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부쩍 재롱을 떤다. 손뼉을 치거나 주먹을 오므렸다 펴면서 어른들의 눈치를 살핀다. 아무 분간도 못하던 아기가 이제는 타인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 같다. 어른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칭찬을 해주면 아기는 더 신이 나서 계속 칭찬 받을 짓을 멈추지 않는다.
어른이 되는 건 이런 타인의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인 것 같다. 아이를 움직이게 하는 건 보호자의 반응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아이 때처럼 나를 계속 지켜보며 칭찬하거나 혼내주는 사람이 없다. 혼자 판단하고 혼자 만족해야 한다. 매슬로우의 최종단계, 자아실현처럼.
진짜 어른은 누가 보든 말든 한결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보는 이가 없어도 자신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 의무를 다한다. 보행자도 차도 아무도 없는 교차로에서 홀로 신호를 지키는 사람처럼.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이 멋있었던 건 혼자 있을 때조차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에선 도청 같은 극단적인 장치를 설정한다. 노출되고 있는지도 모르게 노출될 때가 제일 멋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오로지 기념하기 위해 sns에 사진을 올리는 사람은 없다. 기념하는 게 목적이라면 사진으로 남기면 될 뿐이다. 굳이 sns에 올릴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오마카세 식당에서 찍은 음식 사진을 sns에 올리는 건 그순간을 기념하는 것보다 ‘나’는 원래 이런 곳을 찾는 사람임을 드러내고 싶은 심리가 기저에 깔려있다. 미식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니라 타인의 부러움이나 보여지는 자기의 이미지에 만족을 얻는 것이다.
결국 고급식당에 가거나 명품을 사서 sns에 올리는 것과 아이가 보호자의 반응을 살피며 재롱을 부리는 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다만, 아이가 재롱을 부릴 땐 반응을 학습하며 인지능력을 키우게 되는 반면 sns를 하며 남는 건 박탈감과 ‘좋아요’의 숫자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아이는 보호자와의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반면 sns에서는 방문자라는 실체없는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는 데 차이가 있다.
sns를 하게 만드는 인간의 본능들, 이를테면 관계의지, 연결감 같은 것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건 타인이나 외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구속되기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sns는 어른이 되는 걸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꽤 드나들었던 이 블로그도 지금은 조용하다. 포털에도 노출되고 댓글마다 논쟁이 붙었던 예전도 물론 재밌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처럼 보는 이 없는 블로그에 자조적으로 남기는 글들이야말로 진정한 나와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고요한 블로그를 채워나가는 것도 어른이 되는 하나의 연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주류는 호명되지 않는다. 주류니까 호명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를 부를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름 지어지고 불려지는 건 항상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이다. 비장애인이란 말이 장애인이란 말보다 어색하고 이성애자란 말이 동성애자란 말보다 어색한 것도 그 때문이다.
MZ세대란 말도 마찬가지다. MZ세대는 스스로 MZ라고 부른 적이 없다. 기성세대에 의해 MZ로 호명될 뿐이다. 흔히 말하는 MZ의 특성도 귀납적으로 도출된 게 아니다. 단지 기성세대가 느끼는 이질적인 특성들을 갖다붙여놓은 것에 가깝다. 본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MZ세대란 범주로 묶어서 타자화시키는 것이다.
MZ의 특성이라 여겨지는 건 수없이 많다. 하지만 어떤 특성이든 핵심은 하나를 관통한다. MZ는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 쉽게 말해 회식자리에서 고기도 뒤집을 줄 모르는 개념없는 세대라는 거다.
세대론은 시대별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MZ만큼 넓은 연령층을 규정하는 세대론은 없었다. MZ의 가장 맞이인 81년생은 지금 나이 43살이다. 일반적인 직장으로 치면 과장이나 부장 같은 중간관리자에 가깝다. 그렇다고 모든 직장의 과장급을 MZ로 규정하는 게 가능한 걸까. 결국 MZ는 세대론이라기보다 개념없는 구성원을 솎아내기 위한 낙인에 불과하다. 같이 안고 갈 수 없으니 세대 차이를 핑계로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MZ는 꼰대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집단주의의 극단에 꼰대가 있다면 개인주의의 극단에는 MZ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꼰대는 세대보다는 특성을 정의하는 용어인 반면 MZ는 특성이 아니라 세대를 정의하는 용어에 가깝다.
따라서 개인주의의 극단을 호명하고 싶다면 MZ가 아니라 다른 용어를 찾는 편이 낫다. 모든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MZ에 대한 논란 중 대부분은 적확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MZ를 제대로 논하기 위해서는 MZ란 용어에 대한 고민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쟁터를 제외한다면, 사람이 사람을 제일 많이 죽이는 장소는 도로 위가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전쟁터보다 도로가 더 잔인한 곳일 수도 있다. 전쟁은 살상 그 자체가 목적이다. 적군을 죽이기 위해 전쟁터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는 사람은 없다. 도로 위의 사고는 대부분 의도와 무관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한순간 누군가를 죽일 수 있고, 영문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거다.
무작위로 발생한다는 건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군인은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전장을 나선다. 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차에 오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런 일이 당장 나한테 벌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도로 위에서는 실수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도로에서는 사소한 실수 하나도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도로에서 실수하는 건 엘리베이터의 열림닫힘 버튼을 착각하는 거랑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끗 차이로 페달을 착각해 밟는 순간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거다.
사고는 혼자 조심히 운전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이다. 수십 년 무사고를 자랑하는 이들도 결국은 운이 따랐기에 사고가 나지 않았던 거다. 예를 들어 아무리 안전하게 운전을 한들 맞은 편에서 덮쳐오는 음주운전 차량을 피하긴 어렵다. 그동안 무사고였다는 건 운 좋게 그런 차량을 만나지 않았던 것뿐이다. 도로는 불공정한 장소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사고를 당하고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에서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있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지만 운전이란 혼자 길을 만들어 가는 게 아니다. 운전은 도로의 흐름을 타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도로는 어떤 흐름인지 내가 그 흐름에 반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항상 살펴야 한다. 무조건 천천히 가는 게 늘 안전한 건 아니다.
운전이란 가볍고 신나는 마음으로 대할 게 아니라 무겁고 진지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아무리 멋있고 예쁜 차라도 도로에 들어서는 순간 언제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거대한 쇳덩어리가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면허시험도 훨씬 어려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로에서 중요한 건 조작기술이 아니라 판단력이다.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판단력도 자격의 기준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단지 라인에 맞춰 주차할 줄 안다고 해서 자격증을 주는 건 도로 위에 거대한 쇳덩어리만 많아지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이돌 음악은 거의 듣지 않았다. 팝이나 힙합 아니면 오래된 음악만 들었다.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주변에서 뉴진스 이야기를 많이 하길래 청바지라는 어감상 남자그룹이 생겼냐고 물었다가 가차 없이 놀림을 받았다. 일행 중 한 명은 실망했다고까지 했다. 눈빛이 진짜로 보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반성하는 차원에서 열심히 k팝을 들었다. 그런데 더 반성하게 됐다. 예전에는 음악을 들을 때 아이돌 음악을 스킵했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게 아이돌 음악이 아니면 스킵을 하고 있었다. 아이돌 음악이라고 하면 낯간지럽거나 유치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깨달았다. 나란 인간 역시 편견의 동물이었다는 것을.
요즘 아이돌 음악은 팝 못지않게 세련된 느낌이다. 부드럽게 표현하면 잘 다듬어져 있는 느낌이고 신랄하게 말하면 돈의 힘이 느껴진다. 제조품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품에 차이가 있듯이 음악도 기획사나 투자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대중음악은 철저한 문화산업이 되었다. 이제 음악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건 자본이다.
한류 열풍 이후에 기획사가 노리는 건 해외시장이 되었다. 그만큼 투자도 많아졌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법. 실력과 감각을 갖춘 프로듀서들이 수준 높은 음악을 찍어내고 있는 거다.
90년대는 스펀지 같았던 시대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최후의 보루였던 일본문화까지 개방되면서 온갖 해외 문화를 흡수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모든 장르를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락, 컨트리 같은 백인 음악이든 힙합, 재즈 같은 흑인 음악이든 이곳 사람들은 인종이나 역사적 맥락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기존 장르를 변형시켜도 보고 섞어도 보면서 오로지 기호에 따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마치 이 사회가 기초과학보다 응용과학에 두각을 보이는 것처럼, k팝도 하나의 장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오히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시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k팝의 인기는 90년대부터 왕성하게 축적되던 문화적 자산이 산업자본을 만나면서 꽃을 피운 덕분이다.
물론 안타까운 점도 많다. 돈 되는 장르만 주목받으면서 장르에 따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 인디장르는 여전히 배고프다. 예전보다 날것의 느낌이 덜한 점도 아쉽다. 실험적인 시도도 거의 사라졌다. 음악 작업이 개인의 창작보다 기업의 생산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과 파이가 자체가 커진 건 의미 있는 일인 것 같다. 대중음악이 성장할수록 가장 큰 수혜자는 대중이 되기 때문이다.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듣는 귀가 즐거워진 건 반가운 일이다. 편견에 사로잡혀 대중음악을 등한시하고, k팝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스스로를 다시 반성한다. 한편으로는 취향마저도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든데, 다른 것에는 내가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갖고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는 무력함이 들기도 한다.
먹방은 간접체험이다. 직접 맛을 보는 게 아니다. 맛 표현을 읽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음식의 짜기나 맵기는 먹방 진행자의 기준에서 평가되고 보는 이들은 진행자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 음식의 맛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표와 기의는 무관한 것처럼 사실 음식의 맛과 진행자의 맛 표현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진행자는 맛있다고 한 음식이 누군가에겐 맛없는 음식일 수도 있고 반대로 진행자는 맛없다고 한 음식이 누군가에겐 맛있는 음식일 수도 있다.
드라마를 요약본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요약이라도 편집자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텍스트를 요약하는 건 ZIP으로 파일을 압축하는 것과 다르다. 선택과 집중은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해진다. 같은 강의를 듣고도 학생마다 강의 노트가 다른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해하지 않고 요약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 드라마, 소설을 요약본으로 보는 건 그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작품에 대한 편집자의 해석을 보는 거다. 먹방처럼 음식을 직접 먹어보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후기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이제스트판이란 말처럼 짧은 시간 마치 소화하듯 작품을 감상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작품을 감상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감상을 감상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