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땐 잘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걸 싫어하는지. 나에게 맞는 건 뭔지. 나에게 맞지 않는 건 뭔지. 그래서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다. 시행착오 없이도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나를 정의하는 건 힘든 일이다. 반추할 수 있는 시행착오의 시간들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MBTI 검사를 해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신을 갖긴 힘들다.
다만,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알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스스로를 진취적인 성향보다는 안주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이건 실제 나의 모습이기보다는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경쟁에서 싸우기보다 피하려고 했던 선택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 작품이 주는 서늘함은 이 지점에 있다. 스스로의 기억마저도 객관적일 수 없다는 반전. 내 경험을 전제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고자 했지만, 사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에 따라 내 경험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