윤택하고 편안한 삶이 주어졌고, 큰 고난을 겪지도 않았다. 일제나 분단전쟁을 겪은 것도 아니고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던 것도 아니고 산업역군으로 쉼 없이 산업화에 이바지한 것도 아니고 IMF로 휘청거려본 적도 없는 세대. 아무런 구김 없이 매끈하게 빠진 삶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세대. 기성세대는 2030세대를 그렇게 바라본다. 그래서 그들이 뭔가를 하려 하면 불안해 한다. 마치 멀리 보낸 아이들을 걱정스러워하는 부모들처럼.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고난은 사람을 성장시켜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성장한다. 많은 고난을 겪었다는 건 그만큼 많은 것을 이겨내고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상처라는 건 아물 수는 있어도 완벽하게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남게 된다. 마찬가지로 고난은 극복할 수 있어도 그 아픔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한국 사회는 트라우마로 점철된 상태다. 분단전쟁을 겪은 노인세대들은 아직도 빨갱이의 '빨'자만 들어도 부들부들 거린다. 이들에게 한국은 항상 위기의 상황이다. 언제라도 적화통일이 될지 모른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주축이었던 486세대도 마찬가지다. 독재정치가 막을 내리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이들은 여전히 한국사회를 이분법적 잣대로 갈라놓기 바쁘다. 그들이 갖고 있는 구세력으로부터의 피해의식과 선민의식 때문이다.

반면 고생을 모르고 자란 세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지금의 세대는 이런 트라우마로부터 누구보다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 이들은 태어나서부터 30대가 될 때까지 큰 부침 없이 자란 세대다. 윗세대들이 겪었던 전쟁, 저항운동처럼 세대를 아우르는 아픔이나 상처를 겪은 바가 없다. 물론 신자유주의로 인해 과거에는 없었던 과잉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환경적 변화일 뿐이며 이것을 전쟁처럼 특정한 세대적 상처, 트라우마로 이야기하긴 힘들다.

어떤 사람이건 무난한 환경 속에서 무난하게 자란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부모님께 이성친구를 소개해줬을 때 부모님이 그의 집안환경부터 묻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무난한 환경에서 무난하게 자라왔을 수록 모가 난 성격 없이 무난한 사람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대가 과거의 어떤 세대보다 더 자유롭고 건강하고 공정한 세대일 가능성이 큰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얽매이기 쉬운 과거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편견이 없다는 건 중요한 부분인데, 그만큼 특정한 담론을 거부할 수 있고 각자의 가치판단에 대해 고민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는 윗세대들이 갖지 못했던 생각의 유연성, 여유 같은 게 있다.

꼭 분단전쟁을 겪어야만 북한의 무서움을 알고 애국심을 갖는 건 아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 직후 모두가 충격에 빠졌을 때 오히려 해병대에 입대하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지원자들을 냈던 건 2030세대다. 마찬가지로 일제를 직접 겪어야만 주권침해의 무서움을 아는 것도 아니다. 일본이 무역시비를 걸어오자 일본산 제품을 브랜드별로 정리해서 불매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도 지금의 2030세대다. 기성세대가 과거사로 소모전을 벌이고 있을 때 2030세대는 그들의 역사관을 조용히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는 불매운동을 어느 수준까지 권장할 수 있느냐에 대해 열띤 내부 토론을 벌인다. 그들에게는 자기성찰을 가능케 하는 유연한 사고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트라우마는 대물림 되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말 그대로 정신적 외상이다. 따라서 세대 간에 기억을 공유한다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트라우마는 다르다. 트라우마를 겪은 세대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 트라우마는 사회에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건 고스란히 다음 세대의 몫이 된다. 그런 점에서 기성세대는 2030세대에 빚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는 여전히 2030세대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많이 해봤는데 말이야~’, ‘고생을 안 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고난의 경험들, 그 이면의 트라우마들은 고스란히 2030세대가 짊어져야 할 짐으로 남는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동북아 국가들, 중국, 일본, 한국, 대만은 손꼽히는 경제대국이다. 그만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도 높고 영향력도 크다. 1인당 GDP 같은 경제수준 또한 서구국가들 못지않다. 하지만 정치수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처져 있다. 한국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군부독재정권이 집권했었고, 일본도 보수족벌이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장기집권을 유지하고 있다. 대만은 아직까지도 친중/반중으로 나뉘어 소모적인 다툼만 벌이고 있으며, 중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따금 영재가 튀어나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경우가 있다. 다섯 살 정도의 꼬마지만 전공자들도 어려워하는 수학이나 물리학 문제들을 술술 풀어가면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보통 이런 영재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카이스트 같은 일류대학에 특별입학한다. 하지만 이런 영재들일수록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평범한 수준의 생활마저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에서 바로 대학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의 과정을 차례로 거치면서 특정시기에만 터득할 수 있는 단계들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간의 부러움을 샀던 영재들이 정작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마저 놓치고 불운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한 사회, 국가의 발전 속도가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부단히 노력하면 일정한 경제적 성과를 얻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영재가 유치원에서 바로 대학교를 간 것처럼 한국도 최빈국에서 비교적 단시간에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경제수준이 높아졌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나 의식수준의 향상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단계를 밟아야 하는 영재처럼, 사회라는 것도 물질적 풍요만큼 의식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북아 국가들의 정치수준이 경제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 또한 그들이 (일본을 제외하면) 비교적 단기간에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던 만큼 정치, 문화, 시민의식이 성숙하는 데 있어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바가 크다.

또한 동북아가 서구나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집단주의적 성향을 많이 보인다는 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앞서 말한 속도의 문제와도 연관된 이야기다. 동북아, 서구를 비롯한 요즘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체제는 민주공화정이다. 그런데 민주공화정이라는 건 개인주의, 다원주의가 근간이 돼야 한다. 하지만 동북아 사회는 여전히 집단주의, 공동체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민주공화정이라는 형식은 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이를 운용하는 내용물은 형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일종의 과도기적인 단계다. 그동안 어떤 집단 속에 소속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를 찾던 사람들이 사회적인 개인화, 원자화 현상이 두드러지자 일종의 아노미상태를 겪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동북아의 정치세력은 이런 혼돈기의 개인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판단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노미 같은 공백상태를 자신의 이익에 따라 세뇌하고 이용하기만 했을 뿐이다.

발전의 속도에 대한 문제든, 집단주의라는 성향상의 문제든, 중요한 건 개인의 차원에서부터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국가나 사회 아니면 집단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건 또 다른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어떤 정당이 아무리 삽질을 해도 어떤 지역에서는 콘크리트 지지율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일본에서 아베가 아무리 헛짓거리를 해도 과반 이상의 지지를 얻는 것도 그렇고, 모두 개인의 의식적 고민이 부재해서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동북아의 선진 정치체제는 자구적으로 제도화했다기보다 서구의 개발품을 한순간 차용한 것에 가깝다. 따라서 이에 부합한 정치의식, 시민성을 다듬어가기엔 너무 짧은 시간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개인이 비판적 의식을 갖추고 성숙한 시민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변화를 정치적 수준으로까지 쌓아올려야 한다는 것, 그게 주어진 과제라는 점이다.

경제학에는 순환구조라는 게 있다. 소비와 투자가 늘면 고용과 생산이 늘고 다시 소비와 투자를 촉진시키는 선순환의 고리가 있고, 소비가 줄면 투자도 줄고 고용과 생산도 줄면서 다시 소비를 저해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있다. 말 그대로 전자는 순환할수록 남는 게 생기는 호황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순환할수록 잃어가기만 하는 불황을 의미한다.

사람의 관계에도 똑같은 순환구조가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소통과 상호작용이 오갈수록 신뢰가 쌓이고 친밀해지는 관계가 있고, 반대로 상호작용을 거듭할수록 불신과 불만이 쌓이는 관계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전자를 선순환의 관계, 후자를 악순환의 관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서로를 신뢰하고 아끼는 사람들은 선순환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심리적으로 서로 내가 주는 것보다 상대에게 받는 게 더 많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장 내가 주는 게 더 많아도, 그러니까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전혀 서운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크게 보면 내가 받아왔던 게 더 많기 때문에 당장의 손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서로 더 잘할 수밖에 없고 상호간의 신뢰는 더 돈독해질 수밖에 없다. 관계의 선순환 고리가 생기는 것이다.

반대로 심리적으로 서로 내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많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악순환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호작용이 있을수록 내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불신과 원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 내가 손해를 본 게 아니어도 관계없다.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 심리적 상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의 관계에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어떤 큰 계기가 있지 않는 이상 회복하기가 힘들다.

사람이 만났을 때 선순환의 관계를 가질 것인지 악순환의 관계에 놓일 것인지는 랜덤박스와 같다. 직접 상호작용을 하고 관계를 갖지 않는 이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 제 짝이 있다는 말처럼 누구와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도 또 누군가와는 무리 없이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각각의 개인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선순환이나 악순환의 관계를 가질 확률이 50대 50인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선순환의 관계를 가질 확률이 훨씬 높은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악순환의 관계를 가질 확률이 높기도 하다. 예를 들어, 누구에게나 수더분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든 선순환의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에 갇혀있는 사람은 아무리 무난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자칫 악순환의 관계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후자의 사람들인데, 이들은 실제로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악순환의 관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악순환이란 개념처럼 항상 다른 이들로부터 피해를 입고 손해를 입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항상 타인에 의해 고통 받아야 하는지’ 비루한 자기 연민에만 빠질 뿐, 정작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둔하고 무감각한 자세를 취한다.

중요한 건 선순환으로의 지향이다. 내가 상대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일단은 상대가 바라는 대로 기대하는 대로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은 그 노력이 상대에게도 느껴지고 상대(정상적인 범주의 사람이라면) 또한 마찬가지의 자세를 가지려 할 것이다. 그렇게 선순환의 고리가 한 바퀴라도 굴러가면 그 후는 전혀 걱정할 게 없다. 관성이라는 불변의 법칙이 알아서 순환을 지속시켜주기 때문이다.

비판적 시각이라는 건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이게 맞는 건가?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 같은 대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 밀즈는 이런 능력을 ‘사회학적 상상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한국 사회는 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하에 근대화란 일념 하나로 뭉쳐있던 사회에서 비판론, 회의론 같은 건 불필요한 걸림돌에 불과했다. 방향과 목표를 콕 집어서 한시라도 빠르게 달려가야 하는 판국에 갑자기 멈춰 서서 ‘이 방향이 맞나?’, ‘다른 방향은 없을까?’ 고민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거룩한 민족적 대업을 방해하는 일에 불과했다. 사회는 이런 이들을 빨갱이, 간첩(혹은 좌파)이라 부르며 중심으로부터 점점 몰아냈다.

그로부터 많은 과정과 시간이 지났지만, 비판이나 회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내재되어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화되고 대물림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선생님은 물론 주변 친구들마저 그런 학생을 이상하게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직장 회의시간에서도 이견을 내길 주저하고, 동료들과 점심 메뉴를 정할 때도 눈치 때문에 메뉴를 통일할 때가 많다. 우리에겐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왜냐면, 모두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 같은 외부의 시선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외국인들은 한국사회가 집단주의적이고 획일화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한국사회는 너무 개인화, 원자화 되어가고 있다고. 그래서 무관심, 이기심만이 팽배하고 있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국사회는 더 개인화되고 더 원자화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개인의 비판적 의식이 자라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서구로부터 민주주의, 공화주의라는 절차적 형식들만을 도입했을 뿐이다. 아직 그 형식을 채우고 있는 내용은 영글지 못한 상태다. 아직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이 잔존해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한국사회가 비판론, 회의론이란 말을 부정론, 비관론이란 말과 동일어로 생각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관론자의 결론은 자살이다. 무엇이든 비관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면 뒤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결국 사라지는 것, 자살뿐이다. 하지만 회의론자의 결론은 자살이 아니다. 회의론이라는 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가 없다.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회의한다는 건 의심하는 것이다. ‘진짜’를 찾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비판을 하고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건 사회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더 나은 선택, 더 좋은 방향을 찾기 위해 고민을 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