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위에는 나 말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 영화에서와 같이 '타인'이라 칭한다. 심지어 살을 부비고 지내는 가족도 '나'가 아니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타인'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 '나'들에게 다른 '타인'들을 그냥 말그대로 '타인'일뿐이다. 나의 삶을 사는데도 하루 하루가 벅찬 우리 '나'들에게는 타인의 삶이란 관심이 별로 가지 않는, 관심이 가더라도 그 관심만이 타인의 삶에 대한 최대한의 관심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는 비교적 '나'와는 거리가 먼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 타인의 삶을 직업으로 삼는 한 남자가 있다. 타인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날밤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는 모든 일들을 도청하고 감시한다.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당을 위해 그 당에 해가 될 만한 타인들은 모두 그의 눈과 귀에 의해 발가벗겨진다. 이러한 그에게 씌여져 있는 것은 '냉정'이라는 안경. 그는 그의 밖의 모든 세상들과 오로지 '냉정'이란 단어로만 소통한다.

문제는 그가 그와 너무도 대비되는 삶을 살아가는 한 타인의 삶을 지켜보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가 '냉정'이란 단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의 '타인'은 '열정'이란 단어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극작가로서의 '열정'은 물론 정의를 열망하는 '열정', 또한 한 여자의 애인으로의 '열정'까지. '타인'에게 그 모든 것이 '열정'이었다. 이 영화에서 '냉정'과 '열정'의 대결은 매우 싱겁게 끝이 난다. 자켓의 자크를 마지막까지 올려입고, 허리와 목을 곧게 세우고 경직된 자세로 뚜벅뚜벅 걷는 그의 모습. 그가 영화 처음에서부터 보여준 그의 '냉정' 그 자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쯤, 그에게 '냉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듯 그의 경직된 발걸음에서 뿐이다.

투명무색의 맑은 물에 떨어진 몇 방울의 빨간 잉크가 그 물의 전체를 조용하게 물들여버리듯, 그의 무미건조한 삶 또한 타인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삶에 어느 순간 조용히 물들어버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물들어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희생, 그 자체이다. 그가 타인이 모르게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지켜봐왔듯이,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시킨다. 받는 사람 마저 알지 못하는 슬픈 희생.

의도된 노출. 모순이다. 원래 노출이란 어떠한 것이 당사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밖으로 드러났을 때를 말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의도된 노출이라니. 앞뒤가 안맞는다. 그런데 가끔 연기자들은 이러한 의도된 노출을 해야할 때가 있다. 관객들에게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숨기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관객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한다. 즉, 관객에게 은밀히 자신의 속내를 들켜야한다.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들어나면 의도적 노출이 아니다. 그냥 일반적인 싱거운 표현일 뿐이다. 또한 의도는 했으나 노출이 충분히 되지 않아도 소용없다. 내용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야기다. 비즐리 역을 맡고 있는 울리쉬 뮤흐는 영화 내내 관객에게 의도된 노출을 한다. 겉으로 비밀 경찰이라는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섬세한 안면 연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가 이미 자신의 직분을 잊은채 타인의 삶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듯 떨리는 그의 미간의 주름은 의도된 노출의 정점이었다.

올리쉬 뮤흐. 독일에서는 큰 인정을 받는 국민배우였다고 한다. 사랑, 예술, 통일 등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그가 무표정으로 헤드폰을 끼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단 몇 미리의 눈동자 움직임만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배우. 어쩌면 '타인'이 아니면서도 '타인의 삶'을 가장 잘 흉내낼 줄 아는 사람이 그가 아닐까 생각된다.

  • dasan 2007.04.02 16:09 신고 # modify/delete reply

    So Good.
    요즘 어떻게 사냐?
    언능 스킨 꾸미는거 갈켜줘라

    • 주중에 잠깐이라도 뵈요.
      제가 할줄아는건 나모랑 아주 약간의 html이라..
      그거라도 알려드릴 수 있는 한 알려드리겠습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네요^^;

  • 나 금요일에 용식이형 생일 안가고 이거 보러 151 타고 내렸다가 시청에서 시위하길래 얼떨결에 동참했었다.
    위에 글은 하나도 안봤다 나 꼭 보려고 푸헬

  • dasan 2007.04.03 18:48 신고 # modify/delete reply

    그래 그럼 주중에 시간이 되면 한 번 보자꾸나.

  • 아뤼스트 2007.08.24 13:01 # modify/delete reply

    트랙백 감사합니다.
    내용에서 전문가적 기질이 보이시네요...
    작품에 대한 통찰력...부럽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우리는 '콤비'라는 말을 자주 쓴다. 개개인의 능력도 물론 수준 이상이지만, 그 개인이 서로 반응하며 매우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때 우리는 그들을 콤비라고 이름 붙여준다. 세상에는 유명한 콤비가 많다. 90년대 NBA를 주름잡았던 조던-피펜 콤비, 세계 배드민턴 혼합복식을 독식했었던 김동문-나경민 콤비, 최근 큰 유행이었던 차범근-김성주 축구 해설 콤비 등등. 특히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조직적인 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축구에서는 유독 유명한 콤비가 많다. 최근 재결합으로 화두에 오르는 루드-베컴 콤비, 피를로-가투소 콤비, 모리-라울 콤비 등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콤비를 들자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라하-알벨다'콤비를 꼽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대표팀은 명장 히딩크 감독의 조련 아래 매 경기마다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히딩크의 말대로 우리나라 대표팀은 경기를 지배할 줄을 알았고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우리나라 대표팀이 경고 누적과 부상 등으로 인한 몇몇 핵심 주전의 결장으로 석패했었던 독일과의 경기를 제외하고 가장 고전을 겪었던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었다. 앞서 말한데로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세계 최고 수준의 팀들과의 중원 싸움에서 압박을 무기로 절대 밀리지 않은 우리나라였지만 스페인 만큼은 중원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며 매우 고전했다. 바로 스페인의 강력한 미드필더들 때문이었고, 그 중심에는 바라하와 알벨다 콤비가 있었다.

이들은 2000년부터 라리가의 빅3 중 하나인 발렌시아에서 발을 맞추기 시작했고, 이에 더불어 스페인 국가 대표팀에서도 똑같은 자리에서 호흡을 같이 했다.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에서 국가 대표팀을 준우승에 올려놓았고, 02~03 시즌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의 강팀들을 뚫고 소속팀 발렌시아가 리그 우승을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만약 바라하가 알벨다를 만나지 못했고, 알벨다 또한 바라하를 만나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비록 그랬다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평가를 받았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둘 다 유명한 선수들이 되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밀려온다. 과연 나에게는 나만의 바라하, 혹은 알벨다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머릿 속을 스쳐지나가는 몇몇 친구의 얼굴이 살며시 떠오른다. 친구를 생각하니 그를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더 소홀히 대하지는 않았나하는 괜한 후회가 든다. 또한 그 친구는 내가 그 친구를 생각하는 것만큼 나를 가깝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학교를 다닐 때는 줄곧 연락하고 얼굴도 자주보던 친구였지만 각자의 진로로 흩어져버린 후 생각처럼 자주 보고 자주 연락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또 이런 생각도 든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앞으로의 내 인생에 있어서 나의 바라하 혹은 알벨다가 될 사람은 없을까. 있다면 과연 누굴까. 그런 친구 혹은 형, 동생을 찾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래된 친구의 그리움만큼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쉽지만은 않은가보다.

네이버 블로그는 그만두고, 제대로 블로그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