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침을 하거나 코를 훌쩍거리면 주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약은 먹었어?” “병원은 안 가도 돼?” 그리고 감기 증상이 있는데도 약을 먹지 않거나 병원에 가지 않으면 왜 이렇게 미련하냐고 핀잔을 준다. 그만큼 조금이라도 증상이 있으면 약부터 찾는다. (심지어는 주사를 권하기도 한다.) 그것이 감기든 소화불량이든 뭐든 간에.

EBS 다큐프라임에서 본 것 같은데, 국내와 해외의 약 처방 실태에 대해 비교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가벼운 감기 같은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게 국내 병원에서는 십수 종의 약을 처방해준 반면, 해외에서는 약 처방을 거의 받지 못했다. 대부분 환자를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 약 대신 내린 처방은 이런 거였다. 잘 자고 잘 먹고 푹 쉬고 따뜻하게 있어라 같은 당연한 말들.

원래 인간은 병균을 달고 산다. 인간이 평소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건 병균에 접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면역체계 덕에 병균을 이겨내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라 하더라도 약간의 증상만 보일 뿐 몸은 자연회복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감기 증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기침, 발열, 콧물 같은 것도 사실 회복을 위한 일종의 신체 반응일 뿐이다. 물론 천연두나 흑사병처럼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보여준 예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는 긴 인류 역사 중 기껏해야 몇 번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지금의 의료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큰 의미를 둘 필요도 없다.

신종 바이러스에 백신이 없는 건 당연하다. 말 그대로 신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신이라는 건 (의외로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본래 치료약이 아니라 예방약에 불과하다. 예방 접종이 없었다고 해서 그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사스든 메르스든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든 모두 치료는 가능하다. 심지어 병원 치료를 받지 않아도 자연 회복되는 경우가 더 많다. 간혹 사망자가 발생하는 건 면역력이 낮은 노약자가 바이러스에 노출된다거나 다른 질환 환자들이 합병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평소에도 감기나 폐렴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나온다. 단지 이번 사태처럼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늑장대응보다는 과잉대응이 낫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정부나 기관의 몫이다. 일반인들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무슨 좀비 영화에 나오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공공장소에 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외출마저 자제하면서 상점가가 텅텅 비게 만들 필요도 없고, 바이러스라는 것에는 생전 노출된 적 없는 것처럼 온갖 군데에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학교를 휴교해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떼를 쓸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중국인들에 대한 제노포비아가 가장 심각한 것 같다. 물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중국 당국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중국인들 혹은 그 문화마저 싸잡아 혐오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중국에서 발생했다고 중국인을 책망해야 한다면, 아시아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로 우리마저 책망받는 것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심지어는 중국인을 입국금지시켜야 한다는 놀라운 주장도 들리는데, 더 충격적인 건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사실 한국만큼 인종이나 민족차별에 무감각한 곳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인터넷 시대 이후 이슈화되었다는 점이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도 변종 바이러스는 항상 존재했다. 단지 지금처럼 관심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지금은 과거와 달리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대량의 커뮤니케이션이 사회적 이슈를 괴담 수준으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실제로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가 어떻게 잠재워졌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치 대재앙이라도 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지루해질 때쯤이면 다른 이슈거리를 찾는 게 인터넷이란 매체의 특성이니까. 일종의 루틴처럼. 과연 이번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있을까.

과거 지식의 축적은 주로 인간의 두뇌에서 이루어졌다. 그만큼 노인은 많은 경험을 한 사람, 그러니까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한 명의 노인이 죽으면, 하나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늙어간다는 건 곧 현명해진다는 걸 의미했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건 그가 보호받아야 할 약자라서가 아니었다. 노인이 갖고 있는 지혜를 존중하라는 의미였다. 젊은 세대는 노인들로부터 혜안을 얻었다.

하지만 ‘늙음=현명’은 지금의 세상에선 통하지 않는 도식이 되었다. 노인은 더 이상 현명하지 못하다. 노인이 많은 경험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근거로 뭔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아졌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재단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지식의 축적을 인간의 두뇌에만 의존했던 것 또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이제는 그 역할을 메모리칩이 대신하고 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노인에게 묻는 것보다 인터넷을 뒤지는 세상이다. 냉정하게 말해,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세상은 끝난 셈이다.

‘노인’이라는 말이 다른 말들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부터다. 더 이상‘늙음’, '늙은 사람'이란 의미에 메리트를 느낄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노인들 스스로도 노인이라는 말을 싫어하게 됐다. 노인이라는 말을 스스로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건 ‘늙음=현명’의 도식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다는 걸 자인하는 것이었다. 결국 ‘노인’이란 말은 다른 말들로 활발하게 대체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건 ‘어르신’이란 용어다. 그래서 이미 많은 관공서의 팻말에는 ‘어르신복지과’라는 요상한 부서명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어르신은 상대적인 개념의 어휘이다. 어르신이 있다면, 아랫사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단어를 부서명처럼 중립적인 언어의 영역에서 사용한다는 것도 웃긴 일이다.) 따라서 스스로를 어르신으로 불리고 싶다는 건 결국 한 가지 이유에서다. 아랫사람에게 웃어른으로서 존경받고 싶다는 것. 그래서 ‘어르신’이란 말은 더 공허해진다. 모순을 갖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어르신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어르신으로 불려야 하는 애달픈 모순 말이다.

이 사회는 다양한 의견들이 얽혀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콘텍스트들 가운데서 자기만의 스탠스를 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각자의 스탠스를 두고 공감의 정도에 따라 피아를 구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보다는 한겨레신문의 논조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오유보다는 일베에 우호적인 사람도 있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특정한 논리를 공유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진영논리는 그 반대의 순서를 갖고 있다. 논리에 따라 피아식별을 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먼저 피아식별을 해놓고 이에 맞춰 논리를 구성하는 게 진영논리라는 것이다. 물론 논리를 만드는 것 자체를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원래 논리라는 건 만들어내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이지 않은 게 문제이지, 논리만 갖춰져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 논리가 향하는 방향에는 정답이라는 게 없으니까.

문제는 진영논리가 사람들의 사고를 편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답을 도출하는 게 아니라 진영에 따라 정해져 있는 답을 따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답정너'처럼. 아무리 설득력 있는 논리라고 한들 그것이 상대의 주장이라면 배척되기 마련이고, 반대로 아무리 설득력 없는 논리여도 내 편이 하는 말이면 두말없이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진영논리는 교조적이다. 진영논리에서 중요한 건 사유가 아니라 위치이기 때문이다.

P.S. 유시민은 진영논리가 왜 나쁜 것이냐고 반문했지만, 그건 그가 정치의 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정치인은 정당 같은 정치세력에 적을 둬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에게 진영논리라는 건 결국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진영논리라는 건 백해무익할 뿐이다.

메타포에도 알맞은 간이라는 게 있다. 메타포가 너무 직접적이면 그건 더 이상 메타포가 아니다. 메타포가 의도된 의미에 너무 근접하면 그건 다큐멘터리일 뿐이다. 반대로 메타포가 의미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어도 곤란하다. 어떤 의미를 그리고 있는지 도통 유추해낼 수 없는 이것들을 우리는 ‘난해하다’고 한다. 간이라는 게 너무 짜서도 안 되고 싱거워서도 안 되는 것처럼, 메타포라는 것도 너무 직접적이어서도 안 되고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도 안 된다.

영화감독의 성향을 간으로 비유하자면, 봉준호나 크리스토퍼 놀란은 백종원 레시피에 가깝다. 굉장히 정교한 계량으로 알맞은 간(약간 간이 센 편)을 찾아내고 풍부한 양념을 사용한다. 그와 반대로 베넷 밀러는 심심한 간으로도 깊은 맛을 내고, 더 나아가서 홍상수는 간은커녕 재료만 대충 손질해서 던져주면서 “간 따위는 니들이 알아서 맞춰.”라고 할 것 같다.

내가 만나는 주변의 사람들 중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생각이 같으려면 일단 관심사도 같아야 하는데, 같은 관심사를 갖고 있는 이를 만나는 것부터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둘도 없는 친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 겹쳐지는 관심사의 영역이 항상 넓은 건 아니다. 하긴, 같은 업종에서 생활하는 직장 동료들과도 공통의 관심사를 찾기란 쉽지 않은데, 친구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온라인 공간에서는 클릭 몇 번만으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수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내 생각을 글로 옮겨적으면 수많은 이들이 댓글로 내 생각에 동조해주고, 반대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글에 나도 댓글로 지지를 보낸다. 이따금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가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면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예민한 공격성을 드러내어 그들을 몰아내고, 결국에는 그 사이트를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만의 아지트로 만들어버린다.

온라인 공간에서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같은 생각만을 공유한다는 게 인터넷이 없었던 그 이전의 시대와 비교했을 때 과연 어느 정도의 새로운 가치를 갖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횟수가 얼마나 크다고 한들, 동일성의 반복으로는 자웅동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수많은 생물체가 엄청난 수고를 들여가며 (때로는 애처롭기까지 한) 다른 개체와 생식하는 건 다양한 유전적 특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종의 생명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사고의 영역을 점점 편협하게 만드는 ‘커뮤니티질’은 생각을 키워나가는 외면적인 성장이 아니라 자기 면역력을 파괴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