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주소 표기에서 나타난다. 서양에서는 '나'가 중심이다. 주소 체계가 건물, 도시, 주, 국가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다시피 동양은 그 반대다. 큰 덩어리로부터 시작해서 국가, 주, 시, 동, 건물 순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 의식의 흐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서양에서는 개인을 기준으로 확산되는 방식을 선호한다면, 집단과 관계에 대한 의식이 강한 동양에서는 전체에서 개인으로 수렴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면 개념으로 주거지를 묶고 있는 기존의 주소 체계는 이런 동양의 사고방식에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이나 대만 같은 나라에서도 구역 중심의 주소체계를 갖고 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혹자는 지번제도를 일제의 잔재라고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지번'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 구역 중심의 주소체계 자체를 그렇게 보는 것은 무리다. 바로 위 조선시대만 해도 부목군현, 그 아래에는 또 면리가 갖추어져 있을 정도로 면 개념의 행정구역은 역사적으로도 일반적인 형태였다.

문제는 새롭게 시행된 도로명 주소라는 게 이런 면 개념의 체계를 도로 중심의 선 개념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것이다. 도로명 주소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도로명 주소와 기존의 주소를 선진적인 것과 후진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도식이 그려져 있는 것 같다. 주소체계에도 발전 단계에 따라 보편적인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다뤘듯 동양인과 서양인이 서로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우열을 매기지 않는 것처럼, 기존의 주소체계와 도로명 주소체계도 단지 문화·인류·역사적인 다름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바둑판형 도로 체계를 근대적 산물로만 여기는 것은 오산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서구에서는 도시를 설계할 때 주요도로부터 건설했다. 서구의 공통조상격인 로마제국은 식민지에 많은 도시를 건설했는데 사실 이 콜로니들이 고스란히 유럽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중앙에 격자형 도로를 먼저 건설한 후 그에 맞게 건물을 축조하는 순이었다. 유럽의 어디를 가도 광장은 꼭 등장하는 것처럼 중심부에 광장이나 성당, 시장을 조성하고 그와 연결된 메인 스트릿을 중심으로 생선 가시처럼 뻗어나가는 길이 만들어져있다. 그리고 그 길을 마주하여 양쪽으로 반듯하게 건물이 들어서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생기는데, 한국의 도시들의 서구 도시 미관을 못따라가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가옥은 길을 향하지 않는다.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남쪽을 향해 집을 짓다보니 도로에서 건물의 옆면이나 뒷면이 자주 보이게 된다. 이로 인해 도로를 따라 건물의 앞면이 나란히 들어서있는 유럽의 거리는 잘 정돈된 느낌을 주는 반면, 건물과 도로가 미적인 통일감을 이루지 못하는 우리의 거리는 다소 산만해 보이기 마련이다. 이 텍스트를 어디서 읽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굉장히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 분석이다. 어쨌든 도로와 상관 없는 집들의 배치는 그만큼 주거 양식이 도로와 큰 상관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좀 더 관점을 넓혀서 본다면, 전통적인 도시 설계 순서도 서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도시를 건설할 때 우선되었던 건 풍수지리 개념이었다. 계획도시였던 한양을 만들 때에도 먼저 풍수지리설에 따라 경복궁 같은 왕궁의 입지를 정했다. 그리고 그 후에 정해진 지점을 잇는 길을 냈다. 물론 종로 같은 중심 도로가 있었지만 서구처럼 그 도로가 도시 설계의 기준이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서양에는 -rue, -street, -road와 같은 거리 중심의 동네 이름이 많은 반면 우리는 -골, -재처럼 자연 지형에서 따온 동네이름이 대부분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길이라는 건 장소와 장소를 잇는 매개였을 뿐,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