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노트북. 그렇다면 나는 이 요상하게 생긴 물건이 어떻게 노트북인지를 알게 되는 것일까? 굉장히 쓸데없고 할 일 없어 보이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철학, 아니 현재의 모든 학문의 시작은 이 같은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먼 옛날 플라톤 같은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 거창한 '이데아'를 이야기하기도 했고, 신학자들은 그들이 믿는 '신'을 논증의 장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또 흄 같은 짖궂은 회의주의자들은 앞의 노트북 그 자체는 노트북을 보고 있는 시각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는 것(노트북의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다)이라고 이야기 했고, 데카르트나 칸트는 노트북이 나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노트북을 구성하고 있다고 발상을 뒤집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갖고 있을까? 지금의 학자들은 대부분 '대상'이나 '나' 자체보다는 그 둘을 특정한 형식으로 관계짓는 '구조'에 주목한다. 그동안 '나'와 대상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구조나 체계로, 즉 판 전체로 확대시킨 것이다. 이 같은 사조를 뭉뚱그려 '구조주의'라고 한다. '나'는 '대상'의 참된 속성보다는 '나'와 그 '대상'이 이루고 있는 총체적인 체계와 위치, 규칙 속에서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은 OK 사인이 영미권과 우리나라에서는 'ok'와 같은 긍정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일본에서는 돈을 의미하고 브라질에서는 모욕을 주는 욕설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는 이야기처럼 같은 모양의 제스쳐라도 각 사회의 약속 체계마다 완전히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사실 앞서 말한 구조주의는 바로 이 언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구조주의 학자들 중에서 언어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몸이 영혼의 집인 것처럼 우리의 존재 또한 언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언어 덕분이다. 내가 지금 눈 앞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노트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노트북'이란 말 때문이고, 그 노트북이란 사물을 블로그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또한 '노트북'이란 말 때문이다. 물론 앞에 놓여져 있는 네모난 사물을 꼭 '노트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휴대용 컴퓨터'라고 부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언어적 약속에 의해서는 '사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사물과 언어의 관계는 임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때때로 '언어' 자체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언어가 우리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 의식을 규정하는 거대한 체계, 규칙임을 의미한다. 내가 타이핑 하고 있는 이 네모난 물건을 '노트북'이라 부르는 것과 '휴대용 컴퓨터'라 부르는 것은 큰 차이를 가진다. '휴대용 컴퓨터'란 명칭은 다소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노트북'이란 명칭은 우리에게 공책이란 이미지를 그리게 만듦으로써 공책처럼 마음껏 가방에 넣고 휴대할 수 있는 컴팩트하고 편리한 느낌을 준다. 같은 사물이라도 그 명칭에 따라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천지 차이가 된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면 매순간 기업들이 새로운 상품에 대한 참신한 이름을 고안하기 위해 그토록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참신한 상품명이 상품의 매출액을 좌지우지 하는 사실은 단어 하나가 본래의 지시 대상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주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동사 중심의 언어 구조를 갖고 있다. 의식적으로 행위, 관계에 중점을 둔다. 반면 서양에서는 명사가 중요시된다. 같은 동사라 할 지라도 명사의 속성에 따라 그 형식이 바뀐다. 따라서 동양과 달리 사물, 독립적인 개체에 중점을 둔다. 동양에는 be동사(독어로는 sein동사, 불어로는 etre동사)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명사, 주어 중심의 서양 언어체계에서 be동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풍부한 서술어 표현을 갖고 있는 동양적인 언어 구조에 be동사는 굳이 필요가 없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일찍이 동양에서는 행위와 관계에 대한 도덕론이 발달한 반면, 서양에서는 사물에 대한 관찰을 중시하는 인식론, 형이상학 등이 발달했다. 또한 동양에서는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소속에서 자신을 보는 반면 서양에서는 비교적 독립적인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동서양이 갖고 있는 언어 구조의 차이는 수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양쪽의 상이한 문화, 관습, 의식을 만들어냈다. 언어는 더 이상 우리 외부에 있는 개별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 더 깊숙하게 우리 안에 자리잡고 우리의 행위, 의식과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다.

그런데 초등학교의 원어민 영어 수업도 아니고, 대학생과 교수를 상대로 영어로 강의하라는 것은 한 마디로 '무식한' 자태다. 더욱이 역사나 국문학 등 과목을 가리지 않고 영어 강의를 독려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때문에 지금 강의실에는 국문 시를 영어로 배우는 참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얇은 사 고이 접어 나빌레라" 같은 표현에 대해 어떻게 영어로 설명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언어는 단순히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지식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지식의 한 부분을 이룬다. 같은 내용이라 할 지라도 우리말로 강의하는 것과 영어로 강의하는 것은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우리말이 갖고 있는 언어 구조와 의미화에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무작정 우리말과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 영어로 강의를 듣고 이해하게 하는 것은 빵에 된장을 발라먹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대학의 영어 강의는 지식 전달이라는 목적은 물론 그 과정까지도 비효율적으로 만든다.

영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세계화라 불리는 요즘 같은 세상에 영어를 잘한다는 것, 분명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영어에만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실무적인 차원에서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대학 강의까지 영어로 수업하게 만들 까닭은 없다. 대학은 기업에 양질의 인력을 제공하는 단순한 인력 양성소가 아니다. 대학은 그 사회의 학문과 지성의 보고이다. 한국 사회라는 지형 아래 오랜 세월 축적된 학문, 지식, 교양이 이어져오고 덧붙여지고 새롭게 변용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언어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 곳에서 굳이 '영어교육'에 몰입할 필요가 있을까. '영어몰입'은 영어 수업이나 기업, 외무 등 실무적인 차원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 그렇게 해도 충분히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의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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