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라기공원>에서 관객들은 난생 처음보는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에 감탄했다. 스크린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아넘치는 공룡들을 보며 관객들은 그저 신기해할 뿐이었고 이 영화는 괴수 영화의 새로운 한 획을 긋게 되었다. 그 후, <고질라>에서부터 <킹콩>, 우리나라에서는 <괴물>에서 <디워>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컴퓨터 그래픽(CG)로 무장한 괴수영화들이 연달아 개봉되었고 긍정적인 성과를 얻었다.하지만 <클로버필드>는 이런 기존의 괴수영화들과는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다른 괴수영화들보다 유난히 작품성이 높다는 것은 아니다. 시나리오나 작품성 등을 떠나서 단지 이 영화는 다른 괴수영화와는 확실히 특이했다. 영화는 철저히 1인칭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영화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들고 다니던 캠코더 렌즈의 시각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약 10년 전 <블레어위치>란 영화가 처음 시도했던 캠코더 1인칭 시점 화면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1인칭 시점 화면과 괴수란 아이템의 절묘한 만남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로스트>,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인기 '미드'다. 한 장면, 장면이 긴박한 빠른 전개와 흥미로운 시나리오 구조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드라마에서 제작진이 자주 사용했던 흥미 요소가 바로 보이지 않는 '공포'였다. 등장인물들은 분명 누군가에게 공격당하고 쫓겨다녔지만 드라마에서는 그 공격자들의 정체를 절대 시청자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았고 그런 보이지 않는 적에게 우리는 더욱 긴장해야만 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에서의 괴물은 다른 괴수영화와는 달리 철저히 가려졌다. 빌딩에서 빌딩 사이로 몸을 숨기거나 캠코더의 렌즈 시야에서 벗어나면서 절대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괴물이 어떠한 생김새였는지 확신이 안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괴물의 숨바꼭질은 관객들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관객들은 단 몇 초씩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괴물에 대해 일말의 갈증을 느끼고, 때로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물 때문에 꼴딱꼴딱 침을 삼켰다.

등장인물이 캠코더를 들고 폐허가 된 거리를 뛸 때 내는 긴박한 숨소리는 마치 내 숨소리 같았고, 조그마한 괴물들이 등장인물들에게 덤빌때는 마치 내가 공격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캠코더를 들고 있는 등장인물이 마치 나처럼 느껴지는 생생함. 이것 또한 1인칭 시점이었기에 가능했다. 괴물이 캠코더를 향해 덤벼들때마다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질끈 거려야 했다. 대신 영화 속 인물이 무자비할 정도로 캠코더를 흔들어댄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어지러움을 참아야 했다. 우리야 스크린 한 쪽에 쓰여진 자막을 읽느라 잠깐씩이라도 눈을 고정시킬 수 있었지만 쉴틈없이 스크린만을 응시해야 했던 미국인들은 우리보다 몇 배 어지러움을 느꼈을텐데 그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잘 버텼나 궁금하다.

사실 영화 속 인물 또한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관객들과 별다를 바 없는 일개의 시민이기에 괴물이 나타났을 경우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설정이 가장 사실적인 시나리오일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는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괴물과 맞딱드리도록 하기 위해 얼렁뚱땅 사랑을 사용한다. 형을 잃고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숴진 건물의 꼭대기로 올라간다는 설득력없는 설정은 이 영화의 깊은 약점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1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계속 이끌어가기에 불가피했던 제작자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괴수란 아이템과 1인칭 시점의 절묘한 결합은 이 빈약한 내용 전개를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성공의 열쇠로 꼽히는 것이 바로 차별화다. 괴수영화도 더이상 이런 차별화의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나보다. 괴수영화에 한강찬가만큼이나 난데없는 휴머니즘을 결합시킨 영화가 큰 호응을 얻었고, 어제 봤던 영화에서는 캠코더인지 영화인지 구분이 안가는 1인칭 시점으로 등장인물과 관객을 혼연일치시켜버렸다.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하던 도중, 갑자기 심형래 감독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얼마나 정교하고 실제감있는 컴퓨터 그래픽을 구현해냈느냐는 더이상 괴수영화의 경쟁력이 아니다. 그저 기본 옵션일 뿐이다. 이제 괴수영화 제작자들은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만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평가받으려는 어리석은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나아가 컴퓨터 그래픽에 자신의 영화만의 독특한 어떤 것을 가미시키려 끊임없는 실험을 하고 있다. 과연 심 감독이 영화 <클로버필드>를 보고 어떠한 생각을 할 지 정말 궁금하다.

하루종일 지겹도록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던 어제, 문과대 체육대회 축구 준결승전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전날 밤잠을 설쳐가며 설레여 하고 기대했을 경기였지만, 몇 번의 허무했던 경기 취소와 찌뿌둥하기만 한 날씨로 사실 축구 대회에 대한 열정 따위는 식을대로 식어있었다. 수중전. 보는 사람들이야 시원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비가 내리고 빗물이 고여있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일이란 평소 축구를 할 때보다 두 세 배는 더 힘이 든다.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비는 자꾸 눈에 들어가서 시야를 방해하거나 눈가를 간지럽히고, 흠뻑 젖은 유니폼과 타이즈, 축구화는 물만 먹고 점점 무거워진다. 공도 물을 먹고 무거워지고 땅은 듬성듬성 물로 고여있어 뛰어다니기에도 불편해진다. 이렇게 힘든건 비단 우리 뿐만 아니었다. 상대팀이었던 사회복지학과 팀도 우리처럼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두 팀 모두 패스면 패스, 드리블이면 드리블 하나 같이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한명 두명 상대와의 몸싸움에 넘어지면서 설상가상 감정까지 격해졌다. 이쯤되면 선수들끼리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기 쉽상이다. 어제 역시, 경기 도중 각 팀 선수들끼리 시비가 붙어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었다. 서로 말을 놓고 심지어 욕설까지 내뱉으며 대치하는 양 팀 선수들. 이들을 말리는 같은 편의 팀 동료들. 상대 팀에게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자며 어깨나 등을 토닥이는 선수들. 분을 못삭히며 팀 동료에게 붙잡혀 있는 선수들. 이들 사이에서는 정말 만감이 교차한다. 승부라는 것이 정말 냉철하다. 마음의 여유 따위는 절대 없다. 평소 같으면 넘어진 상대팀 선수에게 괜찮냐고 다친 곳이 없냐고 물으며 서로 웃음으로 넘겨버릴테지만 냉혹한 승부에서는 상대팀 선수에 대한 배려 따위는 발 붙일 곳이 없다. 그저 힐끗 쳐다보고는 쏜살같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수 밖에. 물론 이에 대한 재책감을 갖을 이유도 없다. 단지 내가 넘어졌을 때 상대팀 선수도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할거라는 이유로. 우리 팀이 골을 넣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우리는 모두 열광하고 서로 얼싸안는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이 하늘로 치켜 올려지고 뱃 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함성이 내뱉어진다. 불과 몇 초 전의 찌뿌리고 힘겨운 표정은 어디로 간채 모두들 서로서로 웃는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바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선수들이 하나 둘 고개를 떨군다. 때로는 좀 전 자신의 움직임에 대한 죄책감으로, 때로는 서로에 대한 말 못할 원망감으로, 정말이지 '절망'이란 단어가 이 때 만큼 뼈저리게 와닿는 때가 없을 정도로 온몸이 푹 꺼진다.

경기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서로 줄을 서서 마주보고 악수를 나눌 때, 방금 전까지의 치열했던 순간은 사라지고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서로를 격려한다. 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웃음을 지어주며 악수를 해주던 사회복지학과 선수들이 고맙게 까지 느껴졌다. 물론 이 고마움 또한 승자의 여유겠지만. 어느 한 쪽은 승리라는 기쁨에 도취되어 웃음과 환호가 만발하는 반면, 그 한 쪽 만큼 다른 한 쪽은 패배라는 절망에 분을 삭이고 마음 속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낸다. 승자와 패자. 어찌보면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것처럼 슬프고 침울한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만, 모두들 이 침울함을 되내이기보다는 어떻게든지 승자가 되려 치열하게 뛰고 죽을듯이 달린다. 하긴, 어떻게 보면 치열하게 달리는 길만이 이 침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겠지만 말이다. 또 한 고비를 힘겹게 넘어섰다. 지금까지 두 번의 경기를 어찌되었건 이기게 되었지만, 승자와 패자로 정확히 양분되는 50%의 게임에서, 다음 번에도 반드시 승자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고비'라는 표현이 어제의 승자가 된 기분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 같다.

며칠 전, 월드컵 경기장 공원에 갔다가 재밌는 구경을 했다. 경기장 남문 큰 계단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워낙 이 곳이 평소 행사를 많이 하는 곳이겠거니 하고 지나가려는데, 그들은 바로 홈에버 직원들. 얼마 전까지 뉴스에서 연달아 떠들어대던 홈에버 노조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아닌 홈에버 정직원들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한 마디로 파업 등으로 불법 영업 방해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맹렬히 소수의 극렬 노조원들과 민노총 등 외부 세력을 규탄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정당한 요구이지만 이렇게 서로의 이익, 생존만을 위해 집단 시위를 벌여 서로가 서로를 밀쳐내는 모습이 영 보기 좋지만은 않다.

물론 비정규직이란 시스템이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모순들을 담고 있는 사회적 문제이다. 따라서 민노총과 민노당이 공권력게 매우 격렬하게 대치하면서까지 이 이랜드 사태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점도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최근 민노총을 비롯한 노조가 방법론적인 면에서 너무 극단주의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목소리가 사회에 팽배해질 정도로 지금까지 보여준 이랜드 사태에서의 폭력 시위는 그 도가 과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상생. 공존. 어쩌면 현 참여정부의 핵심 키워드. 앞서 말한 듯 심각한 이랜드 사태로 가장 많이 득을 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격렬한 시위로 자신들의 진가를 다시 한번 드러낸 노조들? 이들은 선교봉사단을 납치테러해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고 자부하는 탈레반들과 다를바 없다. 그럼 이랜드 기업의 사측? 그들이야말로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한 장본인들이다. 외주용역화 등의 비정규직화를 통해 얻는 작은 이익을 위해 기업 이미지를 실추시켜버렸고 사내에서 파업과 시위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속태우며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마트. 유통업계의 라이벌인 이마트가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상암에서 가장 가까운 이마트 서부점은 전국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이마트였지만, 월드컵 경기장에 홈에버가 들어서면서 이 곳 상권을 양분해갔다. 하지만 홈에버가 이번 사태로 몸살을 앓으면서 다시 사람들은 이마트로 몰리게 되었고 홈에버는 정상 영업에도 불구하고 고객 수가 적어졌다. 비단 이 동네의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이랜드 사측과 노조, 양측 모두 상생과 공존에 실패하는 바람에 어느 한 쪽의 승자도 없는 패자만의 게임 속으로 빠져들어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잠잠하나 싶더니 역시나 현대차 노조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번 파업을 무기로 봉기했다. 동서남북의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뉴스'이지만 이제 더 이상 현대차 노조의 파업은 말그대로 뉴스가 아니다. 그런데 막 들려오는 뉴스가 새롭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을 유보하고 협상을 재개한다는 것이다. 두둑히 부른 배처럼 될대로 되라는 식의 두둑한 배짱을 부리던 현대차 노조가 한 발 물러선 것이다.

가장 배불른 노조라는 비아냥을 받는 현대차 노조. 이런 비아냥과 더불어 최근 노조에 대한 사람들의 달라진 시각 또한 그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것이 자의든 타의든 무작정 파업에 돌입하지 않고 다시 한번 사측과 협상을 시도하는 현대차 노조의 자세는 참 다행스럽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는 급진적 노조들의 격렬한 시위와 파업으로 유명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물론 아직까지 성숙되지 못한 우리나라 재계 또한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상생이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을 미루고 평화적인 협상 자세를 취하고, 돈성으로 욕을 먹던 이마트 사측이 비정규직 직원 몇 천여 명을 정규직으로 고용시킨 듯이 패자가 없는 양측 모두 승자만이 존재하는 유쾌한 게임을 즐겨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나 말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 영화에서와 같이 '타인'이라 칭한다. 심지어 살을 부비고 지내는 가족도 '나'가 아니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타인'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 '나'들에게 다른 '타인'들을 그냥 말그대로 '타인'일뿐이다. 나의 삶을 사는데도 하루 하루가 벅찬 우리 '나'들에게는 타인의 삶이란 관심이 별로 가지 않는, 관심이 가더라도 그 관심만이 타인의 삶에 대한 최대한의 관심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는 비교적 '나'와는 거리가 먼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 타인의 삶을 직업으로 삼는 한 남자가 있다. 타인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날밤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는 모든 일들을 도청하고 감시한다.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당을 위해 그 당에 해가 될 만한 타인들은 모두 그의 눈과 귀에 의해 발가벗겨진다. 이러한 그에게 씌여져 있는 것은 '냉정'이라는 안경. 그는 그의 밖의 모든 세상들과 오로지 '냉정'이란 단어로만 소통한다.

문제는 그가 그와 너무도 대비되는 삶을 살아가는 한 타인의 삶을 지켜보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가 '냉정'이란 단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의 '타인'은 '열정'이란 단어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극작가로서의 '열정'은 물론 정의를 열망하는 '열정', 또한 한 여자의 애인으로의 '열정'까지. '타인'에게 그 모든 것이 '열정'이었다. 이 영화에서 '냉정'과 '열정'의 대결은 매우 싱겁게 끝이 난다. 자켓의 자크를 마지막까지 올려입고, 허리와 목을 곧게 세우고 경직된 자세로 뚜벅뚜벅 걷는 그의 모습. 그가 영화 처음에서부터 보여준 그의 '냉정' 그 자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쯤, 그에게 '냉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듯 그의 경직된 발걸음에서 뿐이다.

투명무색의 맑은 물에 떨어진 몇 방울의 빨간 잉크가 그 물의 전체를 조용하게 물들여버리듯, 그의 무미건조한 삶 또한 타인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삶에 어느 순간 조용히 물들어버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물들어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희생, 그 자체이다. 그가 타인이 모르게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지켜봐왔듯이,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시킨다. 받는 사람 마저 알지 못하는 슬픈 희생.

의도된 노출. 모순이다. 원래 노출이란 어떠한 것이 당사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밖으로 드러났을 때를 말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의도된 노출이라니. 앞뒤가 안맞는다. 그런데 가끔 연기자들은 이러한 의도된 노출을 해야할 때가 있다. 관객들에게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숨기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관객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한다. 즉, 관객에게 은밀히 자신의 속내를 들켜야한다.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들어나면 의도적 노출이 아니다. 그냥 일반적인 싱거운 표현일 뿐이다. 또한 의도는 했으나 노출이 충분히 되지 않아도 소용없다. 내용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야기다. 비즐리 역을 맡고 있는 울리쉬 뮤흐는 영화 내내 관객에게 의도된 노출을 한다. 겉으로 비밀 경찰이라는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섬세한 안면 연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가 이미 자신의 직분을 잊은채 타인의 삶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듯 떨리는 그의 미간의 주름은 의도된 노출의 정점이었다.

올리쉬 뮤흐. 독일에서는 큰 인정을 받는 국민배우였다고 한다. 사랑, 예술, 통일 등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그가 무표정으로 헤드폰을 끼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단 몇 미리의 눈동자 움직임만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배우. 어쩌면 '타인'이 아니면서도 '타인의 삶'을 가장 잘 흉내낼 줄 아는 사람이 그가 아닐까 생각된다.

네이버 블로그는 그만두고, 제대로 블로그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