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보다 영화가 좋은 건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어서다. 소설 속 인물은 머릿속으로 그려질 뿐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은 배우를 매개로 살아 숨 쉬게 된다. 텍스트만으로는 절대 전할 수 없는 영역을 표현하는 거다.

한결같음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다. 동화처럼 단면의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중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부모를 마주하는 나와 아이를 마주하는 나는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는 소설보다 입체적인 인물 묘사에 유리하다. 하나의 문장으로 이중적 표현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배우의 연기는 그것을 가능케 만든다. 이 작품처럼 남성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성성을 보여줄 수도 있고 강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약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점차 양쪽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진정한 남성성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강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심지어 어떤 게 선이고 어떤 게 악인지.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보여줄 뿐이다. 배우의 연기로, 그리고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으로, 마치 “영화란 이런 걸 표현하는 거란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영화다.

도덕적 딜레마를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강요된 집단자살을 숭고한 희생으로 미화한 건 불편하다못해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에게는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걸로 생각하던 권위주의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재림은 그의 초기작들('연애의 목적'이나 '우아한 세계')처럼 실제 옆집에 살고 있을 법한 평범한 인간군상을 다루는 것에 더 소질이 있는 것 같다. 한재림의 오래된 팬으로서 다음 작품에서는 왕이나 국토부장관이 아니라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정민이 박해수를 만난 순간부터 영화가 갈 길은 정해진다. 그 이후부터는 변명만 남는다. 왜 그 길로 가야만 하는지. 수리남이라는 배경과 기시감 어린 캐릭터들은 단지 그 길을 위해 소모될 뿐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되는 건지 설명해주는 느낌이다.

윤종빈이 공작에서 선보인 서스펜스는 수리남에서도 자기복제된다. 공작에서의 언더커버가 황정민이었다면 수리남에서는 하정우가 그 역할을 맡는다. 절대권력자를 동요시켜야 하는 언더커버의 페이소스가 반복될 뿐.

물론 변명과 자기복제를 좇는 것만으로도 6시간은 금세 지나가버린다. 그만큼 재밌고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다(영화든 시리즈든 일단 재밌고 봐야 한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윤종빈과 넷플릭스의 만남이었으니까.

윤종빈처럼 젊은 천재형 감독이 벌써 자기복제를 하거나 쉬어가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범죄로 규정해서 처벌할 일이다. 다시 제작비 쥐어주고 기한 내에 새로운 작품을 만들도록 하는 게 그 벌이라면 딱 좋지 않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든 인권을 가진다는 명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구든’이란 전제이다. 만약 ‘누구든’이 아니라 일부만 인권을 가진다고 한다면 사실상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권 같은 기본권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정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기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일부만 그것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건 차별주의자의 논리이다. 예를 들어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할 수 있었던 건 흑인들에겐 아무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권이 일부에게만 인정된다는 인식을 가지는 순간 인권은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권이라는 개념도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정될 때 의미를 갖는다. 동물권을 선별적으로 인정하는 건 모순적 태도에 불과하다. 특정 동물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다른 동물의 생명을 외면하는 건 일종의 차별이다. 동물권을 이야기할 땐 반드시 그것이 모든 동물의 권리임을 전제해야 한다.

인권이 모든 인간들의 권리인 것처럼 동물권도 모든 동물의 권리여야 하는 것이다. (소나 돼지처럼 식용 가축들은 생태계 먹이사슬로 치부하더라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낚시하는 손맛을 위해 물고기를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 개체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멧돼지를 사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물권을 이야기하는 이들 중에 낚시나 멧돼지 포획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동물보호론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기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백인우월주의자들처럼 인권을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일부 인종의 전유물로 보는 이들을 인권주의자로 볼 수 없듯이 동물권을 특정 동물에게만 적용시키는 이들도 진정한 의미에서 동물보호론자들이라 하기 어렵다.

동물보호란 개념에서 논리를 들어내면 남는 건 취향과 기호의 문제가 된다. 가치나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귀여움'이나 '가여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물은 존재만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설득할 게 아니라 차라리 학대 당하는 동물이 가엾지 않냐고 호소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논리적 허영심이 아니라 감정적인 호소만으로도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엔 충분할 것이다.

동물보호론자들의 활동은 ‘동물보호’가 아니라 ‘반려동물보호’에 가깝다. 인권주의자이기보다는 차별주의자에 가깝다. 따라서 근거 없는 도덕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차라리 솔직해지는 게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보다 진솔한 사람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관료를 추첨으로 뽑았다. 누구든 무작위로 돌아가며 관료가 되는 것이다. 이런 선출 방식에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란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관료도 언제든 일반인으로 돌아가야 하고 일반인도 언제든 관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스스로가 지배한다는 점에서 가장 순정에 가까운 민주주의였다.

지금의 정치체제는 순수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가 혼합된 형태로 봐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란 시민이 안건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결정을 내릴 엘리트를 선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요한 결정을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건 각 시민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엘리트들이다.

선거라는 공정한 절차 덕분에 명목적으로는 누구나 정치인이 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극소수의 엘리트만이 정치에 참여할 뿐이다. 소위 ‘정치인’이란 직업군은 바로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집단을 형성하고 기득권을 공고히 다진다.

그렇다고 엘리트를 해체하는 게 답이 될 수는 없다. 정치라는 고도의 가치 판단은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추첨으로 선출하겠다고 한다면 가장 논란이 되는 건 자질 문제일 것이다. 전문성도 없고 경험도 없고 판단력도 없는 이에게 중대한 결정을 맡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를 부정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면, 중요해지는 건 ‘진짜’ 엘리트와 ‘가짜’ 엘리트를 가려내는 일이다. 일차적으로 그 작업을 하는 건 유권자가 아니라 정당이다. 이곳처럼 양당제의 성격이 강한 사회에서는 메이저 정당의 공천 여부가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최종 승자는 유권자가 결정하지만 레이스의 주자를 세우는 건 정당의 몫인 것이다.

문제는 지역사회의 경우 함량미달의 가짜 엘리트가 많다는 점이다. 동네에서 시간 많고 돈 많고 감투 욕심 많은 사람이 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되는 게 지역정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방의원으로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자질들, 예를 들어 법률이나 행정실무에 관한 기본적인 상식도 부족한 이들이 많다.

무관심 탓에 대부분 간과하지만, 지방의원도 적지 않은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다. 지자체의 예산을 편성하고 행정을 감사하고 조례를 제정하기 때문이다. 기초의원이라 하더라도 동네에서는 나름의 권세가 있고 지역 공무원들에게도 상전노릇을 할 수 있다. 그래서 4년마다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며 선거에 나오는 것이다.

지역 정치인들의 수준 문제야 하루이틀 논란이 된 게 아니지만, 정치권에서 논의된 적은 없었다. 국회의원 같은 이들에게 지역 정치인들은 하수인인 동시에 지역구의 기반이기도 하니까. 그런 점에서 중앙 정치인과 지역 정치인은 상부상조하는 관계였으며, 때문에 국회의원이 지역 정치인의 자질을 언급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0선의 이준석이었으니까 이 논란을 화두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자격시험의 시행 주체가 국가라면 여러 문제의 소지가 있겠지만, 정당은 어떤 방식으로 후보자를 낼 것인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는 주체다. 기성 정치인들이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자격시험을 자당 후보자들의 경쟁력으로 어필하는 건 정당의 자유이자 권리이고, 결과로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자격시험이 소수의 당내 카르텔을 지키기 수단으로 남용되는 게 아닌 이상 크게 해가 될 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실력을 갖춘 정치 신인들의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고, 양질의 정치인을 가려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공천 자격시험을 엘리트주의로 호도하는 건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현 사회가 고대 그리스처럼 추첨민주주의로 회귀하지 않는 이상 엘리트주의가 해체될 일은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엘리트주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짜 엘리트가 많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386세대(지금은 586이 되었지만)가 저항세대가 아닌 기성세대의 지위로 등극한 순간, 그들의 요란한 목소리 안쪽에서는 얼마나 공허한 울림만이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이 노래하던 낭만적인 담론의 핵심엔 앙상한 안티테제만 남아있던 것이다. 자부심을 가졌던 저항의 기억은 그들에게 훈장인 동시에 족쇄였던 셈이다.

그들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능력과는 얼마나 유리된 세대였는지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야구해설가가 갑자기 배트를 쥐고 타석에 선 것처럼, 냉철하고 능숙한 판단이 필요한 현실세계에서도 그저 허울 좋은 이상과 이론만을 좇을 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윗세대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사이 스스로가 윗세대를 닮아버렸다는 점에 있다. 니체의 말대로 오랫동안 심연을 보다보니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윗세대로부터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을지 몰라도 그 안의 내용적 모순은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산업화세대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부작용을 필요악으로 치부했던 것처럼, 386세대도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한 주변적인 희생과 일탈을 불가피한 과정으로 여겼다. 각자의 지향점은 달랐을지 몰라도 방법론에 있어서는 똑같이 파쇼적이었다.

꼰대의 핵심은 본인이 꼰대인지 몰라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면에 있어서 386세대는 꼰대의 전형이다. 그들은 주로 윗세대와의 비교우위를 통해 스스로를 차별화시키지만, 아랫세대들이 봤을 땐 같은 꼰대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꼰대는 내로남불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선민의식 탓에 내가 하는 건 전부 아름다운 로맨스로 자각하지만, 남들에게는 똑같은 불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최근 들어 386세대라는 안티테제의 안티테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윤석열이라는 인물로 현상화되고 있는데, 그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어떤 가치관과 이념을 갖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윤석열의 스탠스는 안티 문재인(혹은 386)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법치주의의 회복을 얘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보기엔 빈약할 따름이다.

안티테제의 맹점은 테제가 사라지는 순간 드러난다. 안티 문재인의 한계는 정권이 교체되는 순간 모든 목적이 상실된다는 점에 있다. 386세대가 집권 후 스스로의 무능을 드러낸 것처럼,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정치적 진공상태를 낳았던 것처럼, 안티테제의 집권은 익숙한 공허함만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