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를 평가하는 데에는 여러 기준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건 선수의 시장가치를 따지는 것이다. 시장가치 외에도 고려해야 할 기준들이 많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선수의 몸값만큼 적나라하면서도 객관적인 수치를 갖춘 데이터는 없다.

이번 월드컵에 출전했던 국가들을 선수들의 시장가치로 줄세운다면 우리나라는 33위에 해당된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의 월드컵 최종 순위는 34위다.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이 포함된 스쿼드로 왜 32강도 진출하지 못했냐는 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팀에는 그만한 선수들이 훨씬 많은 게 현실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월드컵 성적을 실패로 단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던 히딩크의 기적을 목도했던 탓도 있었을 테고, 평소엔 관심 없다가도 4년마다 돌아오는 스포츠 이벤트에는 일단 이기길 바라는 오래된 습관 같은 것도 있었을 테다. 어쨌든 기대했던 결과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실패라고 한다. 그 기대가 얼마나 현실적이었는지는 되뇌어보지 않고.

그리고 이 집단적 실망감은 점차 마녀사냥으로 변질되고 있다.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한 의혹이 처음 제기되었던 건 2년 전이다. 그때도 수사기관이 개입했었지만 이슈에 비해 수사가 진행되었던 건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 수사가 새롭게 재개되었다는 점은 함의하는 바가 있다.

우선, 월드컵 성적이 좋았다면 이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수사는 철저히 여론에 추동된 것이라는 뜻이고, 그 여론은 누군가를 벌함으로써 이 집단적 실망감 혹은 사회적 분노를 해소하고자 하는 감정상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디사 말해 희생양을 찾으려는 심리다.

홍명보의 무능이 32강 탈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정몽규만 탓할 수도 없고 축구협회만 탓할 수도 없다.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언급되고 있는 논제들이기 때문이다. 엘리트 중심의 협소한 스포츠 기반, 성적 위주의 유소년 시스템, 장기적인 철학의 부재, 소수 해외파에 대한 높은 의존도 등등.

개인을 원망하는 건 쉬운 일이다. 원인이 뭔지 고민하는 것보다 개인을 색출하는 게 훨씬 간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임자를 지목해서 벌을 주면 뭔가 일단락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감정적인 찝찝함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정리되지 않은 채 뭔가 남아있는 걸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을 벌하는 건 문제 해결이 아니라 감정의 해소일 뿐이다. 홍명보를 털어서 벌을 주고 연봉을 회수하는 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순 없다. 오히려 능력 있는 이들마저 감독직을 고사하는 악순환만 초래할 것이다. 정의 실현을 가장한 분풀이로 인해 남게 되는 건 감정적 엔트로피의 증가뿐이다. 쉬운 선택, 편한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정치에 무지했던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건 소위 진보 기득권에 대한 대중의 환멸 때문이었고, 음주운전 전과가 있는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 건 일이라도 제대로 하길 바라는 대중의 체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사실을 정치인들은 알지 못한다. 자당의 후보자가 당선이 된 이유를 자신들에게서 찾는다. 차악을 뽑아놨더니 최선이어서 뽑힌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착각은 집토끼에 대한 집착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최소한 집권 정당이라면 특정 지지층만을 보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봐야 한다. 국정 운영이라는 건 집토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이들까지 아울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외연 확장을 배신의 일종으로 여기는 건 집권 정당으로서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다. 집토끼만 간수하겠다는 건 사회 전체를 조정하기보다 핵심 지지층만을 대표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다음 선거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집토끼 간수는 신념의 정치와는 다르다. 팬덤에 둘러싸인 자리보전 행위를 신념으로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신념은 노무현이 부산에 출마했을 때처럼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했을 때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재건축이든 증축이든 일반 사람들 입장에선 관심 없는 얘기다. 방법이야 어떻든 건물만 튼튼하게 지어지면 그만이니까. 입주자의 동의도 없이 재건축을 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결국 기존 건물에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다는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다.

“이 모든 일은 10월의 한파특보에서 비롯되었다.” 근래 읽었던 소설 중에 도입부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처음 몇 문단만으로도 괜찮은 작품이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만 봐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소설 역시 첫 문장에서 거의 모든 게 결정되는 법이다.

이후에는 현실적인 일상 묘사가 자근자근 전개된다. 딱히 흥미롭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하이퍼리얼리즘이었지만, 작가의 재치 있는 문장만으로도 읽는 즐거움은 충분했다. 특히 육아에 관한 세밀한 묘사가 사실적이었다. 낯선 세상에 대한 간접경험도 재밌지만, 익숙한 것들을 타인의 시선으로 재발견하는 간접경험도 또 다른 재미다.

작품은 내내 전지적 시점과 1인칭을 넘나든다. 처음에는 헷갈리기도 했지만 꽤 자연스러운 변주라 거슬리진 않았다. 반전의 효과나 서사적 쾌감을 고려하면 왜 이런 형식을 택했는지 수긍이 갔다. ‘나’의 시점만을 택했다면 일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불가능했을 거다. 전세 사기가 무서운 건 실재하기 때문이다. 살인이나 오컬트처럼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서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이야기를 정말 있을 법한 누군가의 현실로 보이게끔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사실 작품 속 ‘나’의 행각을 전형적인 전세 사기로 볼 수는 없다. 전세 사기에 걸려들게 만드는 건 대게 금전적인 요인들이다. 최대한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는 세입자의 심리를 역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금전적 요인을 감정적 요인으로 치환하여 새로운 형태의 사기를 친다. 돈이 아니라 인간 관계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더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을 덮고도 한동안 불쾌한 감정을 거둘 수 없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결국 이 작품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내면의 차가운 인간심리를 반전이란 형식으로 증폭시킨다. 시의성, 내용, 형식 이 삼박자가 고루 잘 맞았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재밌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어렸을 땐 잘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걸 싫어하는지. 나에게 맞는 건 뭔지. 나에게 맞지 않는 건 뭔지. 그래서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다. 시행착오 없이도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나를 정의하는 건 힘든 일이다. 반추할 수 있는 시행착오의 시간들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MBTI 검사를 해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신을 갖긴 힘들다.

다만,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알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스스로를 진취적인 성향보다는 안주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이건 실제 나의 모습이기보다는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경쟁에서 싸우기보다 피하려고 했던 선택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 작품이 주는 서늘함은 이 지점에 있다. 스스로의 기억마저도 객관적일 수 없다는 반전. 내 경험을 전제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고자 했지만, 사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에 따라 내 경험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긴 과업(?)을 시작한 건 처음이다. 회사에서 하는 일도 길어야 몇 개월이면 한 사이클이 끝나고, 수험생활도 몇 년 정도 걸렸을 뿐이고, 그나마 길다고 할 수 있는 대입 입시도 최대로 잡아 초중고 도합 12년 정도 걸렸다. 물론 12년이란 기간은 짧다고 할 수 없지만, 갓난아기를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에 비하면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기대수명이 대략 80세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내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에 따라 한 세기에 달하는 아이의 일생이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책에서나 봤던 시간 단위, 심지어는 내가 죽은 뒤에도 긴 시간 지속될 뭔가를 나는 막 시작한 셈이다. 물론 사람은 성장할수록 부모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듯 내 아이도 언젠가는 성인이 되고 언젠가는 독립을 하고 언젠가는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려갈 것이다. 하지만 인생 초반의 경험과 기억들이 그의 가치관, 성격, 취향 등 나머지 인생에 있을 거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한 건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에서 땅이 꺼지고 해일이 몰려오는데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멘붕이 와서 멈춰 있는 사람처럼,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얼마나 큰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멍하니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이 아이를 부족함이 없이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도, 좀만 더 생각을 해보면 나부터가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인데 이런 내가 부족함 없이 아이를 키운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은 회의가 몰려오기도 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십수 년 교육을 받았지만 그 비슷한 것도 배운 적이 없다. 내가 어렸을 적 부모님을 보고 배웠던 것들이나 책, 인터넷 등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통해 좋은 아빠라는 막연한 이미지들을 그려볼 뿐이다. 때로는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엄격하게 키우느냐 혹은 자유분방하게 키우느냐 하는 고민처럼, 정답 없는 답을 계속 탐색해 나가야 하는 거다.

애가 애를 키운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진 어른이 아이를 키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직 나조차도 혼란스러운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은데 그런 내 앞에 문득 제 배고픔 하나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편의점에서 술을 사도 누구 하나 미성년자로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내가 어른이 됐다고 자각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차려보니 난 아빠가 되어버린 거다.

어떤 부모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준비된 부모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른이라고 해서 늘 확신에 차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닌 척하지만 스스로의 불완전함, 혼란, 불안 같은 문제 해결을 아이 때문에 일단 유예하는 것뿐이다. 아이 앞에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삶의 다음 스텝을 밟는 거의 모든 일이 그런 것 같다. 대학생활도 회사생활도 결혼생활도 처음엔 실감나지 않은 상태로 시작했던 것처럼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렇게 시작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분명 다른 차원의 일이긴 하다. 그만큼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지 얼마나 힘든 구간을 얼마나 자주 지나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물론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 각자의 고충과 고민이 있겠지만, 그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준비가 되었는지 의심하기보다 아이와 함께 큰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다음 스텝을 밟는 모든 일이 그렇듯 일단 해봐야 한다. 당장 확신이 없다면 어른인 척이라도 해서. 그러다 보면 아빠로서의 역할이 그나마 편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도 이 사회는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인종차별에도 둔감하다. 조지 플로이드 같은 사건을 보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동남아인이나 중국인에게는 원색적인 차별을 서슴지 않는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문호 개방에 소극적이었던 시간이 길었던 반면 권위주의적 지배 체제는 오랜 시간 유지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분단의 경험도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튀는 언행을 보이면 빨갱이나 반동분자로 몰렸다. 같음과 다름은 이곳에서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물론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세상은 분명 변했다. 이제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 시대다. 하지만 같음에 대한 집착만은 여전하다. 권위주의나 집단주의는 옅어졌지만 한병철의 지적대로 SNS 등에 의한 과잉소통, 과잉정보가 자발적으로 같음을 추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그리는 행복이나 성공의 이미지는 전부 비슷하다. 오마카세 음식 사진이나 호텔방 셀카가 행복을 표상하는 이미지가 되었고,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업해서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의 기준처럼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와 최대한 비슷해지기 위해 소비를 하고 공부하고 취업에 매진한다. 이렇게 비슷비슷한 소비 취향 또는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비주류로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 하나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겉으로 봤을 땐 개인주의가 강화된 것 같지만 되레 삶의 기준은 획일화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만 쪼개졌을 뿐 각각의 알멩이들은 사실 따분할 정도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다르게 개인주의가 다양성이나 개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과거 사회와 비교해 봤을 때 기존의 억압이나 규율에서 벗어난 건 맞지만 그럼으로써 우리가 진정 자유로워졌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름을 그 자체로 수용하지 못하고 우열이나 선악의 잣대로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획일성의 지옥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경직된 세상에서 다름은 곧 고통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