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 의해 실패 당한 게 아니다.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1960년도 아니었고 1979년도 아니었고 2024년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국회 담장을 넘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 국회에 출동한 군대를 막아섰기 때문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 국회 앞에 모여 시위를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 군인의 총부리를 잡아 흔들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도 아니다.

이런 행위들이 없었어도 내란은 실패했을 것이다. 그것이 용납될 수 없다는 걸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던 2024년의 세상이었으니까. 출근길의 비좁은 지하철과 버스는 참을 수 있어도 출근길 거리를 탱크와 군인들이 점령한 모습은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국민을 계몽하겠다며 내란을 선동한 이들이 뒤틀린 선민의식을 가졌다고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내란을 누군가의 행위로 저지시켰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의 선민의식을 가진 셈이다. 양쪽 모두 이 세상보다 자신이 앞서 있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누군가 막았기 때문에 내란이 실패했다는 생각은 누군가 막지 않았다면 내란이 성공했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 내란이 통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내란을 모의했던 이들과 누군가 내란을 막아냈다고 여기는 이들은 묘하게 닮아있기도 하다.

내란을 바로잡은 건 사회의 거대한 자정작용이다. 오랜 세월 거듭된 시행착오, 역사적 기억, 자구적 노력 등으로 형성한 사회적 의식이란 게 미치광이 통수권자가 선을 넘었을 경우 어떻게 작동하는지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해 공수부대원이 개머리판으로 국회 유리창을 깨고 있는 장면이 송출되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차분함을 잃지 않았던 건 누군가가 부조리를 막아주기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자정작용에 대해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원을 누빈다. 아빠가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가고 싶은 곳으로 그냥 내달린다. 경험으로 아는 거다. 아빠가 자기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가든 아빠가 따라올 것이라는 사실을.

아이에게 변수가 생길 땐 달려가면 된다. 위험한 곳으로 가려 하면 달려가서 방향을 틀어주고, 걷다가 넘어지면 달려가서 별일 아니라는 듯 흙을 툭툭 털어주고, 아빠를 찾는 듯 하면 뒤에 따라가 인기척을 내면서.

아이는 얼마간의 해방을 누리고 나는 그런 아이를 눈으로 좇고, 그렇게 산책하는 시간이 좋았다. 항상 이거 하지 말아라 저거 하지 말아라 옭아매던 아이에게 잠깐의 자유를 준 것 같아 흐뭇하기도 하고, 뭔가에 몰두하는 아이의 모습이나 불안정하게 걷는 아이의 걸음걸이는 늘 봐도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은 이내 애틋함으로 번져간다. 이 시간도 결국 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이는 금방 자랄 것이고 언제까지나 아이를 내 시야에 둘 수만은 없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아빠 없이도 부딪히고 넘어져가며 세상으로 나가야 하니까.

누구나 겪는 과정이지만, 그리고 그 누구나라는 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 범주에 내 아이를 포함시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불안정하게 걷고 넘어질 듯 뛰는 아이를 홀로 세상에 내놓는 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커간다.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자주 산책을 하는 것밖에 없다.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아이가 ‘고고 다이노’를 그만 좋아할 것 같다던 가을이 오면 부지런히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고 싶다.

어빙 고프만은 삶을 무대와 백스테이지로 구분한다. 무대가 남들에게 보여지는 사회적 공간이라면, 백스테이지는 무대에서의 시간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개인적 공간이다.

SNS에 포착되는 건 주로 무대 위에서의 모습들이다. 이왕 보여지는 거 일상에서 먹는 라면 사진보다 유명한 식당에서 먹는 요리 사진을 올리는 건 자연스런 습성이니까. 가슴을 부풀려 몸을 크게 보이게끔 애쓰는 비둘기처럼 모든 동물들이 갖고 있는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은 백스테이지에서 보내는 시간들로 이루어진다.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집을 정리하거나 널부러져 쉬고 있는 때처럼 삶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들이다. 매 끼 외식을 할 순 없고 매일 여행을 갈 순 없다. SNS에 게시되는 건 여행지에서의 한 컷뿐이지만 그 순간을 위해서는 긴 시간 반복되는 일상들을 견뎌야 한다.

이런 시간들은 SNS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착각하기 쉽다. SNS에 노출된 순간들을 누군가의 전체 삶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이면에 감춰진 백스테이지를 인식할 만한 능력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과정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꾸준히 노력해서 성취하고, 때로는 좌절하지만 그것을 견디는 과정들이 아이의 자아를 만들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무대가 아니라 백스테이지이다. 전시의 공간이 아니라 성장의 공간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대만을 보도록, 무대에서 전시되도록 놔두어선 안 된다

과거에는 아이들도 어른 옆에서 흡연을 했다. 흡연이 유해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원래 새로운 게 나타나면 그것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부작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최소화시켜서 자리 잡게 만드는 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에 대한 SNS 사용을 처음 제한하기 시작한 곳이 공교롭게도 그 SNS를 탄생시킨 캘리포니아 지역이란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SNS에 대한 규제가 후지거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니란 뜻이기도 하다. 자녀의 인터넷 사용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세대는 인터넷을 접하며 자라온 세대다. 신기술에 대한 무지로 선입견부터 갖던 이전 세대와는 다른 세대인 것이다. 이들은 SNS의 이면성이나 알고리즘이 얼마나 무서운 시스템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SNS 기업들이 자신들로부터 빼앗아간 것들을 자녀들로부터는 보호하고 싶은 것이다.

선수를 평가하는 데에는 여러 기준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건 선수의 시장가치를 따지는 것이다. 시장가치 외에도 고려해야 할 기준들이 많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선수의 몸값만큼 적나라하면서도 객관적인 수치를 갖춘 데이터는 없다.

이번 월드컵에 출전했던 국가들을 선수들의 시장가치로 줄세운다면 우리나라는 33위에 해당된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의 월드컵 최종 순위는 34위다.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이 포함된 스쿼드로 왜 32강도 진출하지 못했냐는 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팀에는 그만한 선수들이 훨씬 많은 게 현실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월드컵 성적을 실패로 단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던 히딩크의 기적을 목도했던 탓도 있었을 테고, 평소엔 관심 없다가도 4년마다 돌아오는 스포츠 이벤트에는 일단 이기길 바라는 오래된 습관 같은 것도 있었을 테다. 어쨌든 기대했던 결과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실패라고 한다. 그 기대가 얼마나 현실적이었는지는 되뇌어보지 않고.

그리고 이 집단적 실망감은 점차 마녀사냥으로 변질되고 있다.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한 의혹이 처음 제기되었던 건 2년 전이다. 그때도 수사기관이 개입했었지만 이슈에 비해 수사가 진행되었던 건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 수사가 새롭게 재개되었다는 점은 함의하는 바가 있다.

우선, 월드컵 성적이 좋았다면 이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수사는 철저히 여론에 추동된 것이라는 뜻이고, 그 여론은 누군가를 벌함으로써 이 집단적 실망감 혹은 사회적 분노를 해소하고자 하는 감정상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희생양을 찾으려는 심리다.

홍명보의 무능이 32강 탈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정몽규만 탓할 수도 없고 축구협회만 탓할 수도 없다.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언급되고 있는 논제들이기 때문이다. 엘리트 중심의 협소한 스포츠 기반, 성적 위주의 유소년 시스템, 장기적인 철학의 부재, 소수 해외파에 대한 높은 의존도 등등.

개인을 원망하는 건 쉬운 일이다. 원인이 뭔지 고민하는 것보다 개인을 색출하는 게 훨씬 간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임자를 지목해서 벌을 주면 뭔가 일단락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감정적인 찝찝함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정리되지 않은 채 뭔가 남아있는 걸 조금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을 벌하는 건 문제 해결이 아니라 감정의 해소일 뿐이다. 홍명보를 털어서 벌을 주고 연봉을 회수하는 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순 없다. 오히려 능력 있는 이들마저 감독직을 고사하는 악순환만 초래할 것이다. 정의 실현을 가장한 분풀이로 인해 남게 되는 건 감정적 엔트로피의 증가뿐이다. 쉬운 선택, 편한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정치에 무지했던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건 소위 진보 기득권에 대한 대중의 환멸 때문이었고, 음주운전 전과가 있는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 건 일이라도 제대로 하길 바라는 대중의 체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사실을 정치인들은 알지 못한다. 자당의 후보자가 당선이 된 이유를 자신들에게서 찾는다. 차악을 뽑아놨더니 최선이어서 뽑힌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착각은 집토끼에 대한 집착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최소한 집권 정당이라면 특정 지지층만을 보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봐야 한다. 국정 운영이라는 건 집토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이들까지 아울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외연 확장을 배신의 일종으로 여기는 건 집권 정당으로서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다. 집토끼만 간수하겠다는 건 사회 전체를 조정하기보다 핵심 지지층만을 대표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다음 선거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집토끼 간수는 신념의 정치와는 다르다. 팬덤에 둘러싸인 자리보전 행위를 신념으로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신념은 노무현이 부산에 출마했을 때처럼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했을 때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재건축이든 증축이든 일반 사람들 입장에선 관심 없는 얘기다. 방법이야 어떻든 건물만 튼튼하게 지어지면 그만이니까. 입주자의 동의도 없이 재건축을 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결국 기존 건물에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다는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다.

이렇게 긴 과업(?)을 시작한 건 처음이다. 회사에서 하는 일도 길어야 몇 개월이면 한 사이클이 끝나고, 수험생활도 몇 년 정도 걸렸을 뿐이고, 그나마 길다고 할 수 있는 대입 입시도 최대로 잡아 초중고 도합 12년 정도 걸렸다. 물론 12년이란 기간은 짧다고 할 수 없지만, 갓난아기를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에 비하면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기대수명이 대략 80세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내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에 따라 한 세기에 달하는 아이의 일생이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책에서나 봤던 시간 단위, 심지어는 내가 죽은 뒤에도 긴 시간 지속될 뭔가를 나는 막 시작한 셈이다. 물론 사람은 성장할수록 부모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듯 내 아이도 언젠가는 성인이 되고 언젠가는 독립을 하고 언젠가는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려갈 것이다. 하지만 인생 초반의 경험과 기억들이 그의 가치관, 성격, 취향 등 나머지 인생에 있을 거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한 건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에서 땅이 꺼지고 해일이 몰려오는데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멘붕이 와서 멈춰 있는 사람처럼,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얼마나 큰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멍하니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이 아이를 부족함이 없이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도, 좀만 더 생각을 해보면 나부터가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인데 이런 내가 부족함 없이 아이를 키운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은 회의가 몰려오기도 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십수 년 교육을 받았지만 그 비슷한 것도 배운 적이 없다. 내가 어렸을 적 부모님을 보고 배웠던 것들이나 책, 인터넷 등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통해 좋은 아빠라는 막연한 이미지들을 그려볼 뿐이다. 때로는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엄격하게 키우느냐 혹은 자유분방하게 키우느냐 하는 고민처럼, 정답 없는 답을 계속 탐색해 나가야 하는 거다.

애가 애를 키운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진 어른이 아이를 키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직 나조차도 혼란스러운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은데 그런 내 앞에 문득 제 배고픔 하나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편의점에서 술을 사도 누구 하나 미성년자로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내가 어른이 됐다고 자각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차려보니 난 아빠가 되어버린 거다.

어떤 부모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준비된 부모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른이라고 해서 늘 확신에 차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닌 척하지만 스스로의 불완전함, 혼란, 불안 같은 문제 해결을 아이 때문에 일단 유예하는 것뿐이다. 아이 앞에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삶의 다음 스텝을 밟는 거의 모든 일이 그런 것 같다. 대학생활도 회사생활도 결혼생활도 처음엔 실감나지 않은 상태로 시작했던 것처럼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렇게 시작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분명 다른 차원의 일이긴 하다. 그만큼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지 얼마나 힘든 구간을 얼마나 자주 지나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물론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 각자의 고충과 고민이 있겠지만, 그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준비가 되었는지 의심하기보다 아이와 함께 큰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다음 스텝을 밟는 모든 일이 그렇듯 일단 해봐야 한다. 당장 확신이 없다면 어른인 척이라도 해서. 그러다 보면 아빠로서의 역할이 그나마 편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