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등장하고 온라인 소통이 활발해지면서 노사모, 박사모 같은 정치인 팬덤이 형성되었다. 연예인의 팬들이 팬카페라는 집단을 형성해서 팬덤문화를 소비하듯이 정치인의 지지자들도 그룹화되어 상상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종의 새로운 공적 참여로 인식되었다. 투표로만 권리를 행사했던 수동적 유권자들이 이제는 누구의 지지자임을 당당히 밝히고 주체적으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정치를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인식하던 기존의 관념을 타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라인상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면서 일상적으로도 누구나 공적인 참여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출근길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다가 댓글을 다는 것만으로도 여론을 형성하는 데 일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적인 참여가 일반화되면서 정치 팬덤문화는 선구자적 지위를 잃었고 순기능적인 역할보다는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정치적 무관심을 가속화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의 병리적인 현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정치라는 건 가치 판단을 통해 한정된 자원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다. 정치가 어려운 건 각자의 가치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각자의 입장과 가치관과 인생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세상사에 대해 동일한 가치 판단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며, 한 사람의 가치 판단이 다른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도 없는 법이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건 한쪽이 이익을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한쪽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훌륭한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플라톤의 철인 같은 존재가 아닌 이상 공과 실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특정 정치인을 덮어놓고 지지하는 것은 민주적인 지지가 아니라 맹목적인 우상화에 가깝다.

건전한 정치에 있어 비판과 견제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며, 만약 이것이 결여된다면 토론이 실종된 진영논리에만 함몰되기 마련이다. 외부를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에 비유하면서 박근혜를 신격화하는 태극기부대는 그 전형적인 예이고, 수준 차이만 있을 뿐 대깨문이나 문빠라 불리는 이들도 마찬가지의 특성을 갖고 있다.

또 정치 팬덤문화는 정치인에게 연예인의 역할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부작용을 갖고 있다. 연예인은 대중에게 행복과 감동을 주는 존재이지만, 정치인은 그들처럼 행복과 감동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실망과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많다. 시민들이 정치인에게 요구하는 건 순결무구한 봉사정신이지만, 정치인에게 정치라는 건 권력욕이라는 개인적 동기를 원동력으로 하는 집권투쟁의 장에 가깝다. 현실 정치가 사회적 요구로부터 이반되는 건 이 때문이다. 두 목적 가치가 합치되기보다는 상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치는 시민에게 기대보다 실망을 안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치인에게 연예인처럼 긍정적인 피드백만을 바라는 건 정치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이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만 양산해낼 뿐이다.

백화점에서 삐까번쩍한 신상을 고를 때와 중고마켓에서 그나마 괜찮은 중고품을 고를 때의 마음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인을 팬덤으로 소비하려는 건 중고마켓에서 신상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상을 기대하는 눈으로 중고품을 둘러보다보면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기 마련이다. 정치 무관심은 여기서 비롯된다. 실망하고 실망하면서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시민은 중고품 중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그들이 무관심할수록 골라야 하는 중고품 상태는 최악의 품질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TV에서 가덕신공항 광고를 봤다. 기존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것보다 가덕도에 신공항을 만드는 게 낫다는 걸 강조하는 내용이었는데, 처음에는 이런 광고도 있구나 하고 신기하게 봤지만 먼 동네의 이야기라 이내 무관심해졌다. 단지 상업광고도 아니고 공익광고도 아니고 이런 것도 광고를 하는 구나 하는 생소함 덕분에 이렇게 언급할 수 있을 정도의 기억으로만 남겨졌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공항 건설이 불러일으키는 막대한 파급력을 생각해보면 지자체가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이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예상되는 경제 효과가 뻔히 보이는데 점잔빼고 있을 수만은 없을테니까. 아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력을 기울일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공중파 광고도 못할 건 없다.

하지만 동해/일본해에 대한 다툼은 실체 없는 싸움일 뿐이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듯 국제표준상으로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된다고 해서 그 해역에 있는 독도가 일본땅이 되는 건 아니다. 대마도가 대한해협에 있다고 한국땅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이들 주장으로는) 이미 국제문서의 97%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이 위협받은 적이 있던 것도 아니다. 국외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일말의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중에 걸프만을 ‘페르시아만’으로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아라비아만’으로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사자들이야 열을 올리든 말든, 이런 바쁜 세상에 먼 바다의 지명 분쟁까지 신경쓸 여력도 흥미도 없기 때문이다. 편의상 어느 쪽이든 표준으로 정해지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다.

바꾸어 봐도 똑같다. 우리나 일본이 동해를 두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다 해도 두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실상이다. 외부인들에게 당사자들의 주장은 그저 소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 동해가 ‘동해’나 ‘일본해’로 불려야 하는 당위는 당사자들에게만 있을 뿐이다. 이를 외부인들에게까지 강요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미국을 USA가 아니라 ‘미국’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들이 동해를 어떻게 부르든 그건 그들 마음이다.

국제표준이 ‘일본해’가 되었다고 해서 ‘동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국외에서 어떻게 부르든 우리가 ‘동해’라고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동해를 ‘동해’로 부르는 이상 ‘동해’가 사라질 일은 없다. 걸프만을 ‘걸프만’으로 부른다고 해서 ‘페르시아만’이나 ‘아라바이만’이 사라지는 게 아닌 것처럼.

동해가 ‘동해’가 된다고 해서 국가의 자존심이 세워지는 것도 아니다. 국격은 국가가 자국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지 외부로 보여지는 것에 따라 평가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관심 없는 문제에 대해 우리의 주장을 강요하려 할 수록 스스로가 자존감 낮은 국가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건 외부로부터 인정 받고자 하는 열등감의 한 양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두운 미지의 영역이더라도 이성의 촛불을 비추면 전부 환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자연은 신비의 세계가 아니라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사회도 과학적인 법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이런 사고관이다. 시장의 가격이라는 건 일정한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상황이나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면 주가의 변동도 예측 가능하다는 믿음. 이 믿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안고 불확실과 모험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고 또 이해한대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이해 가능한 합리적 인과관계란 의외로 제한적으로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감정, 욕망, 우연성 같은 요소들이 어우러져 세상은 훨씬 복합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띄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정복했다고 생각했던 자연과학에서도 양자역학 같은 분야는 여전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많은 정보를 공부하고 철저하게 분석한다 해도 주가가 예상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수학적인 경제학 법칙들도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거나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아무리 정교화된 투자기법이나 판단기준이 있다 한들 그것이 성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주식 투자에 실패한 사람들은 이성적이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자책한다. 그리고 보다 냉정하고 분석적으로 투자를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해서, 다시 말해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판단해서) 주식 투자에 실패한 건 아니다. 애초에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해도 주식 투자는 항상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세상은 이성적인 기준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세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다. 타자가 만든 사회적 이미지를 따르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소비 개념처럼 순수한 자기 만족이나 효용보다 사회적 기호를 추구하는 것이다. 소비가 사회적 평가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허세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적 평가를 만들기 위한 모든 범주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평가는 단편적으로 작용할 뿐이다. 예를 들어 명품가방 몇 개를 구매한다고 해서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들어진 평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명품 소비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데, 당연하게도 능력을 벗어난 소비는 빚이라는 반대급부를 남길 수밖에 없다.

이와 똑같이 허세에도 지불해야 하는 반대급부가 있다. 바로 ‘불행’이라는 비용이다. 허세로 내 이미지를 포장할수록 스스로는 점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허세는 워너비와 실제 나의 모습, 둘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자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워너비와 실제의 나를 아무리 동일하게 인식한다고 해도 본인은 둘 사이의 괴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허세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본인에게 부재한 것을 마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속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건 현실을 결핍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다. 삶의 기대치가 현실이 아니라 허세의 이미지에 맞춰지기 때문에 현실을 불행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되면 현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허세의 이미지에서 자아를 찾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거짓의 삶을 사는 리플리가 되는 것이다.

또 허세는 상대적인 만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허세는 우열이나 계급처럼 수직적인 과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기준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기준은 결코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비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끝이 없는 불안 속에서 소모적인 포장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세가 주는 만족감은 명품을 소비했을 때의 만족감과 비슷하다. 찰나의 만족감만 맛볼 뿐이다. 하지만 허세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만든다. 주변인들을 떠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허세는 매력을 떨어트린다. 스스로가 허세만큼 잘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려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니라 실제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