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제목은 다른 누구라기보다 자신에게 묻는 안부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나에게 묻는 스스로의 안부. 크기는 다를 수 있지만 상처 없이 자란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뒤틀린 행동을 하기도 한다. 약점을 가리기 위해, 뭔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때로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기 위해.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삶을 보면서, 그러니까 그가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살아내는지를 보면서 누군가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다.
삶에는 무수한 실패와 좌절이 뒤따른다. 숙명과도 같다. 직면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해미의 편지들처럼 상자에 봉인해서 구석에 쳐박아둘 수 있는 무엇도 아니다.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냥 감당하며 살아내는 것뿐이다. 나름의 노력과 나름의 방식으로.
파독간호사들에게도 흔히 상상하는 희생적인 삶만 있었던 건 아니다.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각자 추구하는 것을 따라 나름의 삶을 찾으려 했다. 서로에 대한 다정함을 잃지 않고 그들만의 삶을 가꾸어나갔던 것이다.
어차피 삶은 변수들투성이다. 앞으로도 많은 실패와 좌절이 닥쳐올 것이고, 그로 인해 상처도 입고 방황도 하게 될 것이고, 얼마간은 후회와 자기심판에 갇혀있기도 할 것이다. 다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갇혀 있던 스스로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옆에는 다정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표리가 부동하네.” 핵심은 여기에 있다. 누구든 겉과 속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누군가의 겉모습일뿐 그 속에 있는 마음은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무감하고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던 경애처럼. 그리고 융통성 없고 사회성이 부족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누구보다 진심으로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상수처럼.
이 소설은 마음을 다루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지를 이야기한다. 표리부동의 세계에서 겉과 속의 간극,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보통 그 거리를 메우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지만 이 소설에선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거리를 인정하는 데서 모든 게 시작된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냥 놔둔다.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쉽게 하곤 한다. 대화를 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마음은 계산되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대화만으로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도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는 누군가에게 위로랍시고 섣부른 조언을 해준 적이 많다. 하지만 그건 위로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위로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같다. 함부로 이해하고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위로하고 싶은 이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이다. 상처받은 마음과 함께 그저 내 옆에 두는 것. 끝내 내가 이해하지 못한 마음이 있더라도.
자극적이지 않으면 주목 받지 못하는 시대, 표리부동이라고 한다면 ‘표’의 시대에서 겉이 아니라 그 안의 마음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뜨겁거나 차가운 자극들 가운데서도 마음을 다룬 이야기만은 정온동물의 몸속처럼 일정한 온도를 오간다. 그래서 이 소설은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마치 체온을 가진 것처럼.
“이 모든 일은 10월의 한파특보에서 비롯되었다.” 근래 읽었던 소설 중에 도입부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처음 몇 문단만으로도 괜찮은 작품이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만 봐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소설 역시 첫 문장에서 거의 모든 게 결정되는 법이다.
이후에는 현실적인 일상 묘사가 자근자근 전개된다. 딱히 흥미롭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하이퍼리얼리즘이었지만, 작가의 재치 있는 문장만으로도 읽는 즐거움은 충분했다. 특히 육아에 관한 세밀한 묘사가 사실적이었다. 낯선 세상에 대한 간접경험도 재밌지만, 익숙한 것들을 타인의 시선으로 재발견하는 간접경험도 또 다른 재미다.
작품은 내내 전지적 시점과 1인칭을 넘나든다. 처음에는 헷갈리기도 했지만 꽤 자연스러운 변주라 거슬리진 않았다. 반전의 효과나 서사적 쾌감을 고려하면 왜 이런 형식을 택했는지 수긍이 갔다. ‘나’의 시점만을 택했다면 일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불가능했을 거다. 전세 사기가 무서운 건 실재하기 때문이다. 살인이나 오컬트처럼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서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이야기를 정말 있을 법한 누군가의 현실로 보이게끔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사실 작품 속 ‘나’의 행각을 전형적인 전세 사기로 볼 수는 없다. 전세 사기에 걸려들게 만드는 건 대게 금전적인 요인들이다. 최대한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는 세입자의 심리를 역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금전적 요인을 감정적 요인으로 치환하여 새로운 형태의 사기를 친다. 돈이 아니라 인간 관계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더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을 덮고도 한동안 불쾌한 감정을 거둘 수 없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결국 이 작품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내면의 차가운 인간심리를 반전이란 형식으로 증폭시킨다. 시의성, 내용, 형식 이 삼박자가 고루 잘 맞았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재밌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어렸을 땐 잘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걸 싫어하는지. 나에게 맞는 건 뭔지. 나에게 맞지 않는 건 뭔지. 그래서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다. 시행착오 없이도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나를 정의하는 건 힘든 일이다. 반추할 수 있는 시행착오의 시간들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MBTI 검사를 해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신을 갖긴 힘들다.
다만,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알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스스로를 진취적인 성향보다는 안주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이건 실제 나의 모습이기보다는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경쟁에서 싸우기보다 피하려고 했던 선택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 작품이 주는 서늘함은 이 지점에 있다. 스스로의 기억마저도 객관적일 수 없다는 반전. 내 경험을 전제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고자 했지만, 사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에 따라 내 경험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사랑을 다룬 이야기다. 장르를 따지자면 멜로영화다. 전반부는 해준(박해일)의 사랑이, 후반부에는 서래(탕웨이)의 사랑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 두 부분은 남과 여, 산과 바다, 만남과 상실, 관음과 노출의 대조 속에서 완벽한 형식미를 갖춘다. 먼저 등장했던 게 나중엔 어떤 대구법으로 돌아오는지 의미를 찾는 관객들의 유희 속에서 영화의 샷, 앵글, 구도는 하나하나 메타포로 기능한다.
안개는 해준의 테마다. 그래서 해준은 안약을 넣는다. 뛰어난 형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 대한 진실은 보지 못한다. 서래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한 것도 보지 못하고, 서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한 것도 보지 못한다. 해준에게 서래는 안개 속의 여자다. 그리고 그 안개가 걷혔을 땐 이미 서래도 자신처럼 붕괴된, 아니 자신보다 더 철저하게 붕괴된 뒤였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은 스스로를 붕괴시키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처연하게 바닷가를 헤매는 해준을 보며 관객은 느낀다. 보기 좋고 예쁜 것만 아름다운 게 아니란 사실을. 그리고 새삼 깨닫는다. 결국 박찬욱의 영화였다는 것을. 2022년 한 해 봤던 영화 중에 가장 좋았던 작품.
문학보다 영화가 좋은 건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어서다. 소설 속 인물은 머릿속으로 그려질 뿐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은 배우를 매개로 살아 숨 쉬게 된다. 텍스트만으로는 절대 전할 수 없는 영역을 표현하는 거다.
한결같음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다. 동화처럼 단면의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중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부모를 마주하는 나와 아이를 마주하는 나는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는 소설보다 입체적인 인물 묘사에 유리하다. 하나의 문장으로 이중적 표현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배우의 연기는 그것을 가능케 만든다. 이 작품처럼 남성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성성을 보여줄 수도 있고 강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약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점차 양쪽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진정한 남성성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강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심지어 어떤 게 선이고 어떤 게 악인지.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보여줄 뿐이다. 배우의 연기로, 그리고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으로, 마치 “영화란 이런 걸 표현하는 거란다”라고 말해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