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경쟁시장과 시장만능주의(혹은 자유방임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아마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론자들이 믿고 있는 바와는 달리 사실 스미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시장의 모습은 자유방임과 거리가 멀었죠.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유로운 경쟁시장과 시장만능주의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개인의 합리적 이익 추구에 따라 효율적으로 부가 분배되는 이론적 완성모델이라 한다면, 자유방임주의는 홉스가 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상태' 혹은 약육강식의 세태가 벌어지는 무국가상태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스미스는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했습니다. 그는 상공업자들을 믿지 않았죠. 아무런 제재 없이 방치한다면 그들은 끊임없이 담합과 독점을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감시하고 규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그 국가의 역할은 가능한 한 작을수록 바람직하다는 것이죠. 여기서 뉘앙스가 중요합니다. 신자유주의론자들은 '가능한 한 작은'이란 말에 주목합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대한 줄이는 게 선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본래 스미스의 핵심은 '자유로운 시장경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완전경쟁시장과 가까운 시장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자유방임을 견제할 수 있는 제3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만약 현실의 시장에서 독점이나 담합이 방대한 규모로 행해지고 있다면 그만큼 국가의 감시와 규제 또한 늘어나야 하겠죠. 다시 말해 스미스는 국가를 통해 당시 시장의 모습을 최대한 완전경쟁시장에 가깝게 만들고 싶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스미스는 왜 정부의 개입이 '최소한'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요? 그가 살고 있던 당시의 유럽은 중상주의의 시대였습니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내부의 산업자본을 성장시키고 관세를 만들어 보호주의를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자국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일련의 수단으로 국가가 특정 자본들에게 법적 독점권을 부여하던 정경유착의 시절이었죠. 국가의 보호 아래 기업 자본은 폭리를 취하고 소비자들은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던 합법적 독과점이 성행했던 것입니다. 스미스가 혐오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독과점이지 국가의 개입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독과점과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였기 때문에 국가의 개입을 줄이는 것은 바로 곧 독과점을 줄이는 주장과 마찬가지였죠.

오늘날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독과점과 담합의 주체는 국가가 아니죠. 바로 민간기업들입니다. 물론 민간기업의 영향력은 몇 백 년 전 스미스가 상상할 수도 없었을 만큼이나 막강해졌습니다. 그만큼 독과점의 행태도 복잡해지고 견고해졌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견제하고 감시할 국가의 역할과 규모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이제는 '시장이 국가를 넘었다'고 할 만큼 민간시장의 영역이 방대해지면서 국가가 이를 규제하기가 버거워지고 있습니다. 스미스가 말하던 완전경쟁시장은 (물론 그 자체가 이론적 설정이라고 할지라도) 실체의 부분마저도 찾아보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스미스가 하늘에서 이 사회를 지켜보고 있다면 지금도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스미스가 정말 혐오했던 것은 국가의 개입이 아니라 시장의 독과점과 담합이었습니다. 또 그가 몰아세웠던 건 중상주의에서의 국가였지 시장의 감시자로서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독과점과 담합이 팽배한 자유방임으로부터 벗어나 완전경쟁을 가능한 한 최대로 실현시키는 것만이 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죠. 스미스는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추구했던 것이지 자유방임 상태와 같은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업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은 다수로부터 '빨갱이' 취급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그저 없는 자들이 갖고 있는 막연한 반기업 정서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저 또한 외환위기 이후 기업 규제가 완화되는 추세에 대해 굉장히 우려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시장경제 자체를 배격하거나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조에 물든 빨갱이는 더더욱 아니고요. 오히려 저는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시장원리와 자유경쟁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과연 자유경쟁을 토대로 한 시장원리에 충실한 경제 질서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청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노임을 단가 후려치기로 과식하고 있는 대기업이 과연 자유로운 경쟁시장의 주체인지요. 라면, 정유, 밀가루나 이동통신 기업들이 틈만 나면 가격 담함을 모의하고 소비자로부터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과연 경쟁시장에서 바람직한 기업가적 윤리라 할 수 있는지요. 오죽하면 '저녁이 있는 삶'이 정치 피켓구호로 등장할 만큼 지금 이 시간에도 찍소리 못하고 야근을 하고 있는 수많은 직장인들의 단면이 과연 자유로운 시장원리로부터 비롯된 모습인가요. 금융, 기업, 관료가 유착하여 서민들의 예금을 그야말로 '먹튀'한 저축은행이 경쟁시장의 올바른 은행가였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자들은 기업이나 은행 같은 시장 주체들의 자유와 권리를 더욱 확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 우리 시장이 과연 효율적으로 잘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미 독과점 현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죠. 독과점 시장에서 자원 배분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2008년 금융위기로 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이미 유행이 지난 사조가 되었죠.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만능주의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우면서 말입니다. 헌데, '빨갱이'를 시장주의원리를 반대하고 배격하는 이들이라 한다면 오히려 그들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누가 진정한 의미의 '빨갱이'에 가까운 걸까요? 과연 아담 스미스는 뭐라 말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