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주인공 두 여성의 목소리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성의 목소리는 의미 없는 소리, 즉 소음에 불과하다. 델마의 남편 데릴은 여행 얘기를 꺼내려는 그녀에게 "아침부터 당신이 소리치는 걸 들어야겠어!"라며 짜증을 낸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처럼 여성의 목소리는 철저히 묵살될 뿐이다. 심지어 정색을 하거나 울면서 호소해도 돌아오는 건 남성들의 협박과 조롱이 전부다.

하지만 총이 등장하면서 관계는 전복된다. 델마의 호소에도 강간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남자는 이마에 총구가 겨누어지자 비로소 행동을 멈춘다. 여성은 총 같은 비대칭 무기(?)를 들어야만 화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총 없이 말로만 이야기하는 건 소리 없는 아우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같은 약소국은 비대칭 전력(핵무기) 개발에 집착한다.

아이러니한 건 주인공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기 위해 총을 사용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면 할수록 자신은 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사회란 질서라는 명목하에 기득권을 유지하고 수직관계를 재생산하고, 그 사회에서는 총기 사용 같은 폭력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같은 출발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에 놓여있는 것이고, 총을 들이대는 것처럼 반칙을 하지 않으면 절대 그 기울기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임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껏 뛰든지 아니면 그 운동장에서 아예 나와버리든지(운동장의 바깥이란 결국 세상이 끝나는 지점이지만). 다시 말해, 남편에게 여행 간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아내로서의 삶을 살거나 온전히 내 목소리를 갖고 깨어있는 자신을 느끼는 자유의 삶을 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주인공들은 후자를 택한다. 기존 사회로의 편입을 거부한 것이다. 이들의 선택은 일탈이 아니다. 일탈이란 말도 결국 기존 사회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선택은 일탈이 아니라 자유나 해방에 가깝다. 법과 질서의 억압적인 상징계를 거부하고 세상 밖의 세계, 그러니까 세상에는 없는 무(vacant)의 공간으로 떠나버린 것이고,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벽한 휴가(vacation)를 완성한 것이다.

UFO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다는 점이다. 사법부의 판결문이라도 읽는 듯한 기시감이 들지만, 그 이상 UFO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없다. 다만 이건 아직 드러난 게 없는 것일 뿐, 어느 쪽으로든 확실한 답이 있을 수밖에 없는 명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그나마 진리에 가까울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는데, 나는 후자가 그것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건 인간의 근대적인 습성일 뿐이다.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은 거의 없었다. 경험적으로 체득하거나 그냥 그렇다고 믿을 뿐이었다. 근대과학이란 미명하에 많은 부분이 과학적 인과관계로 설명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성을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UFO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UFO나 외계 생명체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인간이 갖고 있는 기술 수준에서 우주, 그것도 지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시공간을 탐색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마치 플랑크톤이 고래를 하나의 개체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외계 생명체는 우리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광활한 차원의 존재일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차원의 존재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UFO의 크기가 비행기와 유사하고 외계인의 생김새마저 팔, 다리, 눈 두개의 인간을 닮아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으로 외계 생명체를 상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실제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나사가 밝혀낸 슈퍼박테리아(그나마도 지구에서 발견된 것이지만)처럼 인간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생명의 질서를 완전히 벗어난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발견된 외계인이 SF영화에서처럼 E.T.의 생김새라면 외계 생명체라기보다 차라리 인류의 조상이거나 후손이 아닌지 의심해보는 게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UFO의 존재 가능성을 믿는 것이 (윗분들의 말대로 사회 혼란을 부추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우주에 대한 상상력을 굳이 이성의 한계 안으로 가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UFO 출현 영상을 보면서 조소의 눈빛으로 "이건 합성이야", "이건 빛이 왜곡된거야", "이건 먼지가 찍힌 거야"라고 단정하는 건 무수한 가능성을 좁은 앎의 영역으로 구겨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차라리 이문세의 노래 가사처럼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인간은 상상하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토의 힙합은 백인 주류문화라는 타겟이 있었지만, 국내 힙합은 타겟이라고 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레이시즘 같은 건 그저 먼 나라의 얘기에 불과했으니까. 대신 국내 힙합은 사회 전반을 타겟으로 삼았다. 제도권의 권위주의나 물신주의, 꼰대정신 같은 것들이 힙합의 재료가 된 것이다.

1020은 제도권의 외부에서 그것을 디스할 뿐이다. 아직 제도권으로 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3040은 제도권 안에 있다. 사회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세대다. 그래서 제도권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도권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하다. 제도권 사회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완충장치 없이 세상의 풍파를 직격으로 맞는 것이다.

사회적인 목소리는 20대의 대학생들이 더 크게 낼지 몰라도 사회의 부조리를 직접 체감하는 건 3040이다. 단지 20대처럼 분노하고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3040은 가족도 생각해야 하고 직장도 계속 다녀야 하고 주변의 눈치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가진 게 많아진 사람은 그만큼 잃을 것도 많아지고, 잃을 게 많으면 매사 조심스러워지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처럼.

자유를 갈망하는 건 1020만이 아니다. 어쩌면 3040이 더 간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세상을 비뚤게 보고, 얽매이지 않으려 하고,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힙합은 1020보다 3040에 어울리는 장르일 수도 있다.

개신교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닮아 있다. 자존감 낮은 사람이 인정욕구에 집착해서 조급하게 자신을 어필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개신교도 공격적인 전도활동을 벌인다. 거리에서 물티슈를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협박하기도 한다. 이렇게 외부에 자신을 보이려고 하는 건 둘 다 외부로부터의 인정 혹은 외연적인 확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존감 낮은 사람은 타인의 이야기를 수용하기보다 자기 주장만을 고집한다. 내적인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외부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부족한 것이다. 종교 중에 가장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경향이 강한 건 개신교이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종교적 수준을 넘어 이제 정치 영역까지 영향을 끼치려 하고 있다.

자존감 낮은 사람은 명품 소비를 통해 부족한 내적 자신감을 대신하려 한다. 개신교 교회들도 호화로운 성전을 건설하거나 양적인 성장을 통해 부족한 정통성을 메우려 한다. 요즘 새로 지어지는 대형 교회의 건물만 봐도 이들의 관심이 사회적 약자보다 교세 과시에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가톨릭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을 닮아 있다. 자존감 높은 사람은 인정투쟁에 매달리지 않는다. 타인의 인정보다 내적인 자아실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에도 전도활동은 존재하지만 개신교처럼 요란하지 않다. 기존 성도의 신실한 신앙생활 자체가 하나의 본보기로서 전도활동이 된다고 보기도 한다.

자존감 높은 사람은 타인의 의견에 쿨한 태도를 가진다. 쓸데없는 자존심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타인의 의견이 타당하면 그것을 받아들여 더 나은 방향을 찾을 뿐이다. 가톨릭은 유일신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과학 담론이나 종교간 상생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그만이 갖고 있는 나름의 가치와 역할, 그리고 오랜 역사의 전통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성역화하여 납세를 회피하는 종교가 대부분이지만 가톨릭은 자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여 세속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도 자존감 높은 사람의 성품을 닮아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온라인 소통이 활발해지면서 노사모, 박사모 같은 정치인 팬덤이 형성되었다. 연예인의 팬들이 팬카페라는 집단을 형성해서 팬덤문화를 소비하듯이 정치인의 지지자들도 그룹화되어 상상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종의 새로운 공적 참여로 인식되었다. 투표로만 권리를 행사했던 수동적 유권자들이 이제는 누구의 지지자임을 당당히 밝히고 주체적으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정치를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인식하던 기존의 관념을 타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라인상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면서 일상적으로도 누구나 공적인 참여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출근길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다가 댓글을 다는 것만으로도 여론을 형성하는 데 일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적인 참여가 일반화되면서 정치 팬덤문화는 선구자적 지위를 잃었고 순기능적인 역할보다는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정치적 무관심을 가속화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의 병리적인 현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정치라는 건 가치 판단을 통해 한정된 자원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다. 정치가 어려운 건 각자의 가치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각자의 입장과 가치관과 인생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세상사에 대해 동일한 가치 판단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며, 한 사람의 가치 판단이 다른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도 없는 법이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건 한쪽이 이익을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한쪽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훌륭한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플라톤의 철인 같은 존재가 아닌 이상 공과 실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특정 정치인을 덮어놓고 지지하는 것은 민주적인 지지가 아니라 맹목적인 우상화에 가깝다.

건전한 정치에 있어 비판과 견제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며, 만약 이것이 결여된다면 토론이 실종된 진영논리에만 함몰되기 마련이다. 외부를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에 비유하면서 박근혜를 신격화하는 태극기부대는 그 전형적인 예이고, 수준 차이만 있을 뿐 대깨문이나 문빠라 불리는 이들도 마찬가지의 특성을 갖고 있다.

또 정치 팬덤문화는 정치인에게 연예인의 역할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부작용을 갖고 있다. 연예인은 대중에게 행복과 감동을 주는 존재이지만, 정치인은 그들처럼 행복과 감동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실망과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많다. 시민들이 정치인에게 요구하는 건 순결무구한 봉사정신이지만, 정치인에게 정치라는 건 권력욕이라는 개인적 동기를 원동력으로 하는 집권투쟁의 장에 가깝다. 현실 정치가 사회적 요구로부터 이반되는 건 이 때문이다. 두 목적 가치가 합치되기보다는 상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치는 시민에게 기대보다 실망을 안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치인에게 연예인처럼 긍정적인 피드백만을 바라는 건 정치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이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만 양산해낼 뿐이다.

백화점에서 삐까번쩍한 신상을 고를 때와 중고마켓에서 그나마 괜찮은 중고품을 고를 때의 마음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인을 팬덤으로 소비하려는 건 중고마켓에서 신상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상을 기대하는 눈으로 중고품을 둘러보다보면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기 마련이다. 정치 무관심은 여기서 비롯된다. 실망하고 실망하면서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시민은 중고품 중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그들이 무관심할수록 골라야 하는 중고품 상태는 최악의 품질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