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즈음 팽목항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대통령을 만나야겠다며 청와대로 가려는 길을 경찰이 막아서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유가족들이 내키는 대로 대통령을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제지당한 곳은 삼청동이나 효자동이 아니라 팽목항 근처의 도로변에서였다. 아무리 경찰이라도 서울로부터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진도에서부터 그들을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건 아니다. 설령 내가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헛소리를 하더라도 청와대 입구에서 저지 당할 수는 있을망정 경찰들이 우리집 대문을 막고 서있을 순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매매에 순기능 같은 건 없다. 성매매가 일부 남성들(장애인이나 여타 여성을 만나지 못하는 이들)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건 터무니없는 핑계일 뿐이다. 성욕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할 당위를 가진 무엇이 아니다. 그건 성적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남성중심적인 편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성매매 없이도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가는 모태솔로남들도 많다. 인간이 포유류 특유의 공격성이나 야성적 본능을 갖고 있다고 해서 타인에 대한 폭력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듯이, 성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성매매나 성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거다. 성매매는 필요악이 아니다. 그냥 악일 뿐.

가난을 증명하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일까.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위 복지론자들 입에서 나온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그건 복지를 적선 따위로 여기는 말이기 때문이다. 빈곤을 부끄럽게 여기는 건 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하지만 복지를 말하는 사람은 빈곤을 부끄러운 걸로 여겨서는 안 된다. 복지가 필요한 건 무능하고 게으른 빈자들을 구제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빈곤은 구조적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으로서 복지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빈곤은 죄가 아니다. 아니, 죄가 아니어야 한다.

사실 다수결의 원리라는 건 여럿이서 무엇을 결정하고자 할 때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에 불과한 것이지, 그 과정이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다수결의 방식은 자주 쓰이는데, 점심 메뉴를 고를 때 처럼 선택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나 그 선택을 책임질 사람이 없을 때 주로 쓰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다수결은 비겁한 수단이기도 하다. 선택의 결과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수결의 원리는 민주적 절차를 보장해주는 불가결한 가치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맹신하거나 남발하는 건 절대 이롭지 못하다.

영화 '헤드윅'의 'the origin of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