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지식의 축적은 주로 인간의 두뇌에서 이루어졌다. 그만큼 노인은 많은 경험을 한 사람, 그러니까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한 명의 노인이 죽으면, 하나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늙어간다는 건 곧 현명해진다는 걸 의미했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건 그가 보호받아야 할 약자라서가 아니었다. 노인이 갖고 있는 지혜를 존중하라는 의미였다. 젊은 세대는 노인들로부터 혜안을 얻었다.

하지만 ‘늙음=현명’은 지금의 세상에선 통하지 않는 도식이 되었다. 노인은 더 이상 현명하지 못하다. 노인이 젊은이들보다 많은 경험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근거로 뭔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아졌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재단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지식의 축적을 인간의 두뇌에만 의존했던 건 과거가 되었다. 이제는 그 역할을 메모리칩이 대신하고 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노인에게 묻는 것보다 인터넷을 뒤지는 세상이다. 냉정하게 말해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세상은 끝난 셈이다.

‘노인’이라는 말이 다른 말들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부터다. 더 이상‘늙음’, '늙은 사람'이란 의미에 메리트를 느낄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노인들 스스로도 노인이라는 말을 싫어하게 됐다. 노인이라는 말을 스스로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건 ‘늙음=현명’의 도식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다는 걸 자인하는 것이었다. 결국 ‘노인’이란 말은 다른 말들로 활발하게 대체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건 ‘어르신’이란 용어다. 그래서 이미 많은 관공서의 팻말에는 ‘어르신복지과’라는 요상한 부서명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어르신은 상대적인 개념의 어휘이다. 어르신이 있다면, 아랫사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단어를 부서명처럼 중립적인 언어의 영역에서 사용한다는 것도 웃긴 일이다.) 따라서 스스로를 어르신으로 불리고 싶다는 건 결국 한 가지 이유에서다. 아랫사람에게 웃어른으로서 존경받고 싶다는 것. 그래서 ‘어르신’이란 말은 더 공허해진다. 모순을 갖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어르신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어르신으로 불려야 하는 애달픈 모순 말이다.

이 사회는 다양한 의견들이 얽혀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콘텍스트들 가운데서 자기만의 스탠스를 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각자의 스탠스를 두고 공감의 정도에 따라 피아를 구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보다는 한겨레신문의 논조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오유보다는 일베에 우호적인 사람도 있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특정한 논리를 공유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진영논리는 그 반대의 순서를 갖고 있다. 논리에 따라 피아식별을 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먼저 피아식별을 해놓고 이에 맞춰 논리를 구성하는 게 진영논리라는 것이다. 물론 논리를 만드는 것 자체를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원래 논리라는 건 만들어내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이지 않은 게 문제이지, 논리만 갖춰져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 논리가 향하는 방향에는 정답이라는 게 없으니까.

문제는 진영논리가 사람들의 사고를 편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답을 도출하는 게 아니라 진영에 따라 정해져 있는 답을 따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답정너'처럼. 아무리 설득력 있는 논리라고 한들 그것이 상대의 주장이라면 배척되기 마련이고, 반대로 아무리 설득력 없는 논리여도 내 편이 하는 말이면 두말없이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진영논리는 교조적이다. 진영논리에서 중요한 건 사유가 아니라 위치이기 때문이다.

P.S. 유시민은 진영논리가 왜 나쁜 것이냐고 반문했지만, 그건 그가 정치의 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정치인은 정당 같은 정치세력에 적을 둬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에게 진영논리라는 건 결국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진영논리라는 건 백해무익할 뿐이다.

메타포에도 알맞은 간이라는 게 있다. 메타포가 너무 직접적이면 그건 더 이상 메타포가 아니다. 메타포가 의도된 의미에 너무 근접하면 그건 다큐멘터리일 뿐이다. 반대로 메타포가 의미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어도 곤란하다. 어떤 의미를 그리고 있는지 도통 유추해낼 수 없는 이것들을 우리는 ‘난해하다’고 한다. 간이라는 게 너무 짜서도 안 되고 싱거워서도 안 되는 것처럼, 메타포라는 것도 너무 직접적이어서도 안 되고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도 안 된다.

영화감독의 성향을 간으로 비유하자면, 봉준호나 크리스토퍼 놀란은 백종원 레시피에 가깝다. 굉장히 정교한 계량으로 알맞은 간(약간 간이 센 편)을 찾아내고 풍부한 양념을 사용한다. 그와 반대로 베넷 밀러는 심심한 간으로도 깊은 맛을 내고, 더 나아가서 홍상수는 간은커녕 재료만 대충 손질해서 던져주면서 “간 따위는 니들이 알아서 맞춰.”라고 할 것 같다.

내가 만나는 주변의 사람들 중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생각이 같으려면 일단 관심사도 같아야 하는데, 같은 관심사를 갖고 있는 이를 만나는 것부터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둘도 없는 친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 겹쳐지는 관심사의 영역이 항상 넓은 건 아니다. 하긴, 같은 업종에서 생활하는 직장 동료들과도 공통의 관심사를 찾기란 쉽지 않은데, 친구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온라인 공간에서는 클릭 몇 번만으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수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내 생각을 글로 옮겨적으면 수많은 이들이 댓글로 내 생각에 동조해주고, 반대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글에 나도 댓글로 지지를 보낸다. 이따금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가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면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예민한 공격성을 드러내어 그들을 몰아내고, 결국에는 그 사이트를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만의 아지트로 만들어버린다.

온라인 공간에서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같은 생각만을 공유한다는 게 인터넷이 없었던 그 이전의 시대와 비교했을 때 과연 어느 정도의 새로운 가치를 갖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횟수가 얼마나 크다고 한들, 동일성의 반복으로는 자웅동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수많은 생물체가 엄청난 수고를 들여가며 (때로는 애처롭기까지 한) 다른 개체와 생식하는 건 다양한 유전적 특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종의 생명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사고의 영역을 점점 편협하게 만드는 ‘커뮤니티질’은 생각을 키워나가는 외면적인 성장이 아니라 자기 면역력을 파괴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공수처 신설은 또 하나의 권력기관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권력의 파이를 나누는 게 아니라 새로운 파이를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검찰이 문제라면, 검찰의 힘을 분산시키는 게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산에 사는 호랑이가 무섭다고 또 다른 호랑이를 산에 풀어놓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호랑이를 견제하겠다고 또 다른 호랑이를 풀어버리면 그 산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결국 두 마리의 호랑이에 시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검찰이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더라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독점하고 있고, 따라서 검찰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반대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공수처 신설에는 동의할 수가 없는 게, 검찰 개혁에는 공수처를 신설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방법들이 많기 때문이다. 공수처 말고도 검찰 개혁을 위한 유의미한 논의들은 널리고 널렸다. 예를 들어 경찰에 수사권을 넘기고 기소권만 유지하게 한다든지, 검찰을 지역 단위로 쪼개서 자치검찰제를 시행한다든지, 검찰을 합의제기관으로 만들어 행정부로부터 인사권을 독립시킨다든지. 사실 이런 고민들에 비하면 공수처 신설은 미봉책으로 보일 뿐이다. 검찰 개혁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